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45년생으로 쉰 살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인생보다 제 인생은 억울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아 직 신인이고 영화도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밀리고 밀려 노장이 되어버리고, 살아온 동안 제대로 사회에서 너무 내
본익을 찾 아먹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시대가
상당히 여러분보 다 어두운 편입니다. 저는 삼십대 사십대 물론
이십대도 군사정권하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요주의 문제아 같은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 느 틈에 나이 쉰이 되어서 인생의
마감시기에 도달한 것이 억울함을 느끼게 합니다.
영화를 처음 만든 게 1974년이고, 영화에 입문했던 것은 1965년이므로
근 30년이 되는데 정작 영화를 만든 햇수는 1974∼76년까지 2년,
80년에서 87년까지 7년하고, 그 다음 최근에 90년에 2년 간 일한 것 등
제가 영화 만 든 시기는 전부 11년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19년은 거의
실패와 정부의 제 재 속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낸 셈이죠.
저는 한국영화의 문제점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성공과
실패의 현장 속에서 그 경험을 통해서 한국영화의 과거를 문헌이나
문서위 주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 저의 직감적인 판단으로 추측하는데,
이것은 주 관적이고 비논리적이죠. 이것이 때로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 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영화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919년입니다. 올해가 영화 100주년이
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영화를 만든 지 24년이
지나 한국에〈의리적 구투〉라는 영화가 일본의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이 탄생시기가 저는 상당히 우리 영화에 불행의
씨앗을 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과 비교해서 나온 말인데,
일본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습니다만 모방하는 데 천재적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보다 개화가 앞 서서 영화의 탄생지인 선진국에서
배운 그대로 철저하게 대규모의 영화사 와 스튜디오 그리고 제작구조
일체를 갖추고 영화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식민지라는 조건
때문에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 고, 우격다짐이 가능한,
좋지 않은 의미에서의 실험무대였죠. 삼류가 식민 지에 와서 일류
행세를 할 수 있는, 깔볼 수 있는 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은 선진국 그대로 영화시스템을 갖추어서 제작을 하고 있는데, 우리
경우는 몇 명이 적당한 능력과 기질만으로 만드는 셈이었습니다. 저
역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죠.
한국영화의 아주 악질적인 전통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화와 건축이 상당히 닮았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설계와 시
나리오가 우선 공통점이고요. 시공과 영화 찍어내는 것과 닮았고, 많은
인 원을 동원해서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작업이 영화와 건축이 닮았다는
점입니 다. 과학적이고 합리적 기술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정상적으로 본다 면, 무허가설계로 구조역학을 무시하고 임의로 시공한
집장사 집이 쉽게 이루어지는데, 이런 것이 일반주택으로 끝나지 않고
백화점으로 이어져서 삼풍백화점과 같은 금방 드러나는 부실공사가
됩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한국영화를 보실 때 영화가
끝난 다음 자막에 나오는 인원수를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그리고
외국영 화의 인원수를 헤아려 보시면 엄청난 차이를 느끼실 것입니다.
바로 외국 영화의 엄청난 인원으로 만든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한국영화의 10 배를 들이면 일본이나 유럽에서 제작하는 비용이
나옵니다. 전 세계시장을 점거하고 있는 미국영화는 일본이나 유럽의
10배입니다. 우리 영화의 100 배죠.
제가 영화감독을 하면서 조감독 시절에 처음 영화를 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을 했는데, 신 감독은 촬영을
본 인이 직접 하기 때문에 연출자가 하는 일이 겉보기엔 분명치 않게
됩니다. 영화배우는 연기를 함으로써 틀림없이 영화배우라는 생각이
들고, 조명기 사는 조명기를 비추니까 그 역할이 나타나는데, 신 감독은
촬영하는 일인 지 연출하는 일인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제가 데뷔할
때입니다. 10년을 조 감독을 했는데도 앞이 캄캄해요. 내가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 촬영날인데, 영화배우들이 모였는데 꼭 나를 테스트하는
시험관 같아요. 상당히 긴장하 고 불안했었죠. 영화감독을 하지 말고 신
감독 밑에서 있던 식으로 조감독 을 하자. 신 감독은 여기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조감독 일을 하면 영화를 만들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촬영기 사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거의 영화감독이 편집에 끼는데, 외국에서는 연출자가 계약할 때
편집에 관여한다는 조건을 베테랑일수록 별도로 계약조건에
집어넣습니다. 보통 베테랑이 아니면 계약조건에 토를 달 수가 없죠.
