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얘기에 제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기에 얼결에 '조광조의 후예가 현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조광조 그 양반이 제 선조 되시는데, 저희 조씨 피에 개혁의 성향이 있다는 확증을 얻게 해준 최근의〈조광조〉드라마가 저를 기분좋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끊임없이 개혁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3∼4일 전에 경북 영양에 갔었는데, 길에 벚꽃이 피었더군요. 같이 간 친구들에게 "찬란하게 핀 저 꽃이 떨어질 때는 한순간에 확 떨어지지 않냐?" 고 문득 질문을 했지요. "그러면 벚꽃이 지고 나면 저 벚나무는 앙상한 나뭇가지로 계속 사는 거냐?" 했더니 모두 대답을 못해요. 그래서 "상식적으로 볼 때 꽃잎이 떨어지면 잎이 피든지 다른 후속 조치가 있을 것이다" 라고 제 의견을 얘기했죠. 그런데 어제 전주에 갔다가 알았어요. 벚꽃이 지고 나면 파랗던데요. 자세히 관찰해 보니까 벚꽃 뒤쪽으로 동시에 잎이 나오고 있는데 벚꽃이 크게 펴서 그 잎이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거예요.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은 저를 텔레비전에서 벚꽃 자체로 보셨다면 오늘은 여러분들께 숨겨진 파란 이파리 같은 모습을 보여드릴 요량이니 궁금한 것을 질문해 주시면 답변하는 형식으로 강연을 진행했으면 해서입니다.

질문 1 :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밥을 굶었는데, 우리는 이처럼 육신적으로 굶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많이 굶지 않습니까? 문화에도 많이 굶주려 왔고 또 음악에도 굉장히 굶주려 왔습 니다. 그런 굶주림에 대한 해결책 아니면 경험담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헝그리 영혼(hungry spirit)에 대한 충족방법을 질문하신 것 같은데, 정신이나 문화적인 면에서 배고픔을 느낀다니 일단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생리적인, 본체적인 굶주림이 해결이 안된 상태에서는 나머지 다른 방향의 굶주림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리고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뱃속을 못 채워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가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제 베트남 출신 감독인 트란 안 홍의〈씨클로〉라는 영화를 봤는데, 자전거 한 대를 살 수가 없어서 평생 운영기금을 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얘기를 그렸습니다. 우리는 저렇게까지는 살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할 만큼 베트남, 캄보디아는 처참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금상을 차지했습니다. 배고픈 나라에서 태어난 감독이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앞의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반성을 했습니다. 왜 우리가 요렇게밖에 못사는가? 왜 영화를 요렇게밖에 못 만드는가? 왜 나는〈열린음악회〉에 나가서 요렇게밖에 노래를 못하는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도 배고픔 이외의 굶주림을 느꼈기 때문에〈딜라일라〉라는 노래를 대학교 3학년 때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상당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군대 3년 복무하고 제대한 1974년에 빌리 그레엄이라는 세계적인 전도사가 절더러 노래 잘한다고 미국으로 와 볼 의향이 없냐고 해서 전 과감하게 영어로 대답했지요. "Yes." 그래서 5년 동안 플로리다에 있는 조그만 침례교회 신학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었습니다. 굶주림에 대한 해결방법을 저는 나름대로 찾아나섰다고 생각이 되어서 하는 얘기입니다.

종교에 대한 굶주림으로 그때 신학대학교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허기를 채웠고, 음악은 생업으로 하고 있으니 전혀 제겐 예술적인 행위로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미술에 굶주림이 생기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술을 독학해서 오늘날 감히 한국화랑미술제에 제 작품이 본격적으로 출품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저는 육체적인 배고픔 이외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있는 중입니다.

질문 2 : 일간지에서 조영남 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어떤 종류의 글을 주로 쓰시며,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TV저널》이라는 주간 잡지에〈놀맨 놀맨〉이라는 제목으로 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얘기를 한 주에 원고지 23매씩 써오고 있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스포츠 서울》에 조영남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 이상은 29세에 죽었는데 소설, 산문과 시를 통해서 자기를 얘기한 것 외에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들레르나 애드가 알렌 포는 어디어디에서 술 먹다가 어디서 쓰러지고 언제 어떻게 했다는 게 기록으로 다 나와 있어요. 그리고 이집트의 고전을 보면 그 옛날 무슨 요일에 어느 왕이 군신하고 활쏘기를 해서 몇 대 몇으로 이겼다는 것까지 다 적혀 있는데, 우리나라는 기록 정신이 참 약한 것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전 '내가 딴따라지만 그래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적어 봐야겠다. 이것이 당장엔 아무 소용이 없어도 스스로 보람은 느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그걸 읽고 나중에 1960년대에 한 가수가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영혼과 정신상태에 따라 노래의 양상도 달라지기 때문에 내 정신을 지속적으로 훈련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매주 글을 써 왔습니다. 노래를 잘 하는 재주 이외에 제법 글줄 깨나 만들 수 있는 재주도 함께 타고났나 봅니다.

