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이라는 말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과연 한국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는지 걱정 이 됩니다. 더구나 요즘 매스컴에서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는 패러다임이라는 말 풀이만 하재도 시간이 다 가고 말 것입니다. 사실 과학사 서술을 위해서 패러다임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 쓴 '토머스 쿤'만 하더 라도 이 용어에 대한 비판이 일게 되자 '모델'이니 '샘플'이니 하는 말로 대신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몇 가지 예를 통해서 이 말뜻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오히려 문화에 접근하는 지름길이 생겨 시 간을 절약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지구가 둥글고 또 그것이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나타나게 되면 그 전까지 천동설 속에서 그것을 평면이라 고 믿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이나 개념들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지동설은 과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고의 체계 상징 그리고 행동양식에 변화를 주고 그 새로운 틀에 의해서 모 든 것을 읽고 풀이하는 흐름(trend)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가령 19세기 말에 살았던 한국인들은 '개화'라 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 한국문화를 보았고 또 그러한 패러다임에 의해서 생활, 예술, 정치, 경제 등을 만들어 왔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의 사람들은 안경을 '개화경'이라고 했으며 '단장'을 개화 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개화경을 쓰고 개화장을 짚고 다니는 사람들을 개화꾼이라고도 했 던 것입니다.

좀더 복잡한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 이전에 지배해온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은 만유 인력이라는 뉴턴의 법칙이었습니다. 물리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은 물론 문학 예술까지도 뉴턴의 그러 한 패러다임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우주는 만유인력과 같이 일사불란한 하나의 질서와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학에 와서 꽃피게 된 것이 바로 고전주의였던 것이지요. 포프의 시를 읽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게 되는 20세기에 오면 더 이상 그런 패러다임은 통용되지 않게 됩니다. 역시 이번에도 물리학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어떤 의 미와 현상을 실체론적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인 관계론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러한 패러다 임의 변화가 언어학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 소쉬르이고 생물학분야에서 전개된 것이 생태학이라고 할 것 입니다. 소쉬르 이전까지에는 언어를 병에 붙은 라벨처럼 개개 사물이나 관념에 붙여져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소쉬르는 언어를 서로의 관계와 그 차이에 의 해서 비로소 어떤 의미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의 물리적인 소리 하나하 나를 떼어내서 따지는 음성론(Phonetic)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의 체계를 따지는 음운론 (Phonemic)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파이크 같은 학자는 그 접미어를 따서 모든 학문분야의 패러다임이 '에틱적'인 것에서 '에믹적'인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단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면 어제까지의 가치체계나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들이 달라지게 됩니 다. 가령 인간의 피가 돌지 않는다고 믿었던 시절에는 심장판막이 그러한 주장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물로 이용되었지만 혈액이 순환한다는 새 패러다임이 생기게 되면 이번에는 그 판막이 피의 역류를 막는 작용을 하게 되는 증거물로 변하게 됩니다. 인간의 심장판막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지 만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그것은 전연 다른 존재로 부각된다는 것이지요.

영어의 패러(para)란 접두어는 무엇인가를 동시에 나란히 놓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토머스 쿤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가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동시적인 변화를 갖고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 문화에서 그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정보'라는 말일 것입니다. 엊그제만 해도 우리는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합리화 같은 말을 많이 써왔지요. 그런데 어느새 이러한 말들은 정보니 정보화니 탈산업화라는 말로 뒤바뀌고 말았습 니다. 정보라는 말 뜻 자체가 바뀌어 버렸지요. 중앙정보부라고 할 때의 그 정보와 요즘 새로 이름이 바 뀐 정보통신부의 그 정보는 느낌이 전연 다르지 않습니까. 정보부나 정보요원이라고 하면 무시무시한 느 낌을 주는데 정보통신부의 정보라고 하면 컴퓨터 게임처럼 즐겁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소련이 붕 괴하게 된 것도 정보라는 패러다임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각종 정보기기의 발달과 보 급은 비밀주의 통제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보패러다임은 정치적인 용어에 도 변화를 일으켜 '냉전'이란 말이 '탈냉전'으로, 국민국가란 말이 '글로벌'이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정보라는 말은 이제 컴퓨터나 통신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라 전문화 문명의 층위에서 쓰이고 있는 키워드 가 되고 만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일찍이 인간이 수렵채집시대나 농경시대 그리고 산업시대의 패러다 임이 붕괴하고 그 위에서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어느 미래학 자는 그것을 '제3의 물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물결이라는 말의 표현 자체가 '정보 패러다 임'에는 맞지 않은 즉 시간이나 문명을 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보아왔던 산업문명적 패러다임의 유물이라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화 속의 세 왕자

