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되는 길'에 관한 강연을 하겠다고 얘기했는데, 너무 어려운 얘기를 피해서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쓰느냐, 또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쓸 재능과 소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 나이 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고, 대학 졸업 이전에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그 후로 삼십 년 동안 소설을 써 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서 배우긴 많이 배웠습니다만, 소설 수업을 하는 데는 크게 소용에 닿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결국 작가가 되는 길에는 '학력이 별로 필요가 없다' 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작가들의 이력을 훑어보면 의외로 대학 석·박사는 고사하고 대학을 안 다닌 분들이 많습니다.
미국의 케네디가 늘 머리맡에 놓고 읽었다는 시인 프로스트는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제가 여러분 나이 때 제일 존경한 미국의 윌리엄 포크너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의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틈틈이 청강을 한 정도입니다. 괴테 이후의 독일 최대 산문작가라고 일컬어지는 토마스 만의 경우도 대학을 청강생으로 다녔지 정식으로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학력이라든지 학문적인 지식이 작가가 되거나 더 폭넓게 얘기하자면 예술가가 되는 길과 별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희곡, 소설, 시나리오, 예술 전반에 걸쳐서 큰 빛을 발하고 재작년에 별세한 '장 쥬네'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 분은 창녀의 사생아로 어릴 적부터 고아원에서 자랐고, 전혀 교육을 받아본 적 없이 소년원, 거지, 남창, 도둑질 등 갖가지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고 다니다가 이십대 중반에《도둑 일기》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사람이 혜성같이 프랑스 문단에 나타나 나중에는 누벨바그 신영화운동으로 세계적 작가가 되었습니다. 장 쥬네의《도둑 일기》는 제가 여러분 나이 때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난해한 소설입니다. 자기 자신이 소년 시절 부랑아로 떠돌아다닌 이야기, 도둑질을 한 이야기, 형무소에 갔던 이야기를 심리적으로 쓴 소설입니다. '죄수복은 꽃과 같다' 라는 문장으로 그 첫문장이 시작되는데, 죄수복을 꽃에 비유했듯이 상징성이 매우 풍부한 소설입니다. 밑바닥 인생을 떠돌아다니며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 장 쥬네는 "나는 소년원 감옥소에 있을 때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다" 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학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독서 행위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 작가가 되는 뿌리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문학가가 되는 길은 삼다(三多)라고 해서 많이 쓰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역시 그 세 가지가 결국 작가가 되는 길의 기본인 것 같습니다.
문학 하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실제 살아 나가는 데는 서툴고 내성적인데, 이런 것이 문학하는 사람의 성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도 내성적인 사람들이 직접 사람을 만나고 사귀기보다는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주인공을 통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는 욕구에 의해 그 동기가 발생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너무 스케줄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식으로 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훨씬 작가가 될 소양이 많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만도 제가 얘기한 것처럼 대학에서 공부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명상과 독서를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찾아내어 30대 중반에 이미 독일 문단의 대가가 되었고, 50대 중반에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독서를 많이 한다고 해서 작가가 되지는 않지요. 한 달에 적어도 서너 권 이상씩 책을 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작가가 되느냐? 독서 행위를 통해서 지적인 혹은 정서적인 도움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과, 내가 만약 작가가 된다면 이런 이야기를 나도 한 번 써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생겨야 작가로의 출발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도 틈만 나면 독서를 합니다. 제 취향에 맞는 책을 읽고 요즘 젊은 작가들의 책도 찾아 읽지요. 읽으면서 반쯤은 그 책에 말려들어 가지만 반쯤은 늘 내가 쓸 소설을 생각합니다. 작가들이 외국 작가들 작품을 많이 읽는데, 외국 이야기지만 이런 얘기를 한국적인 현실로 옮겨 내가 생각하는 내용과 결부시키면 어떨까?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은 주제, 문장, 구성이 있고,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가야 된다는 이론서만 해도 여러 종류의 책이 있지만 이 모든 걸 숙지한다고 해서 소설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소설을 써서《신춘문예》에 응모했더니 이 소설은 복선(伏線) 처리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복선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어요. 그러니까 소설은 이론을 먼저 알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터득하게 돼요.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해서 아이를 기르느냐? 이론서 읽는다고 육아법을 모두 압니까? 마찬가지로 소설도 충동적으로 창작욕구가 일어날 때 구성, 문장, 앞뒤 따질 것 없이 그냥 써 보는 거예요.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읽어보는 겁니다. 쓸 때는 자기도취로 썼는데, 문장도 흡족하지 않고 내용도 별 실감이 안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중에, '나도 이런 것을 써 보고 싶다'고 느끼는 경우를 좀더 심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반드시 그 속에 자기의 비슷한 경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설은 픽션이라고 해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거짓말로 만들어 내지만 좋은 작품은 실제로 그 사람의 삶과 많은 부분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생애의 한 부분이 그 소설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 상당히 인기 있고 문제성이 있는 주제라고 해서 무작정 좇아 쓴 글은 성공하기 힘듭니다. 무슨 글이든 남한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읽는 사람을 감동시켜야 되는데, 내 자신이 감동되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낸 얘기를 가지고 남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참 힘듭니다. 내 경험과 내 삶과 아무런 관계없이 머리 속에 떠도는 이야기를 써 가지고 상대방을 감동시킨다면, 그야말로 천재지요. 