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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제목 |
노래인생 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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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
87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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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연사 |
김자경 (김자경오페라단 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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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일시 |
1998년 1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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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장소 |
본부관 학술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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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3299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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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세상이 전부 아름답고 예쁘고 좋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나이가 82세나 됐지만 주름 하나 없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저는 이런 이유를 평생 노래만 하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평생을 노래부르며 지내온 작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열두 남매의 막내아들이셨던 아버님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열여섯이던 어머님을 만나 결혼을 해서 경기도 개성에 살림을 차리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집을 뛰쳐나오셨던 아버님은 병원 청소일부터 시작해서 1년여의 공부 끝에 약제사 허가를 따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어머님은 미륨 여학교에 다니셨는데 그때 저를 임신해서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지자 서울의 할머니가 저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학교에 가시면 할머니가 미음을 먹이고 마을 우물가에서 동네 부인들의 동냥젖으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돌이 갓 지났을 때쯤 할머님의 등에 업혀 밤하늘의 달만 보면 그 달을 따달라고 손짓을 하곤 했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달만 보면 달을 따달라고 해서 할머님이 달밤에는 저를 업고 바깥에 못 나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님은 어머님께 달을 갖고 무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달을 따달라는 이런 애는 처음이라며 신기해 하셨다고 합니다.
어쨌든 짧은 개성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다시 들어와서 제가 보통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습니다. 그때에는 달이 아니라 리본에 홀렸는지 큰 리본을 머리에 장식해주면 좋아서 기뻐하고 작은 리본을 달아주면 심술이 나서 학교를 가곤 했다고 합니다. 어머님 기억에 어린 시절의 저는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는 좀 유별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 일 때문에 다시 춘천으로 옮겨갔는데 춘천은 공기도 맑고 당시만 해도 논두렁, 밭두렁이 널려 있는 그런 아름다운 고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벗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머님 말씀으로는 제가 사람들이 보리 치는 데 옆에 가서는 퉁겨져 나온 보리 낱알을 줍고 탈곡할 때도 쌀 한 톨을 주워 다니면서 아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많은 칭찬을 하셨는데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5년여의 시절을 보내면서 정서가 많이 키워졌습니다.
보통학교 6학년 때 원산으로 이사를 가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 그곳은 송도원의 푸른 바다와 명사십리 해당화가 널려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바다는 그냥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고 조개며 생선들이 널려 있는 아주 아름다운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또 고교시절에는 일년에 봄가을 금강산 여행을 다녔습니다. 지금 금강산 관광을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해금강의 비경과 구룡폭포의 심오함을 매년 두 번씩 보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고교시절에는 각종 운동도 잘 해서 무슨 대회만 열리면 나가서 상을 타곤 했었습니다. 또 아버님이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계셨는데 그런 피를 받았는지 음악도 잘해서 성악독창대회에서 상도 타고 재봉기술도 있어서 수예대회에서도 상을 타고 하여튼 다방면으로 재주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 때가 되자 그 많은 재주 중에서 어떤 재주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 오히려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제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아버님께서는 자신이 못다 하신 의학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부모님 말씀에 큰 거역을 안하던 저는 그저 아버님 말씀에 순종해서 동경여의전에 가려고 했는데 음악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저의 마음을 부모님이 아시고는 아버님께서 제가 하고 싶은 음악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그 대신에 이 사회에는 없으면 안될 음악가가 꼭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남들보다 10배, 100배는 더 노력해서 좋은 음악가가 되지 않으면 불효를 하는 거라면서 저를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이화여대 피아노과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이 원산에 있었는데 집에도 안가고 친구 집에 기거하면서 정말 공부만 했습니다. 1학년 겨울방학 때쯤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서야 집에 갔는데 그로부터 사흘 만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사흘 동안 어머님 곁에서 간병할 때 어머님이 제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어머님은 자신이 죽어서 천당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를 알려주겠다며 그것은 제가 남들보다 많이 노력해서 이 사회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면 엄마가 천당 간 줄 알고 그렇지 못한 채 죽지 못해 사는 인간, 그저 밑바닥에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되면 엄마는 지옥에 간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님 말씀에 아버님은 저를 꼭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우시겠다며 어머님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때 저는 꼭 어머님이 천당에 가시도록, 그리고 평생 아들을 못 낳아서 마음고생만 하신 어머님을 위해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의 학창시절은 정말 공부밖에 모르는 시절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주말에 놀러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고작 하는 게 신촌역 앞에서 호떡 사먹는 일이 유일한 유희였습니다. 