그래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장 쉽게 밝히고 또 그것을 측정해보기 위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인 도지방의 옛 설화 한 편을 먼저 분석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렸을 때 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설화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가져오는 왕자를 신랑감으로 삼겠다 는 어느 왕의 선포로부터 시작되지요. 그 공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왕자 들이 앞을 다투어 그 왕성에 모여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왕성으로 가던 세 왕자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고 각자 자기가 지닌 보물 자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첫번째 왕자는 어떤 경우라도 해가 지기 전에 먹기만 하면 죽었던 사람도 깨어나는 불사약이라고 했고 두번째 왕자는 단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라고 했고 세번째 왕자는 천리 밖을 비춰볼 수 있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 랑 끝에 세 왕자는 공주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천리안을 한 번 들여다보자고 하였고 그 때 마침 화 원에서 놀고 있던 공주가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 위급한 광경을 본 왕자들은 천리마를 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왕성에 도착해 불사약을 먹여 공주를 살 려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공주는 살아나게 되었지만 어느 왕자를 신랑으로 선택해야 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천리안이 없었더라면 공주가 독사에게 물린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 며 천리마가 없었더라면 아무리 그 정보를 알았다 하더라도 불사약을 때맞춰 공주에게 먹이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장황해졌지만 만약 여러분들이 공주라고 생각하고, 과연 자기는 어느 왕자를 택해야 할지를 생 각해 보십시오. 그 해답에 따라서 각자 자기가 어떤 패러다임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불사약이라고 대답하는 학생은 농경시대의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할 것입 니다. 세 왕자 가운데 보물이 없어진 것은 불사약을 가져온 그 왕자밖에는 없습니다. 공주가 이미 먹었 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농경시대의 패러다임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 을 가치의 정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건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 나 산업시대에 들어서기만 해도 중요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기계와 그 기계를 움직이 는 에너지가 가장 소중한 가치로 부상하게 됩니다. 산업혁명을 주도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무엇입 니까. 전기와 휘발유가 움직이는 그 세계가 바로 산업사회입니다. 그것들은 물건이 아니라 모두 물건을 움직이는 기관, 즉 에너지였던 것입니다. 바로 천리마를 최고의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도 모 르게 에너지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에너지만 해도 물건처럼 직접 만져보고 보자기에다 싸 두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농경 패러다 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슈퍼에서 라면 한 봉지 훔치는 것은 큰 죄로 생각하면서도 무임승차를 한다거 나 남의 모닥불을 쬔다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사약의 왕자와 같은 입장 에서 보면 천리마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에너지만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뿐이니까 즉 소유가 아 니라 사용한 것이니까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천리안은 더욱 그렇습니다. 천리마보다도 천리안은 아무것도 일 한 흔적이 없으니까요. 물질 패러다임에 서 보면 천리안의 경우에는 땀방울 하나 흘린 것이 없으므로 장난을 한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할 것입니 다. 그렇지요. 천리안은 요즘 말로 하자면 통신위성을 통한 텔레비전이나 인터네트 따위의 컴퓨터통신같 은 것이지요. 그냥 공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천리마나 천리안은 농업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와 재산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통해서 우리는 농경시대 산업시대 정보시대의 각기 가치관이 다른 세 문 명의 패러다임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시대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추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농경시대에는 별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그 셋째왕 자의 천리안(천리안)이란 게 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만들어내고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란 대체 어떤 것인지 를 주의깊게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디지털 혁명

