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볼거리 만들기

반갑습니다. 이 뜻깊은 한글날 제가 여러분의 시간을 망치지 않을까 좀 염려가 되는데, 어쨌거나 제가 한 가지 일 에 한 삼십년 전념하면서 이것저것 뒷전에서 주운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과 아울러 제 작품관에 대해 몇 마디 나눠볼까 합 니다. 제가 1974년에 발표한 작품으로〈태〉(胎)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구성, 그리고〈태〉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어떤 원칙들을 동원해 마무리지었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1973년에 쓰여져 1974년에 공연이 되었는데, 1973년에는 '소급계엄령'이라는 것이 내려진 해였습니다. 시 간을 거슬러서 오늘 자정으로부터 발효가 되는 그런 계엄령이지요. 그때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거세게 항의하던《사상계》의 장준하 씨와 백기완 씨가 명동성당에서 유신철폐를 위한 시위를 극렬하게 벌이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을 지금 처 단해야 된다는 박정희 정권측의 위기감이 소급계엄령을 동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두 사람 이외에도 잡힌 사람들이 있었어요. 연세대 의대 본과 4학년 학생들인데, 여러분도 아시지만 의대 4학년 학생들은 데모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는 젊은이, 이른바 의기를 가진 사람들이 전부 데 모를 했는데, 이 의대생들이 데모에 참가하지 못해 손가락질도 받고 핀잔도 들으니까 자기들도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는 생각에 깡 다구가 생겨서 일단 교문을 나서 신촌 로터리를 한 바퀴 돌고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이 학생들이 바로 그날에 걸렸어요. 그러니 까 결국 백기완, 장준하 그리고 의과대학 본과 4학년 데모 주동자 8명을 소급계엄령으로 전부 처단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런 내용의 방송을 들으면서 장준하 씨나 백기완 씨는 처단을 하든 말든 일단은 자 기가 저지른 일이니까 그 책임을 받아도 마땅한데, 이 8명의 학생들은 큰 뜻보다는 자신들도 대한민국 젊은이라는 것을 표시한 것뿐인데 붙잡혀서 죽는 것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는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위기가 아니었거든요. 또 계엄령 하에서는 단심론이기 때문에 한번 재판을 여느냐 마느냐 결정한 뒤에는 그냥 처단해 버리는 건데,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대학교를 나온 사람으로서 이 학생들을 어떻게 구할 길이 없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득 사육신에 관한 생각이 들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사육신에 대해서 배우죠. 제가 배울 때 국 어 선생님께서는 사육신을 얘기하면서 '삼족을 멸한다', 너의 삼촌이나 외삼촌이 잘못해도 네가 죽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들으면 서 사회라는 곳이 대단히 무서운 곳이구나,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삼촌이 어떻게 하 는지 따라다닐 수도 없고 외삼촌이 잘못하면 나도 죽지만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대한 무력함과 막막함, 그런 것이 저를 엄습 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맹랑한 것이구나, 대책이 없는 것이구나, 언제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구나, 하는 두 려움을 느꼈습니다. 백기완, 장준하 씨 때문에 자기 운명도 아닌데 죽어야 되는 젊은 8명의 영혼들을 내가 위로할 길은 없는가 고민하면 서 사육신에 관한 책을 보다가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당시 사육신들의 삼족은 모두 죽음을 당했는데 제가 발견한 것은 그런 죽음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난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박팽년 가문에서 둘째 자부가 마침 막 해산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전날인가 그 집안의 머슴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박팽년 가문에서 이름도 없이 대대로 먹고 살아온 그 머슴은 그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여기까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종가의 덕이 아니겠는가, 지금 종가의 대가 끊기게 됐으니 차라리 우리 자식을 바치자, 그러면 지금까지 우 리가 받아온 은공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당시 삼족이 전부 죽는 그런 피무덤 속에서 박팽년 가문의 씨는 용케 살 아나지요. 그리고 나중에 성종 때 가서 자수를 합니다. 머슴은 이름 석 자도 가질 수 없는데 이렇게 살아봤자 결국 종의 꼴로 대대로 이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순천 박 씨를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일로 죽음을 당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생각해서 자수를 한 뒤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어 순천 박 씨가 대를 잇게 됩니다. 삼족을 멸하는 피바다 속에서도 이렇게 생명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실이 자연스럽 게 오버랩되더라구요. 박정희 씨도 어머니한테서 나왔겠지요. 