그리곤 계속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하루 4시간 정도만 자면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온통 집안사람들을 깨우곤 했는데 이런 습관이 공부를 하는 데는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력한 끝에 전교 특대를 했습니다. 당시 전교생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으면 은메달을 주었는데 그걸 제가 탔었습니다. 그렇게 공부에 전념하면서 좀더 많은 공부를 위해 미국유학을 결심하던 중에 태평양전쟁으로 유학길을 접고 이화여고에 취직을 하게 됐습니다.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는데 그곳에서 나중에 제 남편이 된 심형구 씨를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심 씨는 아이도 두 명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저를 자꾸 쫓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신경을 썼는데 제가 학교에 부임한 그 해 11월에 그 분의 부인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해 동경에 가서 빅타 레코드에 취입을 하는 게 있었는데 심 씨가 동경까지 찾아와 결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부남이 처녀를 쫓아다닌다며 신경쓰던 저였지만 이미 심 씨는 부인이 죽었고 또 당시에는 결혼을 안한 여자들은 정신대에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결혼을 서두르게 됐습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당시는 음악 등 예술에 대한 인식이 낮을 때였는데 심씨가 외국에 가서 부부가 함께 공부해 영화처럼, 외국사람들처럼 살아보자고 해서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결혼 뒤에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유학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일단 서울에서 생활을 해야 했는데 우선 전 부인에 있던 두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들었고 집안일도 서툴러서 밥이 끓어 뚜껑이 들썩거리면 겁이 나 도망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또 제가 첫딸을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저래 결혼생활에 서툴고 힘들 때 임신을 했으니 그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 그 당시 학교의 여선생님들 사이에서 제 남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도 많아 이렇게 결혼생활을 할 바에야 차라리 이혼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는데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저만을 위해 이 세상을 살겠다고 맹세를 하고 또 제 아버님이 이혼을 하면 너는 남편도 없고 부모도 없는 사람이 될 거라며 만류하셔서 그냥 살게 됐습니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너무 금실이 좋은 부부가 됐지만 힘든 과정을 겪었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부터는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게 됐는데 틈틈이 준비를 해서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를 공연했습니다. 그때 제가 주연인 춘희를 맡아서 공연했는데 당시의 공연장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공연장이 명동의 부민관이라는 곳이었는데 추운 1월에 공연을 하다 보니 온방시설이 없어 무대 뒤에 숯불을 피워 놓고 공연을 할 정도였습니다. 숯불 연기에 눈도 못 뜰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또 공연 도중 플로어에 뚫린 구멍에 제 구두 뒤축이 끼여서 난리도 피우고 의복도 너무 커서 핀으로 대충 맞춰 입고 나갔는데 중간에 핀이 풀리면서 제 살을 찔러 피를 줄줄 흘리면서 공연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공연을 시작하고 그 해 8월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다짐 속에 떠난 유학길이었는데 우연히 김활란 박사 등과 메트로폴리탄에서 릴리펀스와 탈리어비니가 하는〈루치아디 람메르모아〉공연을 보고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래는 차치하더라도 의상이며 세트, 소도구 조명 등 엄청난 공연을 보고 나는 이런 공연의 먼지만도 못하다는 자괴감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공연을 보다가 결국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극장을 뛰쳐나갔는데 그때 김활란 박사님께서 많은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이 위로의 말 한 마디에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의 제가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활란 박사님과의 일화를 조금 더 소개하면 박사님과 저의 숙소가 두어 블록 떨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며칠 밤을 세우면서 고민하던 중 왜 나 혼자만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려고 하는가? 내가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과 노력을 배워 후배들을 세계적인 성악가로 키울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길을 달려 두어 블록 떨어진 박사님 집을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박사님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공연을 보다가 울고 뛰쳐나간 사람이 새벽에 다시 찾아왔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생각했던 것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박사님께서 "그래, 자경아! 잘 생각했다. 그러나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짧은 말씀이셨지만 그런 상황에서 저를 위로해주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무엇에 낙심했을 때에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잘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했는데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린 애기도 봐주고 유리창도 닦고 접시도 나르고 별 잡일을 다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아무 기술도 배우지 못하는 막노동 같은 일들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 만드는 공장에 가서 미싱 돌리는 일을 했는데 미싱을 돌리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술도 배우고 꼼꼼하게 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니까 플로어 매니저가 월급도 올려주고 잘 대해줬습니다.