질문 3 : 일전에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청와대에서의 조영남 씨 일화를 언뜻 들은 적이 있는데,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저는 노태우 대통령이 불러서 밥 먹으러 갔는데, "열심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씀만 하시고 가만히 있으니깐 나머지 사람이 찍소리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한마디 했지요. "전임처럼 백담사 가시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연희동에서 장기나 두시다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인사나 하는 그런 노후를 즐기십시오." 제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괜히 썰렁해져서 얼른 화제를 돌렸지요. "김옥숙 여사님을 직접 뵈니깐 너무 예쁘십니다. 비결이 있으십니까?" 또 썰렁해졌어요. 그런데, 노대통령이 "조선생! 노래나 하나 하시지요!" 그러는 거예요. 임금님의 청인데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나 혼자만이 그대를 … " 왜 그 노래를 택했는지 모르겠어요. 공교롭게도 음정을 높게 잡았어요.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오. 영원히, 영원히 … ." 이렇게 하다 보니깐 대통령 부인한테 세레나데를 부르는 꼴이 됐어요. 더욱 우스꽝스럽게 된 겁니다.

밥 먹고 끝났는데 김옥숙 여사가 저한테 오시더니 내 손을 붙잡고 "미스터 조는 언제나 재미있으셔" 하시더군요. 그래서 속으로 살았구나 하고 딱 돌아서니까, 키가 이만한 사람이 "미스터 조, 아슬아슬했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이현우 경호실장이었어요.

질문 4 : 조영남 씨는 서울 음대 동문으로서 서울대학교에서〈열린음악회〉개최를 거부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음악회에서 클래식에 비중을 적게 둔다고 서울음대쪽에서 반대했다고 하는데,《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인 제 친구가 저를 대신해서 잘 썼더군요. "서울대학은 폐교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대학이라는 학문적인 기구에서 '클래식'의 뜻도 모른다면 이것은 대학으로 남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클래식이 뭡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클래식은 고전 아니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음악대학 학생들은 베토벤, 슈베르트, 지고이네르바이젠 등을 클래식으로 알고 있어요. 국악 같은 우리의 순수음악을 제쳐두고 외국노래를 클래식으로 교육시켜 왔다는 것은 너무 웃기는 사실입니다. 벚꽃이 지고 나면 벚꽃나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다 알 만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몇 십년 동안 음악대학이 지탱해 온 거지요.

그런데 이제는 조수미 씨가 김건모 씨하고 이중창하고, 김동규 씨가〈빅쇼〉에 출연할 뿐만 아니라 삼태기 메들리를 부르니까 서울대학교에서 더 이상 클래식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소리를 못하게 됐어요. 사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음악을 남 앞에서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덜 익은 음악도, 예술가들이나 그런 이상한 불평을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음악회 개최는 서울대 당국이 결정할 일이지 그곳 음대 교수들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질문 5 :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조영남 씨의 특이한 성격에 관심이 많을 텐데, 제가 볼 때 조영남 씨는 사회의 여러 가지 규범들, 그리고 평균적으로 통용되는 가치관에서 어느 정도 탈피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독창적으로 살아가는 파격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이 성 격 기질 자체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치열한 사고와 연구를 통해서 정립한 가치관 때문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끝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복합적인 성질의 질문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제가 경험했던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제 인생과 삶의 태도는 신학 공부를 하는 와중에 바뀌었습니다. 우리 조 씨들은 이북서부터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그런데 왜 단군을 안 믿고, 왜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을 안 믿고 예수를 믿어야 되나? 그리고 도대체 예수가 뭐냐? 그걸 알기 위해서 신학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요한복음 28장에 '당신이 나를 따르면 진리를 알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 라는 말이 있어요. 교회 다니시는 분은 잘 알지요? 그리고 예수는 죽기 전에 제자한테 얘기를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용서를 일흔 일곱 번까지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어떻게 아랫사람 발을 씻겨요? 또 원수를 무슨 재주로 사랑합니까? 그런데 예수는 그게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게 됩니다.

그때 나는 알았어요. 나는 그 진리를 도저히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처음으로 제가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안 거지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내가 참 나쁜, 사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스스로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지니까 이상하게 자유롭게 되더라구요. 즉 너도 진리를 알지만 행할 수 없는 반편이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 비슷비슷한 속성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람들 속에서 훨씬 자유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대로 살 수는 없을 바에야 편안하게 내 스타일대로 살자는 생각이 응집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가능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 방향으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학교 다닌 지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쉰 둘이 됐습니다. 참 억울할 정도로 덧없는 삶인데 남에게 신경 쓸 만큼 시간이 많은 것 같지도 않고, 비겁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그냥 내 멋대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일찍이 어릴 때 혼자 서울로 올라와서 혼자 개척하듯 살아왔기 때문에 제 생활방식이나 가족의 운영방식이 방종에 가까운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런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건방진 얘기 같지만 남 보기에 제가 좀 파격적으로 사는 것은 철저한 연구결과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진리는 자유 쪽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옷도 자유스럽게 입고, 말도 아무렇게나 막 하고, 결혼과 이혼도 두 번씩이나 막 하고, 돼먹지 않은 글도 쓰고, 그림도 마구 그려 대고, 지금도 이렇게 제 멋대로 떠드는 것이죠. 물론 남한테는 피해를 안 준다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개발과 개혁이야말로 이 덧없고 무료하고 짧게 느껴지는 세상을 더욱 재미있는 방향으로 고쳐 가는 첩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선조 조광조의 개혁정신이 생각난 김에 제목도 그렇게 지었던 것이구요. 이것으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