한국에서는 감독이 면 누구나 편집에 관여를 하는 것이죠. 마치
의무처럼. 영화감독이 하는 일 이 처음에 기획부터 시작해서 시나리오
작업에 함께 동참하고 콘티 작업하 고 촬영현장 연출하고, 그것이
끝나면 편집을 하고, 녹음에서도 리더의 역 할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외국에서는 영화감독이 하는 현장연출 외에 허 락되지 않은 일을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영화감독이 합니다.
이런 것들이 제작비를 줄여내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영화감독이 정말
로 올바르게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시간은 다른 일에 다 빼앗기고,
냉정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에서 시나리오나 편집에 관여하는 동안에 그
영화에 빠 져서 냉정함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악조건이
식민지 시대 내내 반성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극장에 붙여지고
흥행이 끝나면 한국영 화는 보존이나 기록이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영화 에서는 아무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 가난은 여전했고, 무엇보다도 선진영화 제
작시스템을 경험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도적 개혁이나 조직, 이런
것 들이 개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본 적이 없었으니까 비교할 대상도
없었습 니다. 해방 이후는 더욱 나쁜 상황이었습니다. 사상대립, 혼란
때문에 식 민지 시절보다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분단 이후 이승만 정권이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영화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영화에 면세를
해주고 혜택을 주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로 되어서 건달들을
영화계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의식이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사회가 혼란해서 많은 건달들이
일확천금을 만들기 위해서 들 어왔습니다. 더구나 영화에는 예쁜
영화배우들이 있었으니까 세균이 자랄 수 있는 온상이 되었죠.
자유당시절에 영화판은 깡패가 많았습니다. 영화사업은 깡패사업이 되어
서 깡패들이 영화사에서 일을 했는데 아주 유리한 점이 있었습니다.
인기 있는 배우들을 붙잡아오고 강제로 뺏아오기 위해서는 주먹이
빨랐죠. 그만 큼 깡패들이 득세했던 시대였죠. 영화 제작부장 중에는
깡패들이 많았는 데, 그 사람들이 처음 군사정권 시절 굉장히
왕왕거렸습니다. 이제는 다 할 아버지들이 되어 가지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영화제 작에 정치적으로 야합하고 영화
발전하는 데 방해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들 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5?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영화는 구제불능까지 되었습
니다. 표현의 자유가 뿌리부터 고갈되는 거죠. 제가 1974년에
영화데뷔하 면서 영상시대라는 서클활동을 했었는데, 그 당시 하길종,
김호선, 홍파 감독들이 모여서 영화를 제대로 표현할 순 없지만 하고
싶은 영화를 입으로 나 한 번 얘기해 보자 할 정도로 상당히 암울했던
시절입니다.
재건, 개혁, 새마을 이런 것들만 통제받지 않았고, 우리 사회의 취약한
비판적인 시각은 중앙정보부가 주리를 틀었습니다. 반대로 새마을
영화들 은 각종 포상을 받고, 외화 배급도 얻게 되고 하니까 저절로
영화제작자들 의 창작의식이 사라지면서 그 통치에 야비하게
길들여졌습니다. 변칙으로 시작해서 변칙으로 끝나는, 변칙을 주로 하는
한국영화는 또다시 그런 심 한 변칙을 강요당했습니다. 1969년에는
한국에도 민간TV 방송이 되었습니 다. 그 때 처음으로 한국영화가
천연색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텔레비전 을 의식해서 말이죠. 영화를
만드는 데 돈은 더 많이 들면서 손님은 점점 더 없어졌죠.