그 어머니는 할머니의 자궁에서 또 할머니는 그 위의 자궁에서, 존엄하고 외경스러운 그 어둠 속에서, 어둠에 어둠이 거듭된 어둠 속에서 당신의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못지않게 이 8명 의 젊은 영혼들도 당신과 똑같은 그 어둠, 어둠, 어둠 그 무서운,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 질곡의 어둠 속에서부터 태어 났다, 당신 생명보다 못하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조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권력을 지향하고 관념을 좋아하는 그런 남자의 세계와 연약하지만 그 안에 생명을 운영하는 힘을 가진 여자의 세 계, 즉 국가운영과 생명을 운영하는 이 두 개는 서로 우열을 나눌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린 여자의 몸 안에서 조그마한 생명이 숨쉬는 우주, 그러나 결코 국가운영에 못지않게 위대한 그런 우주가 무대 위에 같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사육신들이 제일 첫째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의(義)와 좋은 가문의 대를 위해 머슴이 자기 자식을 죽이는 그 두 개를 마주 세우면 연극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쪽은 절개를 위해서 죽고 또 다른 한 쪽은 핏줄의 이어짐을 위해서 죽은 그 두 죽음이 무대 위에 모아지면 당시 박정희 시대도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은 자각이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1974년에 공연이 된 이〈태〉라는 작품 이후에 제가 세운 몇 가지 우리의 '볼거리 만들기'의 원칙에 대해 말씀드리 겠습니다. 우선, 시선처리가 제일 중요합니다. 서양의 연극은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 제4의 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4의 벽 은 사실 보이지 않는 벽이지요. 그 벽 뒤쪽에 관객이 있고 안쪽에는 무대가 있고 배우가 있는, 그래서 관객은 제4의 벽 구멍을 통해서 무대를 몰래 훔쳐본다, 엿본다는 개념으로서 서양 연극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대 위의 배우들의 시선은 마치 누가 보지 않는 것처럼 자기들끼리만 오고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선은 서양과는 다릅니다. 판소리나 상대놀이를 보면 전부 관객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가령 논두 렁에 부자(父子)가 앉았다고 쳐요. 아들이 종산(宗山)을 팔아서 사업을 하겠다, 이제 아버지는 그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터전인데 그 땅을 팔면 안된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 말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논두렁에 둘이 앉았습 니다. 아버지는 저쪽을 보면서 "그것을 꼭 팔아야 쓰겄냐?" 아들은 또 "그냥 흙덩어리인데 그거 가지고 뭐한데요?" 이쪽을 보며 말하지요. 둘이 마주 보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과년한 딸이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겠다면 우리 부모님들은 "니가 꼭 가야 쓰겄 냐?" 합니다. 그때 딸은 부모님의 시선을 외면한 채 방바닥 긁으면서 "보내주시오" 그러지요. 중요한 얘기를 할 때 우리는 시선 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다른 곳을 보거든요. 그런데 콩나물을 사오라고 그랬더니 잔뜩 센 콩나물을 사왔어요. "콩나물 하나 제대로 못 사면서 시집을 어디로 가 려고 해. 너를 어떻게 시집을 보내냐?" 이런 일상에서의 하찮은 대화는 마주 보고 합니다. 즉 우리 시선은 하찮은 대화는 마주 보고 하고, 아주 중요한 대화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한다는 겁니다. 이렇듯 서양의 볼거리와 우리의 시선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선을 서양처럼 서로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시선이 아니라 판소리나 산대가 놀아지듯이 관객과 마주 보게 함으로써, 관객과 부딪치면서 충돌하는 그런 연극이 우리 것 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판소리 한마당을 제대로 하려면 8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고수가 셋이나 바뀌어요. 그런데 소리하는 사람은 그냥 혼 자서 내지르거든요. 그랬을 때 관중들은 '그놈 생긴 건 별로인데 소리는 잘한다', '얼쑤 좋다' 등 참견을 하지요. 배우들이 쳐 다보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도 같이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시선을 객석으로 보내면 참견을 하게 하고 또 참견을 했기 때문에 약간의 책임을 저쪽에서도 지게 되지요. 이것이 우리 선조들의 볼거리를 만드는 방식이었고 지금 우리가 그 방식을 택해야 된다는 겁니다. 시선 다음은 무대의 높이에 관한 원칙입니다. 온돌에서 태어난 우리는 온돌문화 속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서양인 들이 말하는 중간높이가 상당히 거북합니다. 이 중간높이는 대체로 대사회적인 약속을 이행할 때 자기를 갖추는, 자기를 위장해 서 아름답게 보인다든지 혹은 점잖게 보인다든지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서양사람들한테 중간높이는 생활의 터전입니다만 우리는 궁둥이를 땅바닥에 대었을 때 또는 비스듬히 옆으로 좀 기울였을 때가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서양의 중간높이는 자기 를 여는 쪽이 아니고 자기를 닫는 쪽의 높이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맞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굿이라는 게 전혀 낯선, 한 번도 마주쳐 본 적이 없는 분들과 배우와의 부딪침이거든요. 