부호라고 하면 누구를 생각하는가요. 옛날만 해도 강철왕 카네기, 자동차왕 포드가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리고〈자이언트〉라는 영화에서도 보았듯이 석유왕들이 미국을 지배하게 되지 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MS DOS'니 '윈도 95' 같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낸 빌 게이츠가 황제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만이 아니지요. 한때 대통령 에 출마하여 화제가 되었던 페로만 해도 세일즈맨 출신에서 시작해 컴퓨터 프로그램 관계에 손을 대어 결국은 수억만장자의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빌 게이츠도 로스 페로도 카네기나 포드와 같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0, 1의 비트 즉 디지털 신호를 가지고 거부가 된 것입니다. 아톰(물질) 에서 비트로 백만장자의 개념도 바뀌고 만 것입니다. 등록금 투쟁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 부호와 자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변화는 왕이나 제 왕으로 상징되는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꿔놓는다는 점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 니다. 가령 여러분들이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내어 읽는 사람들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도서관 이 아니라도 누구나 묵독을 하지 않습니까? 원래 말이라는 게 소리로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묵독을 한다는 것은 바로 말에서 가장 중요한 소리를 없애고 눈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불과 백년전 서당 에서 하늘천 따지의 천자문을 읽는 사람들은 커다란 소리로 책을 읽었지요. 그러니까 묵독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듣는 청각인에서 보는 시각인으로 변화해 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 까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구텐베르크의 활자매체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쇄술 이 발명되기 전의 중세기에서는 모든 언어 전달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소리였어요. 중세기의 교회에서는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마는 여럿이서 함께 기도를 하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청각적인 힘이 컸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나와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함께 소리내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동질성 과 집단성을 갖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혼자 집에서 성경을 소리내지 않고 읽는 사람들은 곁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질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쇄매체는 소리만이 아니라 몸짓까지도 지워버립니다. 옛날 서당에서 아이들이 천자문을 읽을 때에는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들처럼 낭독하는 소리의 고저 장단에 맞추어 훈장도 아이들도 모두 몸을 전후좌우 로 흔들었지요.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신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소리내어 책을 읽을 때라 할지라도 부동자 세를 취합니다. 빌 게이츠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무엇인가 중요한 생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 면 며칠이고 밤을 새면서 몸을 흔든다는 거지요. 산업시대의 패러다임에서 잃었던 몸의 율동을 되찾는 것이 중요한 정보패러다임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인쇄술과 활자문명이 주도해온 산업사회의 성격을 알려면 도서관에 가보면 됩니다. 학생들은 불과 십센 티 거리에 있으면서도 각자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지를 읽는 사람은 중국에 가 있고, 플 루타크 영웅전을 읽는 사람은 서양에 가 있는 것이지요. 시간도 장소도 생각도 다 달라요. 그리고 도서 관에서는 조금만 소리를 내어도 금세 눈총이 쏟아집니다. 누구나 도서관에서는 귀머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거세된 문명 시각편중의 문화―개인주의 문화― 이것이 산업주의 인간의 표준형이고 여러분들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져서 산업주의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 그런데 도서관에서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전자게임하는 데 가면 어떤가요. 전자음과 동화상과 그리 고 미디 음악이 요란하지요. 각자 자기 놀이를 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영 딴판입니다. 시각과 문자만이 아니라 소리와 촉각적인 것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새로운 감각 의, 그러니까 찢긴 감각을 통합하는 인간들이 태어나고 있는 거라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노래방도 마 찬가집니다. 영상의 시대이면서도 동시에 소리의 시대입니다. 활자혁명이 멀티미디어혁명으로 그 패러 다임이 옮아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활자매체의 패러다임이 음료수에 나타나면 어떤 것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손으로 쓰는 필기체의 문화가 농경시대의 술인 포도주라고 한다면 활자처럼 똑같은 글자를 균질하게 널리 보급하는 복사기술은 콜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기체는 쓰는 사람에 따라 글씨체가 다 다른 것처럼 포도주는 계절과 지방 그리고 그것을 담그고 저장하는 방식에 따라서 제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값도 맛도 다 다르지요. 그런데 콜라는 어떤가요. 그 맛이 똑같고 질도 똑같습니다. 백만장자가 마시는 콜라나 거지가 마시는 콜라는 그 맛도 가격도 똑같습니다. 포도주가 불란서 농업문명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미국 산업사회의 문명이 가져 다준 균질적이고 대중적이고 대량생산적인 산물이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콜라인 셈이지요.

그러나 활자가 아니라 비트로 전달되는 정보시대는 다양하고 더 섬세합니다. 컴퓨터를 이용하면 기성복 이라고 해도 산업시대처럼 라지 미디엄 스몰 그리고 거기에 엑스트라의 서너 종류밖에 없는 규격품과는 달리 수백종 또는 맞춤 양복처럼 자신에게 꼭 맞는 양복을 시장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보의 기술은 옷감을 만들거나 그것을 재단하고 꿰매는 기술이라기보다 그것을 입는 사람의 정보와 마음에 맞 추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즉 디자인과 수많은 인체에 맞도록 하는 다양한 종류의 치수를 만드는 컴퓨터 제어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제조업(manufacturing business)이 물건 만드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사고 업(thinking business)이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산업사회 가 소품종 다량주의였다면 정보사회는 다품종 소량주의로 그 패러다임이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 다.

