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운명에의 도전

우리 70대 세대(世代)는 참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서 풍상, 만상을 겪으면서 지내 온 세대입니다. 청소년 시기 일제 치하에서 핍박을 받고, 해방 후에는 나라가 분단되어 6·25의 참극을 겪었으며, 그 후에는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아직도 남북 분단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며 생을 마감해 가고 있는 세대입니다. 우리가 운명을 자주 이 야기하는데 그 운명이라는 것은 불가항력의 측면도 있겠지만 우리가 도전해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경험 에서 얻은 지식입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보험회사 사장을 오래 하신 김영동(金榮東)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1981년 신체 검사 결과 간암 초기라는 판정을 받고 부랴부랴 미국의 유명한 암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완치되었으나, 그 후에도 매년 한 번씩 미국의 암병원에 가서 담당의사의 진찰을 받고 즉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1983년 가을에도 미국에 가서 담당의사 를 만나 신체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다는 설명을 들었으나 세밀한 결과는 며칠 후 담당의사를 다시 만나 설명을 듣고 한국 으로 KAL기를 타고 돌아오기로 모든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 예약된 시간에 김 사장은 암병원에 갔으나 담당의 사는 없었습니다. 병원으로 출근하다가 급한 일이 생긴 그 의사는 황급히 다른 곳으로 가서 일을 보고 몇 시간 늦게 병원 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때문에 김 사장은 예약한 KAL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예약되었던 KAL기는 1983년 9월 2 일 밤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김영동 사장은 예약시간을 어기고 몇 시간 늦게 병원에 나타난 담당의사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6·25가 일어나기 약 3개월 전에 북한에서 약 500명의 무장 특수부대가 남한에 침투하여 나는 그 공비 토벌작전에 육군중위로서 참가했습니다. 그 당시는 공비 토벌작전이 개시되면 그 지방 청년단원들이 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동원된 청년단원 중에 강원도 홍천군 서석(瑞石)에 사는 코가 아주 큰 코주부씨라는 별명을 가진 청년이 있었습니다. 4월 초 어느 날, 그 청년은 박격 포탄을 어깨에 메고 바로 내 앞에서 흥정산(興亭山) 산줄기를 타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쌕" 하는 소리 와 함께 매가 내 철모를 스칠락말락 하면서 날아갔습니다. 동시에 꿩이 바로 눈앞에서 땅에 툭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꿩 의 목이 180도 휙 돌아가서 머리 앞면이 꿩 배쪽을 향하지 않고 등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매가 꿩을 낚아채면서 목을 비틀어 놓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 앞의 코주부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서 "어여! 어여!" 하면서 코피를 흘 리고 있었습니다. 매에 쫓기던 꿩이 코주부 청년의 코를 오른쪽에서 옆으로 들이받은 것입니다. 이때 꿩의 목은 비틀어지 면서 180도 돌아갔고 코주부 청년의 코는 터진 것입니다. 이렇게 코주부 청년이 코가 터져 피를 쏟게 되는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숙명적인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운명 앞에 우리 인간은 그저 무력(無力)할 뿐인 존재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1952년 초에 휴전회담 진행으로 인하여 피아간 전선이 고착되고 우리 군은 방어진지 앞에 지뢰를 매설했습니 다. 이때 지뢰밭을 산짐승들이 다니다가 지뢰를 터뜨리기 때문에 산짐승들 잡는 데 명중률이 높은 엽총이 한 정씩 일선 대대에 보급됐습니다. 어느 날 대대장인 나는 그 엽총을 들고 금성(金城) 남방 553고지 계곡으로 꿩을 잡으러 갔습니다. 계곡에서 솔밭으로 날아간 꿩들을 따라서 솔밭 밑 기슭에서 솔밭 속을 올려다보니 꿩들은 재빠르게 모두 엽총 사거리(射距離) 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나는 혹시나 하고 엎드려서 위를 올려다보니 불과 20미터 거리에 약간의 풀 포기와 소나 무 가지가 있는 곳에 꿩 한 마리가 안전하지 못하게 어설프게 숨어 있었습니다. "꽝" 하는 엽총 총성과 함께 꿩은 돌덩어 리가 굴러 내려오듯 굴러오더니 내 코앞에 있는 어린 소나무 밑에 걸려서 멈추었습니다. 