그러니까 반드시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자기에게 절실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자신의 기억력의 처음을 따라가 보면 한 살 때를 기억하는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래도 네 살 정도 되어야 기억하지 않겠어요? 그 다음에 초등학교 전후를 많이 기억하지요? 내가 어디에 살았으며, 그 당시 우리 집이 어땠으며, 아버지가 나한테 무엇을 사다 주었는지, 이런 많은 부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열 살 전후, 사물에 대해 판별력은 안 생기지만 사물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는 이때가 참 중요합니다. 제가 보건대 열 살부터 스무 살 전까지 그 사람의 인생은 그 속에 다 있습니다. 전 아직 그렇게 늙은 나이는 아닙니다만,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늙어서 추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열 살에서 스무 살까지 그 속에 다 있는 겁니다. 모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 나이 때 자기 삶과 인생에 대해 생각했던 모든 사유가 그 후로 글 속에 다 나온다는 얘기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예를 들어봅시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중심은《죄와 벌》,《악령》,《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이 범죄 심리, 이상 심리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시골을 돌아다니며 무료로 진료해 주는 공의(公醫)여서 그는 허름한 시골 관사를 떠돌며 소년 시절을 암울하게 보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아버지는 퇴직 후 지주가 되었는데, 소작인들에게 착취를 많이 했지요. 어린 도스토예프스키가 보는 앞에서 농노들이 자기 아버지를 타살했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속에는 범죄에 대한, 살인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소년 시절에 자기 가정에서 목격하고 체험했던 비극이 평생 그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던 거지요. 그리고 그 후로 그는 반체제 서클에 가담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직전에 풀려나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몇 년 살다 돌아왔습니다. 결국 어린 시절의 경험과 자기의 유형생활 과정, 그 두 가지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줄기를 이룬다는 얘기예요.
제가 알기로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30세 전후에 대표작을 씁니다. 스무 살 전후는 감수성이 중요해서 그때는 평범한 것, 남이 썼던 내용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강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쓰는 작품은 편안하고 원만하지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사회적 신분도 올라가고 생활도 여유가 있고 그 동안 많은 경험도 쌓고 책도 많이 읽었으리라 여겨지므로 그때 대작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이 들면 이미 그전에 썼던 글을 정리하거나 해체해서 더 여러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평범한 쪽으로 흘러가지 더 새롭고 좋은 글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체험과 창작의 절정을 이루는 청년기는 문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간입니다.
저 자신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는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말하면 인민군 치하에서 석 달을 대한극장 근처에서 살았고, 시월 하순에 석탄을 싣고 다니는 지붕 없는 차를 타고 고향까지 내려갔습니다. 우리 식구가 고향에서 도저히 살 길이 없어 대구로 다시 이사를 와서 중학교 때부터 대구에서 성장했는데,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보았던 인공치하 서울 석 달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불의 제전〉이라는 소설을 작년에《문학과 사회》라는 계간지에 연재할 때, 원고지 천오백 장 분량으로 인공 치하 석 달의 생활을 그렸습니다. 물론 그 당시 내가 본 시점이 아니고 여러 시점을 동원해서 그때 서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남았느냐? 또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고 난 후에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서울 시민을 과연 어떻게 훈련시키고 동원시켰는가를 제가 어릴 때 목격한 것과 더불어, 그 후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다시 종합해 일종의 추체험 형식으로 썼습니다.
독서 행위도 사실상 추체험입니다. 내가 어떤 내용을 읽었을 때 그것이 처음에는 체험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내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때 그 주인공이 이런 시련을 당했을 때 이런 식으로 헤쳐 나가더라는 내용은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시련을 당할 때나, 이런 식으로 방향을 바꾸어 어떻게 해보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그 심리를 분석해 들어가면 어느 시절 절실하게 읽은 독서 체험이 영향을 주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체험론으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은 청소년기 이전까지 자신이 보아왔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보석을 찾아내듯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속에 소설적 자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에 비해 요즈음의 작품들은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습니다. 비문학적인 상식이 매우 요구됩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 꼭 국문과를 안 나와도 상관없어요. 물론 국문과를 다니면 모국어의 표현 능력은 아무래도 세련되겠지요.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가 지금 어떠한 변혁과 진보과정을 거쳐왔으며, 1970·80년대 민중 논리가, 변혁 논리가 무엇이며, 그 당시 통일 논리가 어떤 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 외에 사회과학도 마찬가지고, 역사학, 정치학 여러 방면의 지식이 있어야 자기가 쓰는 글에 균형감각을 이루겠지요. 나는 작가에게는 세상과 인간을 보는 균형감각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먼저 상식인이 되어야 하고, 판별력과 객관성이 있어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에 보태어 나만이 쓸 수 있는 내용, 그 표현에서의 개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나이의 시간은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떻게 살고 싶다고 현재 결심하는 동기가 내 삶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양한 독서와 체험을 축적하여 쓰고 싶은 욕구를 끌어내는 결정적 계기는 지금 때를 놓치면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황금기인 지금 시간의 적절한 사용과 진지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분발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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