우리 영화가 만든 변칙적인 방법 중에 하프(half) 사이즈라는 카메라
촬영 방식이 생겼습니다. 돈을 아끼다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영화의
경우 프레 임에 구멍이 네 개가 있는데, 그러면 이것을 당시
시네마스코프라는 확대 기술을 이용하여 양쪽으로 넓혀서 다시 펼쳐
화면이 나가는데, 그렇게 줄 이고 늘리고 할 것 없다, 구멍이 네 개니까
네 개를 다 쓰지 말고 두 개만 쓰면 필름이 2분의 1로 줄어들지 않느냐
해서 하프 사이즈라는 촬영방식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렇게 머리를 쓰면
필름값을 절반으로 줄이는 데는 도 움이 되지만 화면은 아주 나쁜
화면이 나옵니다.
〈별들의 고향〉이라는 최인호 씨 소설은 아주 새로운 감각의
신문연재소 설이었습니다. 정말로 아침에 일어나면〈별들의 고향〉부터
찾는 사람이 많 았습니다. 인기있던 소설을 그 작가가 친구였던 덕분에
제가 판권을 가지 게 되었습니다. 영화판 여기저기서〈별들의 고향〉을
만들기 위해 저를 스 카우트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조건을
내세웠던 게, 그 당시 영화감독 협회에서 영화감독 체면을 세우기 위해
덤핑하지 말고 최저 25만 원을 받으 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하프
사이즈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 고 후지필름을 사용하지 않고
코닥필름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주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영화로 일약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다가 대마초 사건에
관련되어 일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활은
형편없 어졌지만, 대신 한국영화의 현실에 대해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 시에 이어령 씨가 아주 명언을 했습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화장 실 냄새를 모르는 법이며, 화장실에 막
들어가야지 그 냄새가 난다고 했는 데, 그말 그대로 영화 바깥에
머물다가 한국영화의 시사회에 가보면 구린 내가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영화가 그려내는 모든 세계가 현실에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대학교수의 삶이 저렇지 않고 샐러리맨의 삶이 그렇 지
않고 공무원들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독재정권에 길들여져서 자기자신도 되돌아보지도 못한 사이에 영화의 현
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도 눈을 현실에 돌리지
못하 고 영화세계 안에서만 살아오니까 똑같은 영화내용 속에 같은
현실만 자꾸 다루어 차라리 1960년대 초 50년대 초에 만들어졌던
흑백영화들,〈마부〉, 〈박서방〉,〈오발탄〉이런 것들을 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 다. 그 때는 가난하지만 사람의 사는 모습이
영화에 그려져 있었는데, 그 후는 천연색으로 바뀌면서 화려한 것만
그려냈지 살아 있는 삶의 모습을 그 려내지 못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4년 후 박 대통령이 죽고 나서야 저희들이 활동을 할 수 있었는
데, 그 때 제가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되면서〈바람불어 좋은날〉이라는
제목 으로 최일남 씨의 소설〈우리들의 넝쿨〉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 소설에 감동받은 것은 농촌을 떠난 젊은이들이 도시 변두리에서
막 한창 개 발붐이 일어나는 중 인간의 어떤 자랑스러움이 사라지고
우정을 깨뜨리는 그런 속에서도 자기를 지킬 수 있었던 질박한 정이
느껴졌기 때문인데, 저 는 그것을 살려내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그 동안에 리얼리즘이 죽어 있었냐 하면, 그 영화를 만들고 나서
영화검열에 들어갔는데 5시간 동안 제 작품을 놓고 사정회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의 감각으로는 상상 못하는 영화였었죠. 저도 그
영화를 만들 수 있 었던 게 그 때가 박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 대통령이
아직 대통령 되기 전이 라 그 사이에 사람들이 잠깐 흥분했던
시기였습니다. 서울의 봄이라고 신 문에 나고 자유가 온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는 이미 전두환이 호랑이로
변한 다음이죠. 그래서 영화검열이 까다로웠는데, 당시 영화검열위원
중에 소설가 박완서 씨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한 장 면도 잘라서는
안 된다고 버텨서 제가 박완서 씨 때문에 그 영화를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 시사실에서 보여지면서 많은 그 당시의 젊은이들이 흥분을 했
고, 저는 억울한 4년을 마감하고 다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모였던 젊은이들이 지금 모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김홍준 이런 젊은 감독들이 그
당시에 아직 조감독도 아니고 영화학도로서 시사회에 와서 흥분했던
청년들입니다. 그 후로 제 주변이 갑자기 진지하게 됐습니다.