그렇게 되면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이런 문명의 패러다임 속에서 등장한 것 이 요즘 한창 떠들썩한 인터액티브 텔레비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텔레비전은 주로 방송국에서 편집한 것을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송출하는 것이었지요. 시청자는 정해진 시간대에 정해진 영상이나 소 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매스가 아니라 개개인에게 섬세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는 시청자의 취향과 흥미의 차이를 메워주는 쌍방향의 미디어가 출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성복이 맞 춤양복 수준으로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지금 강연하고 있는 방식 자체가 산업시대의 유물로 일방 통행적인 것이 아닙니까. 앞으로 10년 후의 목요특강 연사는 아마도 인터네트 속에서 여러분들과 전자메 일이나 여론을 주고받으면서 토론식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목요 일이라고 정할 것도 없이 그리고 연사를 초청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하고 나하고 인터네트의 담화 프로 그램(chatting program)에 들어가면 서로 대화를 하게 됩니다. 텔레비전만이 아니라 정보시대에는 발신 수 신의 갭이 없어지고 서로 자유롭게 쌍방향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대화의 방식이 정치에서는 유권자와 피 선거권자 간에 그리고 경제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예술과 스포츠에서는 플레이어와 오디언스 사이에서 그와 같은 정보양식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과 도구 사이에서도 인터액티브한 대화형이 생겨나게 됩니다.

미국의 한 열쇠업자는 손바닥을 딱딱 치면 열쇠고리에 사운드 센서가 붙어 있어서 삑삑 하고 응답하는 대화형 열쇠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산업주의시대에는 자동차 키를 찾다가 일생을 허비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손뼉치면 대답하는 열쇠가 보급되어 사람처럼 부르기만 하면 숨어 있다가도 나타납니다. 산업시대의 자물쇠는 튼튼하고 열지 못하도록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었다면 정보 패 러다임 속의 열쇠는 찾는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즉 정보를 주고받는 자물쇠 열쇠가 그 중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지문이 아니면 절대로 안 열리는 한 사람만이 사용하는 개별 자물쇠 같은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맞춤 양복같은 기성복이 자물쇠에서도 생겨나는 셈이지요.

산업주의를 주도해온 자동차도 정보패러다임 속에서는 변화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동차는 속도경쟁이 었습니다. 파워만 늘리면 남보다 빨리 달릴 수 있었지요. 그래서 자동차의 대시보드에는 속도계가 달려 있고 거기에는 실제로 달릴 수도 없는 200마일 이상의 숫자까지 나와 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파 워를 높여도 교통체증이 심해져서 마음대로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피드보다는 어느 골목으로 어 느 길로 빠져야 빨리 갈 수 있는지의 정보가 더 중요해집니다. 그러니까 스피드 메이터보다는 교통정보 와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툴이 더 필요하게 되는 거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엔진의 파워는 스피드 를 올리기보다는 길이 막혀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게 될 때에도 사무실과 연락을 하고 사무를 보며 때로 는 서재처럼 자유롭게 오락이나 비디오도 구경할 수 있는 정보센터의 구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벌써 그 렇게 되어가고 있어서 자동차는 훌륭한 음악감상실 역할을 할 수 있고 카 라디오로 온갖 정보를 달리면 서 얻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21세기의 대화형 패러다임 속에서는 자동차 운전자가 졸면 그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 라 자동차가 미리 알아서 주인을 깨워서 안전하게 목숨을 지켜줄 것입니다. 자동차의 센서가 눈을 깜박 이는 속도를 체크해서 기준치 이하로 내려가면 경고를 발하고 박하향수를 뿌려주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 면 차가 자동적으로 멈추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벌써 에어백이란 것이 장치되어 사고시에 어머니가 자식을 끌어안듯이 운전자를 충격으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습니까.

