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소개받은 이가형입니다. 약 10년 전에 이 강당에서 정년퇴임식을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어 대단히 감개무량합니다.

내가 1921년에 태어났으니까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된 지 11년 만에 태어나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25년간을 일본 통치하에서 살았습니다. 일본 총독부의 통치방안이라는 것이 조선을 완전히 자기 속국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완전히 일본화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대정 10년 일본 연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일본인으로 되어 있어서, 학병으로 미얀마 전선에 참가했다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미얀마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 조선청년들은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니까 우리를 따로 수용해 달라고 교섭을 했었지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일본 사령부의 장군이 나와서 우리 조선병사들을 한군데 모아 놓고 연합군의 입장을 얘기했습니다. "너희들은 일본인 국적의 병사로서 여기에 와 있고, 또한 아직 나라가 없는지라 너희 나라에서 요구해 오면 그때 고려할 수 있겠으나 현재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학병들은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군의 병사가 된 것이 불만스럽고 일본군에 반항하고 싶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에 협조한 셈이었습니다. 미얀마 전쟁터에서 종군위안부들을 만났을 때는 정말로 일본에 대한 원한이 말할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비록 강제로 끌려왔다고는 하나 끝까지 일본군에 대항하지 못했다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자결하는 한이 있더라도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주입시켜서 저도 늘 자결용 수류탄을 허리에 차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학병은 적군에게 잡힐 것 같아서 수류탄을 터뜨렸는데 터지지 않아서 결국은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내가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한다, 더구나 내 나라를 빼앗은 일본군대의 병사로서 내가 어떻게 여기서 죽을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을 하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삶의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지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몸이 약한 병사였기 때문에 도중에 낙오를 많이 했는데 갑자기 적군 비행기의 총격을 받았습니다. 용케 그 총격을 피하기는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비행기 동체에는 중국 깃발이 붙어 있었어요. 중국군에는 분명히 조선인도 끼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중국 비행기가 왜 나에게 총알을 쏘아 대야만 하고 또 왜 내가 그 총알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왜 이리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나더군요. 연합군과 맞붙을 때는 '나는 연합군에 대해서 하등의 원한도 없는데 왜 내가 연합군을 죽여야 하는지 또 내가 왜 연합군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히 부조리하고 게다가 국적이 애매한 내 처지는 더욱 얄궂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중에도, 젊은 청년이 민주주의를 살려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지원을 했는데 전쟁중에 폭탄 소리, 총 소리, 그리고 자기 옆에서 폭탄을 맞고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고는 정신적으로 쇼크를 받아 전선을 헤매는 그런 단편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전쟁터에 끌려가서 정신적인 상처를 받을 때 그것을 트로마라고 하는데,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기운이 왕성한 젊은 청년에게도 서로 기를 쓰고 상대방을 죽이는 그런 전쟁 행위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얀마에 있던 학도병 중에 저와 만날 때마다 일본 군대에서 탈출하는 그런 꿈과 같은 얘기를 나누던 두 학도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나를 부대에다 남겨 두고 자기 두 사람만 탈출을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1945년 일본군이 미얀마에서 완전히 괴멸되기 불과 몇 달 전이었어요. 그때 나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서 낙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두 학도병이 아무 말도 없이, 어느 의미에서는 나를 인질처럼 두고 도망쳤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분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굴욕감과 함께 동족에게 배신당한 느낌까지 가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 한 사람은 나를 데리고 가자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약골인 가형이를 데리고 갔다가 만약 여의치 않을 땐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다는 겁니다. 전쟁중에는 그런 극한 상황에 흔히 놓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니 그들의 행동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만일 그때 내가 따라 나섰더라면 그 열대 우림에서 어떻게 견뎌 냈을까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합니다. 그들은 탈출에 성공한 다음 미군에 투항하여 인도의 델리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그들은 'O.S.S' 라는 특공대 조직체에 뽑혀서 미국의 산타페 섬으로 후송되어 무전 치는 훈련을 받은 후 고향인 전라도 순천 근방에 낙하산으로 떨어져서 일종의 스파이로서 활동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났어요. 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이 두 사람을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보냈습니다. 반면 나는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1년 남짓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저의 포로생활은 배는 고팠지만 서구 국가들이 제네바 협정을 잘 지켜 우리를 대우했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더 오래 살기 위해서 탈출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탈출하지 못한 내가 훨씬 더 오래 사니까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것입니까!

나의 이 전쟁 경험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참 견디기 어려운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임을 하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나의 옛날 전쟁 경험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지난 1993년 당시 저는 이미 70세가 넘었으나 미얀마에서의 전쟁 경험을 반추하여 소설의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에《분노의 강》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 제목은 내가 전쟁중에 겪은 여러 가지 분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미얀마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세계에서 몇째 가는 큰 강인 살루인강(분노의 강)을 지칭하는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분노의 강》은 소설이 아니고 내 전쟁 경험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니까 논픽션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50년 전의 기억을 논픽션식으로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쓴다는 것이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성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약간의 픽션을 가미하면서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므로 순전한 논픽션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끌려갔던 조선 젊은이들의 시체가 즐비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일제 통치하에서의 억울한 조선인의 처지를 묘사하고자 했고, 역사와 운명의 아이러니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특히 당시 전쟁에 끌려가 현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불행했던 민족의 역사적인 사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자 하는 데 나의 필생의 의욕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되었다면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