엎드려 있는 내 눈과의 거리는 불과 약 30센티미터, 꿩의 눈망울은 말똥말똥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꿩의 몸은 움직이질 못했고 그저 숨가쁘게 할딱할 딱할 뿐이었습니다. 꿩의 심장과 허파는 아직도 멀쩡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를 바로 보는 그 깨끗하고 산뜻한 맑은 꿩 의 눈망울이 나에게 '너무 하셨습니다. 어찌 우리 둘의 만남은 이렇게도 악연(惡緣)입니까?' 하고 심적 원감(心的怨感) 을 보내오는 것 같았습니다. 꿩은 좀 있다가 고개를 뚝 떨어뜨리며 사르르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죽은 꿩에게 말하였습니다. "꿩아, 나는 후회한다. 그러나 잘못은 너에게 크게 있다. 총을 든 나와 만 나는 운명의 순간에 네가 빠른 속도로 솔밭 사이를 달아났다면, 소나무들이 가려서 내가 어떻게 너를 쏠 수 있었겠니. 네가 너의 운명에 지혜롭고 과감한 도전을 하지 않은 것이 너의 운명을 이 꼴로 만들었구나." 이렇게 나도 후회할 점이 없지는 않으나 꿩 자신이 전적으로 잘못한 결과였다고 결론을 짓고, 나는 사냥을 중단했습니다. 1997년 2월 19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중국의 등소평(鄧小平)은 키는 작으나 용감하고 머리가 명석하 며 거짓을 모르고 인내력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등소평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그의 사위인 장굉(張宏) 과학 원장관을 북경에서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1954년과 1955년 사이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고강(高崗), 요 수석(饒漱石) 등이 독립왕국 수립의 음모를 꾸미자 이를 사전에 적발한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었으며, 곧 모택 동 주석에게 중국공산당 강령에서 모택동 사상(毛澤東思想)이라는 단어를 삭제해 버려야 한다고 대담하게 건의했습니다. 때마침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을 때, 모택동은 속으로는 언짢았으나 정당하고 시대에 맞는 등소평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렇게 했습니다. 무소불위(無所不爲)의 절대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모택동에게 그렇 게 대담한 건의를 한 등소평은 그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년 후, 모택동의 지령을 받는 중국 홍위병의 이른바 문화혁명 때 등소평은 중공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납니다. 등소평과 함께 체포되어 실각하는 유소기(劉少奇)는 얼굴이 창백해져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면 서 자아비판을 했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등소평은 당당하게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자아비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끝끝내 버티면서 지방으로 유배되어 작은 철물공장 직공으로 몰락했으나 묵묵히 인내심을 가지고 직공 일을 열심히 하면 서 기회가 도래하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73년 중공의 만년수상(萬年首相) 주은래(周恩來)가 불러서 등소평은 부수상(副首相)에 임명되었으나, 1976 년에 주은래가 죽자 등소평은 부수상 자리에서 또 쫓겨납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모택동도 사망하고 다시 등소평은 부수 상에 복직합니다. 1978년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등소평은 인민의 원성을 사고 있는 모택동의 처 강청(江靑)과 그 밑의 4인방을 몰아내고 자기의 체제를 구축해서 중공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를 잘 잡는 고양 이가 좋은 고양이다. 인민들이 배불리 먹고 잘 입고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지 공연히 무슨 사상이니 하면 서 떠들어 봤자 그 허구 이론 속에서 쌀이 나오느냐?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여야 한 다"고 하며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내세워 실리를 추구케 하면서 모택동이 만들어 놓은 비능률적인 인민공사( 人民公社)를 해체하여 중국의 보릿고개를 해결하고 폐쇄적인 중공을 개방으로 이끌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해 놓았습니다. 