시대에 따라서만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에 따라서도 같은 농경, 같은 산업사 회라 해도 패러다임이 달라지게 됩니다. 젓가락을 보세요. 중국, 일본, 한국은 서양사람과 달리 젓가락 을 사용합니다마는 자세히 파고들어가면 그 젓가락 형태가 모두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중국 젓가락 은 아주 긴 데 비해서 일본 젓가락은 짧고 끝이 뾰족해요. 왜? 일본사람은 생선을 먹으니까, 생선 먹으 려면 가시를 발라내야 하니까 뾰족해야죠. 그리고 일본사람들은 무사사회이니만큼 도시락처럼 다 같이 그러나 한 사람씩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젓가락이 길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중국사 람은 온 집안식구들이 동그란 원탁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손자 전부 한자리에 놓고 식사를 하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큰 식탁에서 음식을 한가운데 놓고 먹으려니 자연히 젓가락이 길어질 수밖에 없어 요. 중국은 장자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처럼 온 식구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었지요. 그래서 아무리 부자라도 3대만 내려가면 경작할 땅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해서 생 긴 유민이 바로 객가라고 불리는 집단들이지요. 유민집단이 결국은 외국까지 가서 차이나타운을 만든 것 이고 오늘날 그 화교자본이 중국의 개방경제에 투자를 해서 아시아의 판도를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젓가락 하나에 담긴 의미, 즉 그 패러다임을 통해서 우리는 아시아의 정보사회까지 점칠 수가 있는 것입 니다. 그럼 한국의 젓가락은 어떤가요. 그 길이는 중국과 일본의 꼭 한가운데입니다. 한국의 상은 중국 처럼 온 식구가 먹을 만큼 큰 탁자로 되어 있지도 않으며 일본처럼 도시락이나 혹은 메이메이젠(작은 독 상) 차림도 아닙니다. 대개는 겸상으로 가족이 성별 연령별로 그룹으로 되어 있어서 젓가락 길이는 길지 도 짧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생선이나 기름진 고기보다는 나물을 많이 먹기 때문에 젓가락의 끝도 뾰족 하지도 뭉툭하지도 않습니다. 지리적으로 봐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융합하고 조화시키는 중간문화라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대륙, 일본의 섬, 그 사이에 섬도 대륙도 아닌 반도가 바로 한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와 동시에 대륙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정보사회라 함은 발신자와 수신자를 매개하는 기술 이며 그 도구가 중심을 이루는 시대와 그 세계를 이르는 것입니다. 컴퓨터 용어에 interface라는 말이 있 듯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개체가 서로 만나고 호환되는 융합의 기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요. 21세기는 모든 것이 경계를 넘어서서 학문까지도 생물학과 물리학이 융합하여 생명공학을 이루는 것처럼 균형과 매개와 이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힘이 지배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젓가락 자체가 바로 그런 문화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과 음식을 차려준 사람의 인터페이스에서 생겨난 것이 젓가락이 아니 겠습니까. 만약 비프스테이크처럼 요리를 만든 사람이 덩어리째로 밥상에 내놓았다면 우리라도 별수 있 습니까. 한 손에 쇠스랑같은 포크 그리고 또 한 손에는 그 덩어리를 써는 식칼(나이프)이 필요하게 되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음식을 먹기 좋게 부엌의 도마에서 미리 썰어주기 때문에 각자가 식칼을 준 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요. 서양의 그 나이프란 우리같았으면 부엌에 있어야 할 식칼이 밥상에 나 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젓가락의 경우처럼 한국문화는 매개적이요 혼합적인 것이라는 데 그 문화적 특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젓가락만이 아니라 음식의 형태도 그렇다는 말이지요. 가령 일본음식은 국물이 없습니다. 일본의 단무지 와 한국의 깍두기를 비교해 보세요. 그들의 나라쓰게와 김치를 비교해 보세요.

건더기가 있으면 반드시 국물이 있게 마련이고 국물 음식에는 건더기가 있습니다. 서양사람들은 대개가 다 마른 음식이에요. 그래서 설거지할 게 별로 없어요. 정이란 것이 도시 없는 그래서 매사를 따져서 숫 자로 밝혀내는 서양문화를 한국사람이 보면 그야 말로 '국물도 없는' 문화라고 할 것입니다. 한국인은 젓 가락만이 아니라 숟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국물문화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합 쳐서 수저라고 부릅니다. 실과 바늘처럼 포크와 나이프가 따라다녀도 영어에 그 두 말을 합쳐 '포나이프' 혹은 '나이포크'라고 부르지는 않지요. 숟가락은 국물을, 젓가락은 건더기를 먹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하 나는 움푹 패어 음이고 또 하는 길쭉하게 생겨서 양입니다.

