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춤, 나의 인생

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는 38년 전에 여러분과 같은 모습으로 이화대학에 다녔었는데 오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춤 하나로 살아온 제 인생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서울 용산에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6·25가 터졌습니다. 당시 공무원이신 아버님 때문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큰집 식구들까지 모두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사촌언니 중에 이화대학교 영문과에 다니는 언니가 있었는데 무용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포크댄스 같은 춤을 배워오면 집에 와서 저희 오빠하고 저에게 가르쳐주곤 했습니다. 저도 언니에게 춤을 배우는 게 좋아서 열심히 따라 배우곤 했는데 크리스마스 때 영국부대에 위문공연을 가서 춤도 추고 무슨 행사만 있으면 오빠하고 댄스를 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처음 춤을 접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중학교에 입학하고는 언니에게 배운 춤을 더 배우고 싶어 무용반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일본에서 활동하시던 임성남 선생님이 잠시 무용을 가르쳐주셨는데 그때 그분의〈백조의 호수〉2막을 처음 보고 '아, 내가 앞으로 춰야 할 춤은 이거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인데 그때부터 정식으로 발레를 배우게 됐습니다. 당시는 중·고등학교가 평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시험을 봐서 가야 했는데 저는 항상 춤만 추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하루종일 수업 듣고 저녁 5시쯤 컴컴해지면 연구소를 찾아서 연습하고,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였는데 통행금지 전에 겨우겨우 집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너무 힘든 나머지 평생 춤만 추고 살순 없나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이화여중고 6년 동안을 보냈는데 매번 시험과 싸우고 밤마다 시험공부를 못해 악몽에 시달리면서 지낸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발레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마냥 행복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발레를 연습할 만한 공간도 제대로 없었고 겨울에는 난방이 안되는 찬 맨바닥에서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대학 농구장을 빌려서 레슨 받고 장갑을 끼고 불을 쬐면서도 마냥 춤이 좋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춤에 몰두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임성남 선생님의 파트너로 주역 무용수가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대학진학 때가 되면서 대학진학을 원하는 집안의 뜻과 춤만 추기를 원하는 제 생각이 달라 갈등이 많았습니다. 저는 대학보다는 발레에만 전념하기를 원했고 집안에서는 대학교육을 받은 뒤에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아버님과 임성남 선생님이 함께 상의를 하신 끝에 교육을 받아서 후배양성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우리나라 무용계에 무언가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결론을 내리시고 대학진학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화여대에 무용과가 없고 체육과 안에 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체육과로 진학을 했습니다. 진학을 하고 보니 마땅히 저를 가르칠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일주일에 한 번인 전공실기 시간만 가지고는 도저히 훌륭한 무용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매일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넓은 체육관에서 홀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대학 4년을 보내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무용만 대여섯 시간씩 연습해도 될까말까인데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여건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늦게까지 혼자 연습하고 미국 대사관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에 발레 장면이 나온다고 하면 찾아가서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외국 발레단의 공연을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제가 접할 수 있는 고급 발레는 대사관 귀퉁이에서 앉아 보는 영화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연습에 몰두하던 중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생긴 무용콩쿠르에서 금상을 타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잘해야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외국에서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후배들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유학준비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저의 학창시절을 많이 말씀드린 것은 여러분들도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되면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말고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의 절반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결국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영국 로얄 발레스쿨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발레스쿨에는 7개의 수준별 과정이 있는데 다행히도 첫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두번째로 수준이 높은 곳에서 연습하게 됐습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제가 다짐했던 것은 자만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꽤 춤을 잘 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것에 만족해서는 훌륭한 무용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항상 제 자신을 질책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로얄 발레스쿨에서 연습하면서도 저녁에는 제가 잘 안되는 분야를 따로 과외를 받으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중 취리히의 오페라발레단에 초청되어 난생 처음 스위스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운이 좋게도 큰 배역을 맡아서 1주일 만에〈백조의 호수〉전막을 공연했습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다른 사람의 칭찬은 뒤로 한 채 제가 부족한 것, 더 배워야 할 것을 연마하기 위해 그곳의 발레스쿨을 찾아가 또 과외를 받곤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너는 뭐하러 과외를 받느냐, 참 독종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프기도 하는데 너는 왜 아프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느냐며 의아해 할 정도로 열심히 발레를 배웠습니다. 스위스에 있으면서 유럽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했는데 국제적인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뉴욕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스위스에서의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진출하라는 말씀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보따리를 싸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생면부지의 미국땅에 가니까 정말 막막했습니다. 다행히도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 그곳에 여장을 풀었지만 스위스에서처럼 누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정기적인 공연이 있는 것도 아닌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용수를 뽑는 광고가 안 나오나 하며 눈이 빠지게 신문광고를 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메리칸 발레씨어터에서 오디션이 있었는데 저는 미국영주권이 없어서 미국 컴퍼니(company)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캐나다 컴퍼니 오디션을 봐서 캐나다로 진출하게 됐습니다. 미국보다는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게 당시는 훨씬 수월했습니다. 캐나다의 3대 발레단 중의 하나인 캐나다 레그란 발레단에서 발레댄서로서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발레단은 첫 공연을 할 때 반드시 캐나다 사람이 주연을 맡습니다. 첫 공연의 주인공을 프리미에르라고 하는데 외국 연기자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외국인을 안 쓰고 자국사람이 첫 공연의 주인공을 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돼 감독님께 항의를 하곤 했습니다. 결국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동안 프리미에르를 한 번도 못했지만 저희 발레단이 공연을 하면 대부분이 저에 대한 평이 기사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쁘띠드 코리아, 작은 한국무용수가 개성 있고 누구보다 테크닉이 뛰어난 춤을 추었다고 극찬했습니다. 