연극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한 달라 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입장과 이념 사이, 환경과 변화 사이에서…. 더 나아가 역사와 시대 사이에서 새로운 정의와 함께 그 가치도 달라질 것입니다.

새로운 가치관의 변화는 실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세 끼 똑같은 밥 과 반찬만 1년 365일 먹을 수 없고, 사계절을 같은 옷을 입을 수 없는 본능 적인 문제와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새로운 가치를 꿈꾸게 되고, 아 름다운 사람이기를 소망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소망과 문제들을, 혹은 현실과 역사의 갈등을, 많은 생각과 시간 속에서 녹여내고 공들여서 마침내 확신과 열정으로 표현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창의성이요, 새로운 가치관의 창출이며 연극의 힘 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많은 변화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 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개념 중의 하나가 대중예술입니 다. 영화, 대중음악, TV 등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 생활에서 더욱 가깝게 대할 수 있으며 편리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대중예술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대중예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의 예술이라 불 리던, 즉 엔터테인의 의미가 아닌 순수무용, 미술, 고전음악, 문학, 연극을 순수예술로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구분하여 보았지만, 그렇다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의 가치와 역할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연극의 역할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의 줄기가 잘 뻗고 잎이 초록으로 가꾸 어지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의 뿌리가 단단하고 기둥 이 튼튼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순수예술의 역할이야 말로 나무에서 바로 그 뿌리와 기둥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자연의 변화와 순리에 적응하 면서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낸 결과로 튼튼한 기둥을 갖추어낼 수 있습 니다. 그렇듯 자신의 튼튼한 뿌리를 갖춘 나무의 모습은 다양한 크기와 모 양새의 나무로 가지와 잎, 꽃과 열매로 아름다움과 새로움의 결과를 선사하 게 됩니다. 그리고 그 조화야말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조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쉽고 편리하게 나타나진 않아도 우리의 생활과 생각 속에서 제대로 된 자신의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순수예술 이 버티고 있을 때 그 주변에서 확산되는 나무의 꽃과 열매에 해당하는 대 중예술 역시 반듯하고 분별력 있는 아름다움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삶의, 인생의 조화이기도 합니다. 순수예술과 더불어 연극의 의미는 바로 조화로운 삶을 가꾸기 위한 "답해질 수 없는 질문"이라 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중예술은 TV 리모컨을 조작하듯이 쉽고 편리하게 즐거움과 재미를 다양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선사할 수 있는 장점에 있는 데 비해 순수예술은 자칫 난해하고 진부하다는 편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예술의 기능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문제와 원인에 대한 질문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생각과 해답 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길러내어 자신의 신념과 가치로서 자리잡도록 유도하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생각을 길러내어 그것이 마침내 자신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신념의 몫으로 자리잡게 됐을 때 대중예술을 통해 부가 되는 또 다른 의미와 기쁨은 더욱더 자연스럽게 보태지는 삶의 기쁨이요, 진정한 인생의 의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여기서 다른 순수예술에 비해 연극의 특징과 역할을 이야기하겠습 니다. 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면 '살아있는 예 술'이라는 점과 사람이 사람을 빌려 표현하는 '본능적 자아표현의 예술'이라 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항상 관객과 만나는 공간이 어떤 공간이든 간에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숨을 쉬며 살아 있는 모습을 표현하여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 연극 을 할 때마다 '살아 있는 그 자체가 축복이다'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 리고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와 이념조차도 사람이 만드는 일이고 보면, 살아 있는 매순간 부딪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도 사람과 사람의 일이 고, 또한 가장 추하고 고통스러운 일도 사람과 사람의 일이고 보면, 그것은 바로 인간만이 갖고 있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이 때로는 사람을 아 름답게 승화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을 아주 비열하고 치사하게 만들기 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른 표현을 하게 됩니다. 사랑, 화해, 용서, 기쁨과 같은 평화롭고 넉넉한 감정이 있는가 하 면, 분노, 절망, 권태, 슬픔 등의 편협함이 있고, 갈등, 이해, 공포, 혼란, 죽 음과 같은 극도의 감정들이 우리 안에,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감정을 살아 있도록 표현함으로써 살아 있는 자신의 모 습을 일상과 더불어 이상과 꿈까지도 마치 거울을 보듯 다시 한번 자신과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연극의 힘이고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물론 그밖에도 연극을 통해 표현되고 얻어질 수 있는 의미는 참으로 다 양합니다. 사회적인 현상을 통해 한 시대를 고발할 수도 있고, 역사를 통해 반성과 교훈을 얻을 수도 있으며, 사회과학적인 문제들을 통해 미래를 내다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발이든 반성과 교훈이든 미래이든, 앞서도 말했듯 이, 그 모든 것이 사람의 감정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조화에서 비롯 된다고 생각하면, 역시 살아 있는 공간에서 사람과 사람이 교류할 수 있는 힘을 가진―때로는 사람이 사람 이상으로 승화됨으로써 역사가 역사 이상 으로 반증되고 승화되며 교훈이 교훈 이상의 감동으로 승화될 수 있는― 연극의 힘과 역할은 실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생각, 더불어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질문과 생각의 여지를 연극을 통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저는 연기를 통해 연극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연극은 연기자의 예술이 다"라는 말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연극을 연기예술이라 일컬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사람과 사람이 가꾸어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연극 안에 가장 극대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20년 연기를 해오면서 늘 자신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연극을 통해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그 질문들을 통해 무엇을 함께 느끼고 나누고 더 나아가서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 사람을 꿈꾸고 괜찮은 세상을 만 들 것인가?"

아직도 구체적인 해답을 못 찾고 있지만, 신앙처럼 붙들고 있는 신념이 있습니다.

"연기란 인간성의 승화입니다. 현실과 일상의 관습이나 습관으로부터 벗 어나 더욱 위대한 영역으로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그 감화를 전염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현대연극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폴란드의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제자 중 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의 액터스 스튜디오를 세웠던 리 스트라스버그가 남 긴 말입니다. '인간성의 승화'! 생각만 해도 아찔하게 감동이 되는 꿈입니다. 만약 연극이란 무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간성의 승화를 꿈꾸게 하고 그것 을 전염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를, 혹시 사람 이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를 꿈꾸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일상의 습관 과 편견, 권태, 오만함 등에서 벗어나 더 위대한 영역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현실이, 미래가, 역사가, 인생의 질 자체가 더욱 윤택하고 소중하며 아름답게 길들일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가치관을 갖고 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 가를, 더불어 인생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될 때 연극은 그 질문들 을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신념과 가치를 얻기 위해 생 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생각들은 분명 사람들의 인생의 질과 폭 을 훨씬 더 아름답게 가꾸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연극의 질문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순간과 감동들을 차곡차곡 쌓아 아름다운 인간성의 승화와 더불어 전염시키고 싶은 것이 연극과 인생 을 통한 저의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며, 여러분 도 그 꿈에 동참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