발신자 없는 수신자가 없고 수신자 없는 발신자가 없듯이 음양은 둘이면서도 하나입니다. 이원론도 일원 론도 아니지요. 이것이 바로 실체론에서 관계론으로 패러다임이 옮아가는 정보사회의 특성과 맞아떨어 지는 음양 양의의 태극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개체가 아니라 서로 상관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정보사회 정부문명이란 혼자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무엇인가를 공유(sharing)할 때 더욱 능률이나 의미가 살아나는 상생의 패러다임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업사회는 독점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개인주 의에 그 토대를 두고 경쟁을 벌이거나 집단관계를 만들어냈지만 정보시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화처 럼 서로 가져야 통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상호성이나 관계성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지요. 서양의 음식은 개인의 접시 하나하나로 분리되어 나오지만 한국의 음식상은 밥그릇을 제외하고는 모든 반찬을 공유합니다. 그래서 밥먹을 때 서양에서는 손님이 갑작스레 찾아오면 누구 하나가 굶어야 되지만 한국에 서는 수저 하나만 더 갖다놓으면 특별히 준비를 하지 않아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공유하는 음식이기 때 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빡빡한 사회가 아닙니다. 앞으로 오게 될 정보사회도 산업사회처럼 그렇게 빡빡한 사회가 아 니라는 데 그 특성을 갖습니다. 내가 늘 말하는 것이지만 단추와 단춧구멍은 1밀리미터만 차이가 나도 낄 수가 없어요. 첫 단추 잘못 끼우면 안 된다는 말을 많이들 쓰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산업사회를 주 도한 서양식 개념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전부 못쓰게 되는 것이 서양의 시스템 사고입니다. 한 번 실수한 걸로 전 시스템이 망가지면 그 시스템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스템 위주의 합리주의라는 것이 단추처럼 하나만 잘못되어도 못쓰게 되는 비능률적이고 불합리한 것이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비체계적인 것은 하나쯤 실수해도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한국의 저고리와 옷고름을 보십시오. 첫 단추 잘못 꿰고 할 것도 없어요. 품이 넉넉하다 싶으면 조여 입 고 좀 짼다 싶으면 느슨하게 매면 됩니다. 그러니까 다소 치수가 틀려도 별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업문명이란 1밀리미터만 틀려도 안 돼요. 공산품만이 아니라 모든 제도와 사고가 그렇지요. 미국은 인 구당 변호사 수가 일본이나 우리에 비해서 수십배가 넘습니다. 융통성과 옷고름 매듯이 하는 조정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법으로만 처리하려고 들기 때문이지요. 정보란 무엇입니까. 왜 정보사회란 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까. 만약 월요일 오전에만 비가 오도록 되어 있다면 기상정보는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게 법칙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과 법칙으로만 따질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정보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제 비가 올지 기상에 전연 법칙성이 없다면 정보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노름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기가 있고 건기가 있어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일정한 기상변화란 것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 같은 것은 뉴턴, 갈릴레 이와 같은 공식 속에서 움직이지 않지요. 근대 합리주의 산업주의적 발상은 모든 것을 공식화 법칙화할 수 있다는 과학 맹신에 토대를 둔 문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발전을 했지만 동시에 융통성이나 우연이나 생명적인 모호성을 제거해버리는 인공적 환경을 만들어냄으로써 온갖 부작용을 만들어내기도 한 것이지요.

이등변삼각형의 양쪽 귀퉁이에 똑같은 치즈 덩어리를 놓고 그 정점의 위치에 생쥐를 갖다놓으면 어느 쪽 으로 갈까요. 조건이 똑같으니까 이치대로 한다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산업주 의, 합리주의시대의 쥐라면 정답이 뭐냐, 조건이 똑같으므로 앉아서 굶어죽었다 이거예요. 그런데 쥐는 어디로든 갈 거예요. 노이즈라고 합리주의자들이 그토록 제거하려고 했던 우연이란 기분이란 이렇게 생 명체에게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쥐는 그냥 가고 싶어서 간 거죠.

한국사회는 '그냥'이라는 말을 잘 쓰는데, 그게 이른바 퍼지(fuzzy)에서의 선택이지요. 모든 게 논리적으 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던 갈릴레오, 데카르트의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정치, 경제, 인간관계를 했 기 때문에 안 맞으면 미치광이가 되거나 그 사회는 파괴가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냥'이라는 게 있어요. 다방에 갔을 때 너 왜 왔냐 하면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다고 하죠. 뭐 할 일이 있으니까 왔겠 지 그냥 왔겠어요? 친구한테 물어보세요. 그냥 지나다가 왔다 해놓고 갈 때 돈 좀 꿔줘라 얘기하죠.

'셈'이라는 말도 그래요. calculation, computable―계산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컴퓨터를 우리말로 셈 틀이라고 하자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셈의 참된 뜻은 서양의 계산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하 는 소립니다. '너 밥 먹었냐?'라고 물었을 때 만약 그 사람이 '먹은 셈이야'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안 먹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요. 계산과 실체는 다르다는 것으로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되어도 실질적으로 는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셈은 형식논리만의 계산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 얘 때렸지?'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가 때린 셈이지만…', 안 때렸다는 얘기죠.