그래서 막이 올라가고 한 5분 안에 벌써 저쪽에서는 이쪽을 파악해야 되고 이쪽 또한 자기를 저쪽에 열어주어야만 그 다음 이야기가 쉽게 이루어지는데, 서양의 중간높이, 닫은 상태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의 연극에서 말하는 중간높이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배우를 생각했습니다. 배우라는 것은 어차피 말을 가지고 관객들과 만납니다. 말 못지않게 중요한 시 선도 있습니다만 우선 내용을 서로 주고받는 말이 여러분들이 숨쉬는 그 리듬과 운율에 맞추어질 때 가장 편안하게 여러분의 숨 쉬기에 같이 얹혀집니다. 같이 얹힌다는 얘기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리말의 숨쉬기는 어떤 때 가장 편합니까? 어떻 게 할 때 객석에서 숨쉬는 그 쉼에 가장 편안하게 얹히게 됩니까? 판소리나 시조가 아직까지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은 그 자체의 숨쉬기가 고르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판소리나 시조는 3·4조나 4·4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령 '가시리 가시리꼬 바리고 가시리꼬' 이런 것들이 전부 3·4조입니다. 그리고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역시 마찬가지죠. 판소리에서 찾으면 박석고개. '박석고개 얼른 넘어 춘향이 집에 당도하니 후원에 서 비는 소리가 들리는데,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렇게 4·4조로 되어 있습니다. 3·4조나 4·4조의 운에 맞게 말을 던질 때 관 객은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등해의 연가〉의 첫구절이 이렇습니다. "행여나 울부짖은 들 뉘라 천상에서 나를 들으리." 그런데 이 말을〈사미인곡〉에서 보면 "연지볼 뉠위해 고히할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 니까 간단히〈등해의 연가〉의 첫구절 정도의 함축이 있는 그런 3·4조, 4·4조의 운을 띨 때 관객과 편안하게 숨을 쉬겠구나, 같이 동행하는 데 쉽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사는 되도록 3·4조나 4·4조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은 행동선입니다. 행동선은 천안문 사태 때의 고문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그 당시 고문을 할 때 제 일 지독한 고문은 옷을 전부 벗긴 채 매달아 물을 끼얹고 그냥 놔두는 겁니다. 그러면 모기가 달라붙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것이 어느 가혹한 처벌보다도 더 가혹하고 처참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동양적 행동선을 찾을 수 있는데, 즉 서양인이 합 리적으로 운영을 한다면 우리는 직관적으로 운영을 한다는 얘깁니다. 직접 때리지 않아도 저쪽에서 가장 가혹한 처형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하는 간접적인 행동선을 구사해야 되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육신들이 일단 참혹한 고문 끝에 죽는데, 그것을 직접 인두로 지진다든가 태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자 자신 이 그 고통을 받는 자신을 부수고 찢어발기는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우리 동양적인, 직관에 의한 행동선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이옷을 생각해 냈습니다. 종이옷이란 옛 병사들이 갑옷 안에 입었던 옷입니다. 닥종이로 된 옷인데 씨줄, 날줄이 없고 뭉개져 있기 때문에 화살이 통과하지 못합니다. 설사 화살이 갑옷을 뚫고 들어오더라도 종이옷이 마지막에 막아줬 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종이옷을 전부 사육신들에게 입히면, 그것도 풀을 먹여서 빳빳하게 입히면 이 사람들이 종이옷을 부여 잡으면서 쓰러지든가 몸부림을 칠 때 그 종이 우겨지는 소리가 마치 계란 껍질이 금이 가서 우그러들 듯이 자기 육신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은, 혹은 그 육신이 계란 껍질처럼 바스러지는 것 같은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접적인 태형 보다는 연기자 스스로 태형의 형태를 만드는 그런 간접 행동선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얘기해볼까요. 그림은 서양화하고 동양화를 여러분들이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서양화는 거의 여백이 없이 꽉 채워집니다. 그런데 동양화는 여백이 있지요. 그 여백은 관객들에게 채워달라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관객과 함께 굿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동양화 역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옛날에 괜찮게 차린 밥상을 생각해보면, 반찬이 스무 가지가 넘습니다. 그것은 다 드시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신의 컨디션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당신이 취할 것만 취하시오'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러니까 당 신이 먹을 것만 먹어라, 선택은 상대방이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다섯 가지 원칙을 가지고 볼거리를 만들면, 저희 감성과 정서, 서정 쪽으로 끌어갈 수 있는 작품, 우리의 볼 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얘기를 뒤집으면 관객과 함께 만들자는 겁니다. 이런 원칙으로 관객과 함께 작품을 만들 때 우리의 볼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두 가지라도 여러분들의 주머니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 면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