프리미에르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런 평을 받으면서 결국 실력만이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나이가 30줄에 가까워졌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건적인 시대였는데 여자가 30세까지 결혼을 안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빨리 결혼을 하라도 재촉하시곤 했습니다. 저도 늙은 무용수가 자신의 그만둘 때를 지나 무대 위에서 쓸쓸히 사라지는 게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화려할 때, 전성기의 정점에 있으면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가 30세라고 생각하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간의 무용수 생활은 수녀나 간호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정말 피곤하고 또 정신적으로 통일이 안되어 있으면 무용이 잘 안됩니다. 곧 정신과 육체가 모두 건강해야 좋은 무용을 보일 수 있는데 이건 곧 수녀나 간호원의 생활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결혼을 하면 남편 시중들랴, 아이 낳고 키우랴 하면서 발레에 전념한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 결혼을 하면 발레를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맞선을 봐서 굉장히 봉건적인 한국남자와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그 분은 캘리포니아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그 분도 결혼 뒤에는 발레를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결혼을 한 뒤 발레를 그만뒀습니다. 평생 발레를 해온 사람이 결혼 뒤 발레를 그만두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일을 배운다고 뜨개질로 남편의 넥타이도 짜고 옷도 짜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낼 즈음 살고있는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시 발레단에서 특별출연을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남편과 상의 끝에 출연하기로 했는데 6개월간 발레를 안하다가 갑자기 연습을 해서 발가락이 부르트고 껍질이 벗겨지는 등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연습을 해서〈호두까기〉공연의 주연을 했었는데 그렇게 한번 공연을 하고 나니까 조금만 더 하자, 안무를 해달라, 발레단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쏟아졌습니다. 그게 운명인지 다시 무용계로 되돌아왔습니다. 남편도 제 의지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그때는 별로 말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용계로 되돌아와서 대학전임강사로부터 부교수(초빙교수) 겸 발레주임 자리까지 맡게 됐습니다. 그곳 전임강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동아콩쿠르대회에 심사위원으로 몇 차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심사위원으로 몇 번 오면서 우리나라 발레계가 정말 낙후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66년 제가 한국을 떠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에 무용과가 생기기는 생겼는데 좋은 무용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무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진학을 위해 하거나 늦게 시작을 해서 이미 발전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학교 시절부터 저를 가르치시던 임성남 선생님이 국립발레단 단장을 맡고 계셨는데 임 선생님이 정년퇴직을 하면서 저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시겠다고 한 겁니다. 저는 그때 미국에서 남편과 오순도순 잘 살고 있는데 굳이 한국에 들어올 이유가 없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것도 있고 또 우리의 발레 현실이 너무 낙후되어 있고 또 개혁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단장직을 수락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국립발레단에 들어와서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후원회도 만들고 문화학교도 만들고, 무용수들이 무용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의 편한 생활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에는 우리 무용계의 무언가를 바꿔놓겠다는 나름대로의 거창한 포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의 성과로 국제콩쿠르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미국의 국제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요즘 우리 대학제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처럼 전 과목의 성적이 우수해야 대학에 진학하는 게 아니라 특정분야에 치중해도 대학을 갈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세계화의 추세에 맞는 그런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솔직히 제가 지금의 제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장점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편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부모님과 학교에서 모든 걸 다 해주다 보니 여러분들이 그 고마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너무 많은 영양분을 주지 말자고 말합니다. 나무에 거름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듯이 여러분들에게 너무 좋은 환경만 제공해주면 화초처럼 나약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나 우려될 정도입니다. 반대로 이런 상황과 토대를 여러분들이 잘만 이용하면 정말 세계적인 그 무언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초대원장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는데 지금의 환경은 과거와는 전혀 다릅니다. 선진국의 교육 시스템을 받아 세계적인 무용수와 이론가, 예술인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기를 통해 전문인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다양성도 중요하지만 예술만큼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부분이 많아 그런 쪽으로 우리 무용계를 이끌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학창시절에 정말 시험 노이로제에 걸려 지낼 정도였습니다. 하고 싶은 무용 대신에 잘 이해도 안 가는 공부를 해서 시험을 봐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시험이 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차라리 무용을 하겠다는 학생에게는 무용시험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저도 무용만 하면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라왔고 자신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도 한 가지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그냥 노력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속된 말로 조금 돌아야 됩니다. 저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인내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니까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겁니다. 물론 주변에서는 진짜 어딘가 이상한 여자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게 저의 무용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요즘 분들은 끈기와 오기가 부족합니다. 저도 오랜 시간 동안 외국생활을 했지만 화려한 생활만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그 당시보다 더 많은 유학생이 있지만 그때보다 성공했다는 말은 별로 많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고생을 통해 자기 분야에 대한 오기가 발동해 죽기살기로 열심히 했다면 지금은 너무 풍요한 나머지 그런 면들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게 안되면 다른 것 하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마세요. 내가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합니다.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를 합니다. 볼쇼이 발레단이나 로얄 발레단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이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완벽한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신체조건은 비록 부족할지 몰라도 노력으로 그런 단점을 커버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아주 듣기 좋은 말이었는데 앞으로의 시대는 팔방미인, 백과사전 같은 사람보다는 한 가지 일에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인 사람들이 더 대접받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최고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열정과 패기, 그리고 끈기와 오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