여러분들 어렸을 때 가오리연 만들어봤어요? 1밀리미터만 틀려도 이게 날아가질 않아요. 뱅글뱅글 돌아 요. 그런데 구멍 빵 뚫어놓은 방패연은 아무리 balance가 좀 잘못되어도 뜨기는 떠요. 이처럼 치수를 분 명하게 하지 않는 이 퍼지문화가 산업주의 때는 곤경을 받았는데 정보화사회가 되었을 때는 굉장한 플러 스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요. 서양사람들은 바지를 만들 때 입는 사람의 허리를 몇 번이나 잽니다. 한 치의 오류도 없게 하기 위해서이죠. 그러나 전통적인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지 요. 사람의 허리통이 늘 똑같은가. 밥을 먹으면 불어나고 굶으면 줄어드는 것인데 도대체 어디에다 치수 를 맞추는 거냐. 아예 바지춤을 넉넉하게 하면 풀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어 언제나 허리에 맞추어서 입 을 수 있지 않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바지처럼 허리통이 넓은 바지는 아마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것입니다.

치수를 통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재단하는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바지를 넉넉하게 만들어요. 먹는 음식에 는 국물이 있고 입는 저고리와 바지에는 옷고름과 넓은 괴춤이 있습니다. 정보이론으로 하자면 한국인은 노이즈를 제거하지 않고 그것을 포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정보사회의 패러다임은 바로 노이즈 배제에서 포용으로 즉 노이즈에 의해서 자체의 시스템을 바꿔가는 카오스 이론처럼 또는 미셜 세르의 패라지드의 이론처럼 우연이나 노이즈와 같은 불합리한 요소를 창조의 동력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서양사람들도 국물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겁니다. 모든 음식은 만들면 국물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걸 내버리지 말고 국 물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리시스템으로 끌어들이려는 것 그런 철학과 마인드가 정보사회의 핵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양의성, 양면성을 어떻게 살려 한국의 중간문화 매개문화를 정보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삼는가 하는 것 이 앞으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들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도구와 인간이 자연과 인간이 그리고 제도와 인간이 서로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 산업사회의 비극이며 실패의 원인입니다. 거기에서 공해가 스 트레스의 정신병이 병든 개인주의가 생겨나 지금 온 지구는 쓰레기통처럼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양극으로 분열된 문화와 가치체계를 융합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가치의 양 의성을 살리는 더욱 높은 하이퍼 텍스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양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따라서 우리도 이 제는 침대에서 잠을 잡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고 일어나도 침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침대는 침대입니다. 쓰는 사람과 도구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침구인 이불, 요는 잘 때 에는 깔고 자고 일어나면 개킵니다. 사람과 도구는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쓸 때와 안 쓸 때 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도구하고 인간하고 대화형이라 이 말이에요. 내가 일어나면 저희들도 일어나야 돼요. 쥘부채가 그렇고 방석이 그렇고 밥상이 그래요. 그러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이나 터미내 이터와 같이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에 반란을 일으켜 공격을 해옵니다.

도구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서양의 자아 '나'라고 하는 그 개 인주의에 토대를 둔 문화는 모두가 그렇게 단절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짐승들을 보십시오. 특히 인간과 가장 친한 짐승인 개하고 고양이를 보십시오. 같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인데도 개하고 고양이는 전혀 성격이 다른 앙숙입니다. 그런데 개발바닥에는 털이 없는데 고양이 발바닥에는 털이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개들은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니까 발자국소리를 죽이 필요가 없어요. 일부러 짖으면서 공격의 정보를 발신하지요. 그런데 고양이는 혼자서 사냥을 하기 때문에 살금살금 가서 덮쳐야 되는 거 예요. 그러니까 그 발바닥에는 개와 달리 털이 있어요.