등소평의 생전의 좌우명(座右銘)은 '기불가실 시부재래'(機不可失時不再來)였습니다. '기불가실'이란 누구 에게나 좋은 기회가 여러 번 찾아오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며, '시부재래'란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계절은 해마다 다시 돌아오지만 때(時)는 강물과 같이 흘러가며 같은 때(예를 들어 1997년 4월 17일 오후 2시 35분 27초)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니 삶의 순간 순간을 운명에 도전하면서 값지게 이용하 라는 것입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훌륭한 도(道)를 닦은 천하제일의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라는 검객(劍客)이 있었는데, 그의 정신적 스승은 세속을 달관(達觀)한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천지(天地)의 시원(始源)은 오직 지금이라는 때[時]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과거(過去)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지금이란 과거가 미래로 가고 있는 점(点)이며, 사람은 그 점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없는 것으로 잘라 버리 면 지금이 남을 뿐입니다. 영원히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운명에 값지게 도전하는 삶을 살아 나가야 한다고 고 승(高僧)은 설파(說破)하였습니다. 이것을 어기면 훗날 불에 타는 듯한 업보를 받게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칠십 평생에 겪은 경험담을 몇 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서 고생을 많이 하며 성장했습니다. 해방 후 나는 북한에서 인민학교 선생을 했습니다. 1947년에는 황해도 금천군에 있는 금천 인민학교에서 5학년을 담임하고, 중학교 2년을 수료한 사람들을 3개월 동안 단기교육시켜 이 과정을 수료하면 인민 학교 준교사로 임명하는 금천군 교원양성소 1기생 20여명의 담임도 겸직했으며, 교원양성소 1기생들의 수학(數學)선생도 맡아서 1인 3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나의 꿈은 월급을 저축해서 그 돈으로 평양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금액이 되면 평양의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1947년 6월 중순 상부로부터 지령이 내려왔는데, 그 내용은 "김구(金九)는 중국에 있을 때 장개석 정부에게 우리나라 광산권을 팔아먹고 이승만(李承晩)은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정부에게 우리나라 철도권을 팔아먹어 호의호식하면 서 잘 지냈다. 또 알고 보니 그 놈들은 일본놈들의 앞잡이였고, 그래서 이놈들을 타도해야 한다. 이것을 교사들은 담임 학생들에게 교실에서 교육시켜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상부의 지령에 거역하다가는 체포되어 처형됩니다. 빈농 출신이건 노동자이건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가혹하게 처형됩니다. 인민들은 절대적 권력을 쥔 독재자 앞에 그저 무력(無力)할 뿐입니다. 나는 인민학교 5학년 아동들에게 상부의 지령문 그대로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교원양성소 학생 20여 명에게도 똑같은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다 자란 교원양성소 학생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했으니 낯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불현듯 "여러분! 그러나 김구, 이승만이 과거에 독립운동을 열렬히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고 사족 (蛇足)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1947년 6월 29일 오전에 나는 체포되어 인민재판의 일종인 민족반역자·반동분 자 비판회에 회부됩니다. 직업동맹원, 노동당원, 민청맹원, 부녀동맹원들이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두 명의 검사가 입회하 고 나는 피고석에 앉았습니다. 비판회장은 금천 인민학교 교실이었으며, 교실 양쪽 출입문에는 소총으로 무장한 보안대원 이 보초를 서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이라서 운동장에서 노는 아동들이 좀 있을 뿐 교실은 모두 비어 있었습 니다. 