영화학도들로 둘러싸여서 영화 에 상당히 의욕적인 기획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다음에 만든 영화들이 〈어둠의
자식들〉,〈바보선언〉,〈과부춤〉같은 일련의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영화를 왕성하게 만들어야 할 시기인데 그 당시 정
권은 다시 통제를 심하게 가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영화를
통제하 냐 하면, 전처럼 무조건 누르는 것이 아니라 안기부에
영화조정관이 있어 서 늘 제작자와 골프를 치고 영화주변을 로비하면서
다니는데, 가령 예를 들어 저같은 경우, "그 자식 그거 빨갱이 같은
영화만 만드는 거 아냐!"하 고 일종의 암시를 줍니다. 제작자가
기피하게 만드는 거죠.
저는〈어둠의 자식들〉만들고 나서〈어둠의 자식들 2부〉를 만들기 위해
서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이 그만〈바보선언〉이란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어둠의 자식들〉이야기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그
중 가수를 꿈꾸 던 윤락여성의 이야기만 다루었는데, 그것은 소설의
겨우 한 4, 5페이지밖 에 되지 않는 그런 분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원작자 이동철의 진짜〈어둠의 자식들〉부분을
다루려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 당시에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었기
때문에 시나리오 허가를 맡아야 했는 데 시나리오에 검열이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시나리오뿐만 아니라〈어둠 의 자식들 2부〉라는 제목도
사용 못하게 하고 원작자 이름도 밝히지 못하 게 하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얼마나 암담한 시기였느냐 하면, 한국영화를 4/4분기로 나누어서 시한부
제작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1/4분기에 한 편, 2/4분기에 한
편, 3/4분기에 한 편, 4/4분기에 한 편, 1년에 네 편을 만들게 강요를
했는데, 1/4분기에 한 편을 만들면 외화쿼터를 한 개 주고 하는
바터제로 했는데, 우수영화가 되어야만 그 상을 타는 거죠. 이 작품은
영화 만들 거리가 많다 면서 3부작을 만들 계획을 했었고, 원작료를
비싸게 지불한 제작자는 돈을 많이 투자했으니까 그것을 꼭 뽑아내야만
했죠. 그래서 저한테 두번째 작 품을 만들라는 계약을 미리 해놨던
겁니다.
그 시기 내로 완성되지 못하면 저는 계약위반으로 그 사람들 하라는 대
로, 법적 처분 당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양쪽으로
저 를 몰아세우는 거죠. 문공부에서는 시나리오에 허가를 안 해주고,
제작자 는 2/4분기 안에 만들지 못하면 우리 망한다 그러고. 제가
사정이 딱했습니 다.
우선 시나리오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 문화공보부에서 보았을 때 정말
로 모범적인 아주 착한 내용으로 만들어서 일단 시나리오 내용은 허가를
받 았습니다. 그런데 영화제목이 허가가 안 되니까 그건 정말
딱하더군요. 제 작자는 이해를 하기 때문에 네가 한 번 해보고 싶은
제목을 만들어보라고 해서 제가 조감독들하고 한 20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바보선언〉이라는 게 들어 있었는
데, 여하튼 그 목록을 가지고 제작자가 문공부에 가서 한 20개
만들었는데 어느 게 좋은지 골라달라고 문공부에 부탁을 했습니다.
뜻대로 안 되니까 그 사람들보고 고르라고 한 거죠. 그랬는데
문화공보부 직원이〈바보선 언〉이 제일 낫다고 그래요.