개는 팀워크로 먹이를 잡고 고양이는 개인플레이로 먹잇감을 구합니다. 일본과 미국이 싸웠던 2차대전의 전쟁은 꼭 개와 고양이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개인주의 문화환경에서 자라났기 때 문에 잠수함(U보트)의 영웅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도 U보트 함장이었어요. 몇 사 람이 해저에 들어가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적의 수송선을 포착해서 격침시켜야 합니다. 집단이 아니라 완전히 고양이의 전략이지요. 그런데 일본군인들은 일제히 와 소리를 지르면서 쳐들어가는 돌격전에서 전과를 올렸습니다. 사냥개가 먹이를 몰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고독하게 혼자 망을 보며 외롭게 싸우는 개인전에서는 미국을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먹이가 된 동물쪽에서 생각해 봅시다. 육식동물은 눈이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전방에 붙어 있습니다. 먹이 한 마리를 찍어 그것만을 쫓아가야 되기 때문 이지요. 그러나 토끼, 사슴은 눈이 귀밑에 그러니까 자동차로 비교하면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백미러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전후 사방을 다 봐야 도망을 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공격하는 놈은 외곬으로 그러나 도망치는 놈은 사통팔달 어디로나 도망칩니다. 21세기는 공격형, 외길형이 아니에요. 히틀러, 레 닌 등이 외곬의 독재자들이었다면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파라노이아형과는 달리 스키조프레니어형이어야 합니다.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권력은 집중형에서 분산형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정치만이 아닙니 다. 산업주의에서 성공을 한 사람들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을 파는 전문성 그리고 두 마리 토끼를 잡 으려들면 한 마리 토끼도 얻지 못한다는 속담을 진리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나 정보네트워 크 사회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합적이고 하이브리트의 기술―다른 말로 하자면 "평범한 기술의 특별한 결합"으로 발상을 바꾸는 사람이 성공을 합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일본사람들이 강했지요. 일본사람들은 일을 할 때 외곬으로 합니다. 꿀벌형입니다. 그 러나 한국사람이 일하는 것은 나비형으로 이리저리 춤을 추며 날아다니다가 어느 꽃 한 송이에 앉았다가 는 다시 날아오르곤 합니다. 한국말에도 쉬엄쉬엄 일한다는 표현이 있지요. 노는 거하고 일하는 게 잘 구분이 안 가요. 그러니까 단시간으로 보면 일본사람이 이기는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쉬 엄쉬엄 일하는 쪽이 나은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사람들은 뽕도 따고 님도 봐야 일하지, 뽕만 따거나 혹 은 님만 보는 형이 아닙니다. 정보사회의 일들에는 오락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육도 오락성을 지녀야 한다고 해서 교육과 오락이라는 말을 합쳐 edutainment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컴퓨터 에는 놀이게임이 들어 있습니다. 컴퓨터야말로 뽕도 따고 님도 보는 기계입니다. 산업주의시대의 기계에 는 오락적 요소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철저하게 없애는 데서 시작되어 있습니다. 능률 기능만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떤 공산품에도 디자인이나 색깔이 좋아야 소비자들이 삽니다. 기능 만이 아니라 마음에 호소하는 오락성 미학성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을 내자면, 한국문화의 패러다임을 산업주의 패러다임에서 읽지 말고 정보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읽 으면, 지금까지 한국에 마이너스로 보였던 단점들이 오히려 새로운 문명의 자원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광수 씨는 개화기 때 민족개조론을 썼지만 여러분들은 민족성을 어떻게 창조적인 것으로 적용 시켜 가느냐로 테마를 바꿔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나빴다고 생각하는 것,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일본, 미국에 뒤졌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을 정보화시대에 잘 살렸을 때는 엄청난 부를 가져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반도체 수 율은 80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성이 부족하고 손이 거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 본사람들은 집단주의적이고 대단히 원칙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반도체 수율이 90% 이상을 못 넘긴다 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여공들이 만들어내는 반도체는 정성과 융통성과 그리고 끈기가 있어서 그 수율이 거의 100%에 가까워 세계 제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낡은 패러다임으로 생각하면 한국사람들에게 눈치가―눈치가 있으면 절간에 가서도 새우젓 먹는다고 하는― 그 눈치가 나쁜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눈치는 수신지향적 정보문화의 마인드로서 소비자에게 감동을 일으키는 미래산업과 그 사회에서는 아주 귀중한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반도체는 조 금만 기분이 나빠도 조금만 정신을 팔아도 금세 불합격품이 많이 나오거든요. 팀장은 눈치로 누가 지금 컨디션이 안 좋은가 누가 생리중인가를 감으로 찍고 작업팀에서 뺀다는 겁니다. 이런 일은 컴퓨터나 지 적인 판단만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21세기에는 반도체의 경우처럼 기계제품도 그렇다고 완전히 수공품도 아닌, 인간과 기계가 대화를 하고 협력해서 만들어지는 정보관계 제품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반도체처럼 절대 기계가 끝손질 못 하는 하이테크 상품들이 많이 생산될 것입니다. 마지막엔 사람의 손이 가야 돼요. 그게 반도체예요. 산 업사회가 기계 그리고 농업사회가 사람의 손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면 앞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정보화시 대의 특색은 기계와 인간의 손이 합쳐진 신테제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같으면 불합격이 나와도 부품만 갈아끼우면 돼요. 그러나 반도체 완제품은 한 공정만 잘못되어도 전공정이 무효가 되어버 리는 것으로 그 전부를 내버려야 되거든요. 우리가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수율을 기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패러다임의 시각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에 지배되지도 않고 자연을 지배하지도 않는 자연과의 협력 그리고 조화를 하는 한국의 천지인 삼재 사상은 정보문명의 패러다임에 여러 모로 잘 적응되는 문화자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된다면 21세기는 바로 여러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