노동당원이면서 금천인민학교 교사인 최상권(崔相權)이라는 자가 나의 범죄사실을 침소봉대하여 장황하게 나열하며 고발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모두들 "의장 동무!" 하며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 일어서서 나를 김구, 이승만의 지령하에 침투한 악질 민족반역자, 반동분자, 테러분자로 몰아세우며 무자비한 처단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눈에 핏발을 세 우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으려는, 제세구민의 의학공부를 하려는 젊은이를 수용하지 못 하고 타도해 버리는 북조선 사회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기구한 절망적 운명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 같지 않은 말들을 귓등으로 흘려보내 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 기구한 운명에 대해 결사적 도전을 하자! 38선 이남으로 탈출하자.' 비록 3 8선을 향하여 몇 발자국 뛰다가 보안대원 총탄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치기로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오후 5시 경 때마침 금천에 출장 나온 황해도 민청위원장이 비판회장에 나타났습니다. 일제시대에 사상범으로 풍상을 겪은 그는 나 를 노려본 후 입을 열었습니다. "동무들, 우리 혁명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위험한 반혁명분자는 프롤레타리아의 좋은 성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혁명을 반대하는 악질 분자들입니다 . 그러므로 저런 악질 반동분자는 무자비하게 타도해 버려야 합니다." 도민청위원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동무들, 저 자의 눈을 보십시오. 저 자는 지금 38선 이남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소. 여기 검사 2명과 보안대원 2명이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민청맹원 중에서 5명을 더 지명하여 감시를 엄중히 해야 합니다." 나는 가슴이 섬뜩하며, 속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비판회장을 떠나 갔습니다. 어둠과 함께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끌던 비판회가 끝난 밤 9시 30분 경 나의 신병은 검찰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모두들 웅성거리며 귀가 준비를 할 때 수갑을 내 손목에 채우기 직전 나는 김 검사의 오른팔을 두 손으로 붙잡고 머리 숙여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다가 번개 같이 뛰어서 한눈 팔고 있는 보 안대원을 밀치고 문을 나와 비 내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전속력으로 8백 미터쯤 달아나다가 발이 휘 청하고 앞으로 넘어졌으며 둥근 것이 두 팔에 안겨졌습니다. 공동묘지의 무덤이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금천(金川) 내 무서의 비상소집 사이렌이 열 번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급한 김에 여우가 파헤쳐 놓은 무덤 굴이 있으면 그 속에 들어 가 숨어 보려고 이리저리 뛰면서 더듬더듬 이 무덤 저 무덤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런 굴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설 사 여우가 파 놓은 굴이 있더라도 그 좁은 굴에 덩치가 큰 인간이 어떻게 들어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나는 무덤을 버리 고 산 위로 도망쳐 올라갔습니다. 그 산을 넘고 큰 내를 건너 새벽녘에는 경기도와 황해도와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750 미터의 제석산(帝　山)줄기에 들어갔습니다. 산은 아주 높지 않았지만 산줄기가 많고 크며 수풀은 일반적으로 무성했습 니다. 나는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만 행동하면서 금천 38선간 70리 길을 무려 3일간이나 걸려서 1947년 7월 2일에야 38 선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제석산과 38선에서의 숨막히는 쫓고 쫓기는 드라마틱한 위기탈출 이야기는 여기서에서는 시간 관계상 하지 않겠습니다. 자유세계인 38선 이남 땅을 밟음으로써 나의 당시 운명에의 큰 도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나는 육군사관학교를 제7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6·25 때는 소총 중대장으로서 전투하다가 1950년 7월 5 일 적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습니다. 