그리고 또 주얼리 만드는 곳에서도 일을 했었는데 제가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공장일을 하니까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매니저가 그럼 일거리를 집으로 갖다 주겠다며 사표를 안 받아주는 거였습니다. 주얼리 공장에서도 성실히 일을 해서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회사측에서 마음에 들었는지 집으로 배달을 해줄 테니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해서 친구들을 불러다가 함께 일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돈벌면서 공부를 해서 1958년에 이화대학 교수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고국은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됐지만 여기저기 폐허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페라를 할 생각은 못하고 교수직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1962년, 남편이 동해안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전처의 자식 두 명과 1953년에 제가 낳은 아들까지 아이 셋을 데리고 매년 동해안에 가서 수영을 하곤 했는데 그 해 갑자기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돌아가신 날, 제가 밤에 연락을 받고 동해까지 찾아갔는데 그때까지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정말 앞이 깜깜했습니다. 2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제가 원하던 것을 모두 해주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니. 그리고 그 시신마저 찾지 못하다니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3, 4일이 되도록 시신을 못 찾아 바닷가에 서서 제가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을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고래고래 남편 이름을 부르고 돌아오는 길에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저의 사랑의 목소리가 통해서 남편의 시신을 찾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편의 시신을 찾긴 했지만 20년 동안 저를 아껴주던 사람의 죽음은 저에게는 정말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또 그때 쇼크로 다리를 쓰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날 꿈에 남편이 나타나서 이렇게 바보처럼 살면 어떡하냐고,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살아왔는데 당신과 아이들 모두 성공을 해야 자기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강한 여자가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축을 받으며 학교를 나갔습니다.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걷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반가워했습니다. 아마 제가 계속 누워서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면 영원히 걷지 못했을 겁니다. 제 병의 99%는 머리에서 생겼던 겁니다. 꿈속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일어나자,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이 제 육신의 병까지 고쳤던 겁니다.
그때부터 저는 다시 제 2 의 생을 살았습니다. 주변에서는 다시 재혼하라는 등 별 소리가 많았지만 저는 남편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었습니다. 제 남편이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세요? 하루는 자다가 잠깐 잠에서 깼는데 옆에서 누워 자고 있던 남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남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자꾸 들렸습니다. 저는 한밤중에 웬 고양이가 계속 울어대나 궁금해서 자세히 들으니까 다락에서 고양이 소리가 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다락에 고양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웬일일까 해서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다락에 엎드려서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당신 지금 뭐하고 있냐고 했더니 새벽에 쥐들이 다락에서 왔다갔다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많이 난 모양입니다. 저는 그 소리도 못 듣고 잠에 곯아 떨어졌는데 남편은 그 생쥐들의 부스럭 소리에 제가 잠이 깰까 봐 다락에 올라가서 고양이 소리를 흉내내 쥐들을 쫓고 있었던 겁니다.
어쨌든 제 남편은 제 온갖 어리광까지도 다 받아주면서 저를 사랑해주셨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68년에 오페라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만류 정도가 아니라 모두 반대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오페라를 시작해서 성공한 케이스가 없다 보니 여자가 오페라를 하겠다는 게 황당했던 모양입니다. 저를 잘 이해해주는 김활란 박사님께서도 저를 불러다가 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오페라를 시작하지 말라고요. 누구 한 사람 격려해주기보다는 우려하고 반대를 했지만 오히려 저는 해야 한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오페라를 시작했는데 정말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 다섯 번쯤 공연을 한 뒤에는 정말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렇게 그만두면 많은 사람들의 '그것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느냐' 하는 표정이 눈에 선명해지는 거였습니다. 죽기로 작정을 하고 약을 사기도 한 제 자신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까짓 오페라를 하다가 쓰러지면 쓰러졌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내가 할 일을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제 목숨을 내놓고 오페라에 매달렸습니다. 그게 벌써 30년째입니다. 제 목숨을 내놓고 시작한 오페라는 그 뒤 승승장구해서 좋은 결과를 많이 가져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오페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다거나 조금 관심이 있다거나 해서 오페라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그러다 망하고 그랬는데 저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정당당히, 그리고 제 모든 열정을 담아서 일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는데 특히 국민대학교의 고 김성곤 회장님의 도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성곤 회장님은 우리 오페라단의 최초의 이사님이셨는데 저를 동생처럼 여기시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공연이 있을 때면 꼭 공연장에 찾아와 그때 돈으로 10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시며 격려해주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성곤 회장님을 잊을 수 없고 또 그런 김성곤 선생님이 잘 가꾸신 국민대학교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30년이 넘는 세월을 한길을 계속 파고 쓰러지지 않고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저의 노력도 물론이지만 저를 도와준 주변의 많은 분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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