육군병원을 퇴원한 나는 다시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북진, 1950년 10월 26일에는 평안북도 초산군 신도장(新島場) 마을에 진격하여 압록강 강변에서 국경 경비를 53시간 하는 행운 을 얻었습니다. 그 후 중공군 6개 사단의 중포위(重包圍) 속에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이 포위망을 뚫고 대동강 상류를 건너 맹산(孟山)에서 적포위망을 최후로 뚫고 아군을 만났을 때는 우리 제1중대 장병은 겨우 21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에도 나는 일선에서 1952년 7월까지 계속 전투했으나 적탄은 모두 나를 피해 지나갔습니다. 하늘에서 타고난 나의 숙명적인 수명(壽命)인 명운(命運)만은 질기고 좀 긴 것 같습니다. 1962년에 나는 전방 보병 연대장 근무를 끝내고 서울로 전속되어 왔는데 그때만 해도 공무원 월급이 쥐꼬리 만해서 처자들을 데리고 사글세방을 얻을 돈이 모자라서 빚을 내어 3평짜리 사글세방에 겨우 들어갔습니다. 청백리들은 빈곤에 시달리다가 월급을 충분히 받는 외교관 시험을 쳐서 이에 합격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1963년에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武官)으로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공 화국 수도 사이공이 북월공산군에 함락될 때 나는 한국대사관 공사(公使)였으며, 재월한국인 철수본부장이었습니다. 1, 134명의 한국인들을 거의 다 철수시키고 마지막으로 175명의 한국인이 남아 있을 때 이를 미군 헬리콥터로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주월 미대사관측이 상황이 급하니 나만 미군 헬리콥터에 타고 떠나라고 해서 나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나 만 도망치면 몇 시간 후에 사이공으로 쳐들어오는 북월공산군 5만 명의 공격 앞에 우리 한국인들은 길가에서 우왕좌왕하 다가 모두 희생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북월 하노이에도 자기 나라 대사관을 설치하고 남-북월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과 영국 대사관은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으로 인정되어 북월공산군은 사이공에 쳐 들어오더라도 이들 대사관 지역에는 침범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일본도 북월과 외교관계 수립을 교섭중이라서 어느 정 도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나는 주월 마틴 미대사가 잘못 판단하여 철수작전을 조기 중단하자 황급히 일본대사관에 달려 가서 사정하여 우리 한국 김동조 외무장관에게 내 이름으로 긴급구출 요청 전문을 보냈고, 프랑스 대사관과 손에 땀을 쥐는 어려운 교섭을 성공시켜 한국인 모두를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이끌고 들어가 치외법권 지역에 머물면서 북월공산군 몇만 명이 탱크, 야포, 기관총, 소총 등을 가지고 사이공 시내에 쳐들어와서 24시간 동안 콩 볶듯이 총소리를 울려대며 천지를 진동하는 소탕전을 전개하는 지극히 위험한 시기에 한국인 전원은 안전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UN에서는 "사이공 점령 후 캄보디아에서와 같이 학살이 일어나지 않기를 요망한다. 베트남에서 UN 헌장을 준수할 때만 베트남 정부의 UN 가입은 승인될 것이다" 라는 경고 메시지를 북월정부에 보내고, 북월공산정부는 이를 수 락하고 1975년 5월 2일 영(零)시를 기해 "이제부터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인민 학살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 다. 이때부터 반공인사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형무소에 잡아넣었습니다. 베트남 공산정부의 요청에 의해 프랑스 대사관 측은 우리 한국인들을 치외법권 지역에서 나가게 하여 한국인은 그곳을 나가서 연금 상태에 들어갔으며, 한국 외교관 10명, 한국 민간인 165명 중에서 외교관 3명, 민간인 11명이 베트남 안닝노이찡(내무성)에 의해 체포되어 사이공 교외 에 있는 치화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국제법에 의하면 어떤 경우라도 외교관은 면책특권이 있으며 체포할 수가 없고 추방만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형무소에 투옥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정부는 그짓을 했습니다. 나는 체포되어 사형수나 중형수(重刑囚)가 수감되는 격리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297 일이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지내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옆 감방의 수감자가 이 가혹한 고통을 참을 길이 없어 자살을 결행하자 형무소 당국은 나에게 비로소 일광욕을 10분간 시켜 주었습니다. 밥은 하루에 한 끼는 굶기고 두 끼만 주었습 니다. 한 끼의 식사량은 한 컵 정도의 밥과 한 컵 정도의 싱거운 배추소금국 또는 싱거운 늙은 호박소금국이었습니다. 그 국은 아주 멀겋고 건더기는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고 보니 나의 평소의 체중 약 80킬로그램은 46∼48킬로그 램으로 격감했습니다. 베트남 공산정부의 안닝노이찡 정보수사 경찰관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로 전향시켜 이용하려고 공 갈, 협박, 회유를 다했으나 나는 죽을 결심을 하고 완강히 저항을 하며 끝까지 버텼습니다. 남월이 패망할 때 권총자결을 하여 자유 조국과 함께 순국한 장성(將星)이 4명이고, 외무장관은 민간정치 인인데도 그는 권총자결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편단심 나라 위해 순국 자결하는 공무원은 공무원 인구 5만 명에 한 명꼴로 있었다고 합니다. 형무소의 하루는 바깥 세상의 열흘과 같이 지루하기도 하고, 또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 다고 느낄 때는 초긴장 속에서 시간이 빨리 가기도 했습니다. 나는 때로는 지루함을 달래고 또 어떤 때는 잠 못 이루 는 초긴장을 풀기 위하여 모기, 쥐, 개미들과 장난을 했습니다. 모기와 노는 경험담을 하나 얘기할까요? 모기는 날아와서 수감자들 몸의 그늘진 곳을 골라서 앉습니다. 주로 발 복사뼈 뒷부분이나 팔꿈치 뒷부분에 흔히 앉습니다. 최초 앉을 때는 모기가 'ㄱ'자 모양으로 꼬부리고 앉아 요. 그리고 주위를 살펴봅니다. 이때 내가 다리나 몸을 흔들면 모기는 재빨리 날아갑니다. 또 이때 몸을 움직이지 않 고 앉아 있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리면 잽싸게 모기는 날아가 버려 영락없이 모기를 놓쳐 버립니다. 그래서 모기가 꼬부리고 앉아 있을 때는 모기를 때려잡을 수가 없습니다. 모기가 꼬부리고 앉아 있을 때 내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모르는 체 15초 내지 20초쯤 있으면 모기는 그때서야 안심하고 입 끝의 독침(毒針)을 내 피부에다 꽂습니다. 그리고 모기의 자세는 'ㄱ'자에서 사선을 그으며 '一'자로 펴집니다. 이때 모기의 마취액이 나오는 듯 나의 말초신경은 마비 된 상태에서 모기가 피를 빠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모기가 피를 배불리 빨아먹고 독침을 내 살 속에서 빼 가 지고 날아가 버린 후, 약 3∼4분 있다가 비로소 모기가 피를 빤 내 몸 그곳이 가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모기가 내 피를 빨고 있는 동안 내 손바닥으로 모기를 내려치면 백발백중 모기는 몸이 터져 죽습니다. 독침을 내 몸으로부터 빼는 데는 최소한 2∼3초의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이 외에도 모기, 쥐, 빈대, 개미에 대한 재미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시간관계상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1978년 9월 15일 북한 평양 제3호 청사(CIA에 해당)에서 국장급 간부들이 호치민시(사이공시)에 와 7일 간에 걸쳐서 나를 공갈, 협박, 회유하면서 강제로 전향시켜 평양으로 납치하든지 아니면 공산측의 극비 고급간첩으로 만들어 서울로 보내려는 공작을 집요하게 했으나, 나는 100퍼센트 죽음을 결심하고 완강히 저항했고, 결국은 그들은 빈손으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직후에 동남아의 전운(戰雲)은 급속히 짙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통일된 베트 남은 캄보디아 침공(侵攻)을 결정했으며, 중공(中共)은 8천 명의 군사고문단원을 캄보디아에 보내 베트남군의 침공에 대비했으며, 많은 무기와 실탄도 캄보디아에 보냈습니다. 이때 북한의 김일성은 중공편을 들어 많은 무기와 실탄을 역시 캄보디아에 보냈습니다. 1978년 11월에 하노이에 있던 북한대사 김상준은 북한대사관 직원 대부분을 이끌고 평 양으로 철수했습니다. 곧이어 베트남 공산군은 캄보디아를 쳐들어가서 프놈펜을 점령하고 캄보디아에 허수아비 정권 을 수립했습니다. 그 후 1979년 2월 17일 중공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대한 보복으로 중공-베트남 전쟁을 일으 켰습니다. 이때도 북한 김일성이 중공편을 든 것은 물론입니다. 베트남은 이때부터 남한과 북한을 동등하게 취급하며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대외정책을 수정했습니다. 한편 남한에서는 이 무렵 유태계 미국인 아이젠버그가 한국 정부의 미움을 받아 한국내에서 사업을 못하 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이젠버그는 거의 빈손으로 한국에 와서 권력있는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 고위직 공무 원들과 손을 잡고 브로커 노릇을 하여 억만장자가 된 사람인데 이때쯤은 이후락 비서실장이나 박종규 경호실장 등이 모두 권력의 핵심에서 사라지고 박정희 대통령은 아이젠버그 회장을 한국에서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젠 버그 회장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찾아와서 자기가 베트남 공산 고위층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서 이들과 교섭 하여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대용 공사를 한국으로 데리고 올 터이니 그 대가(代價)로 한국 정부는 자기에게 최고 훈장을 수여하고 한국내에서 자기가 계속 브로커 사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비밀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아이젠버그 회장의 제안을 수락하고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부장 이외에 중앙정보부 김갑수(金甲洙) 비서실장, 그리고 현재 국민회의 부회장이며 그때는 중앙정보 부 과장이었던 이종찬(李鍾贊) 과장을 이 비밀교섭을 담당하는 실무자로 지명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박동진 외무장 관을 책임자로 하는 정상적인 외교 계통을 통한 교섭도 꾸준히 병행시켜 드디어 나는 1980년 4월 12일, 다른 외교관 2 명과 함께 석방되어 스웨덴 리프랜드 외무차관, 스웨덴 닐슨 외무부 비서실장, 아이젠버그 그룹의 동경지사장 겸 하노 이지사장인 드워크 지사장의 호위를 받으며 아이젠버그 회장의 전용기인 제트 여객기를 타고 호치민시의 탄산눌국제공 항을 떠나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리하여 약 5년간 치화형무소에서 밖에 있는 교민들과도 면회 한 번 할 수 없는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손톱이 여러 개 썩어 버리고, 이 여러 개가 흔들거리며 못 쓰게 되고, 심한 피부병에 시달리고, 살이 빠져 피부가 시 들게 되어 버린 몸을 가지고 자유 조국의 은혜를 입어 그나마 살아서 조국 땅을 밟아 고된 옥고 수난에 종지부를 찍었 습니다. 나는 공항에서 정부 고위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곧 바로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져 12층 귀빈 입원실에 입원하 였습니다. 병실에서 의사 및 안내원들과 대화를 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자 우리 가족이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만 5년 만의 만남이며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자랐습니다. 특히 모습이 많이 변한 셋째 아들보고는 "네가 석(碩)이냐 ?" 하고 물어봤습니다. 나의 경험담 일부를 여기서 끝내고 오늘 이야기한 것의 결론을 말하겠습니다. 운명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있고, 이와는 반대로 사람의 힘으로서 방향전환을 시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경험에서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운명은 도전으로 방향전환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등소평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기불가실 시부재래'(機不可失時不再來)는 여러 젊은이들이 참고할 만한 좋은 좌우명이 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여러 젊은이들은 좋은 책도 많이 읽고, 좋은 강의도 많이 들어 나름대로의 귀중한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가치관(價値觀)을 정립하고, 인생관, 사생관을 확립하여 인내와 용기와 깊이 있는 지혜를 동원하여 운명에 대해 힘차게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젊음은 즉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인생길을 매진하기 바랍니다. 자기 마음을 항상 밭 갈듯이 갈아 가며, 앞으로 나아가 지금이라는 때[時]의 중요성을 잊지 말고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지금에 매달리며 도 전 또 도전 다시 도전한다면 여러분의 젊음은 가치 있게 빛나며 후회 없는 생애가 이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변변 치 못한 강연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