그래서〈바보선언〉이 통과됐고 영화가 촬영이 되었는데,〈어둠의
자식들 2부〉를 리얼리즘으로 만들려고 시나리오를
세워놨었는데,〈바보선언〉이라 는 걸로 영화를 시작하려니까 영
현장에서 이뤄낼 수가 없었습니다.〈바보 선언〉이라는 제목이 저에게
굉장히 압박감을 주었는데, 그래서 이야기들을 희화화하기 시작했죠.
그냥 하다가는 틀림없이 망신당하고 영화는 개판이 되고 나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생명이 끝날 것이다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우려 속에서 제가 돌파할 수 있는 길로 희화화시켰고, 무조건 이걸
로 영화는 끝이다라는 심정으로 제가 직접 출연하여 영화 시작에 제가
옥상 에서 팬티 바람으로 뛰어내려서 자살하는 장면부터 찍었습니다.
나중에 영 화평론가, 영화학도들이 어떻게 영화를 이따위로 만들었느냐
했을 때 내가 미리 죽지 않았느냐고 항의하려고 그랬지요.
영화감독으로 직접 출연했어요. 영화감독이 자살하면서 내레이션이 나옵
니다. "영화감독은 드디어 자살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스포츠만 관심이 많았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오면서
제가 자살하는 장면을 찍었죠. 그리고 우리가 종래에 영화를 만들었던
방법을 완전히 역 행했습니다.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를 무조건
앞세웠고요. 혼란을 일으키는 거죠. 자살 직전의 혼란처럼.
모두 시행착오였습니다. 촬영기사는 정상속도로 촬영하지 말자는 제 요
구에 영화 망쳤구나 하고 자신없이 행동하고, 조감독들은 뭘 물어보려고
해도 늘 반대니까 이렇게 해야 되는 건가요 했을 때 제가 인상을 쓰면
바꿔 버리고, 심지어 배우들은 뭘 찍는지 모르죠. 가령 청량리역 앞에
가는데 조 감독도 뭘 찍는지 모르고 아무도 뭘 찍는지 모르고 심지어는
저도 뭘 찍는 지 몰라요. 일단 청량리 앞에 가서 사람들 모습을 찍자고
갑니다. 마침 신 인배우들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저희가 시간을 끌어낼
수 있었죠.
그러면 청량리 역전의 많은 부랑자들 속에 배우를 집어넣어서 유객행위
를 하라고 지시만 하고 카메라는 표시판처럼 만든 위장망 속에 들어가서
몰 래 찍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하루면 끝났을 촬영을 저희들은
일주일을 했었죠. 일주일 동안 한 이유 중 하나는 오늘 여기서 촬영
끝내면 다음에는 뭐를 찍을까 모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매일 같은
장소에 또 나가고 또 나가고 한 것인데, 그러다 보니까 필름 사용한
것이 영화의 3분의 1 정도를 사용했습니다. 그제서야 필름을 보면서
이것이 꼭 망치는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이미 찍어놓은 것들을 토대로 아주 간단한 이야기
를 만들어 영화를 정리해 가기 시작했죠. 어쨌든 그 영화는 상당히
독특한 영화가 되어 우리 젊은 감독들, 학도들한테 굉장히 용기를 주는
영화가 되 었는데, 저도 참 알 수 없는 것은 영화 검열하는 문공부
사람들이 그 영화 를 보고 아주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해외공보관에
이 영화를 배포하겠다 고 그러는데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영화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일 마지막 장면이 어린아이가 그린
태극기였는데, 제가 한 것은 태극기에 카메 라를 접근해서 태극기를
가득히 잡은 것뿐이에요. 그것 때문에 그 사람들이 좋은 인상을 가진
모양이에요. 굉장히 애국적인 영화로…
그 다음 이 영화 시사회를 학생들과 굉장히 재미있게 봤는데, 영화흥행
사들을 보여주는 날에는 10분도 안 되어서 이게 무슨 영화냐 하고 다
나가 버렸어요. 제작자하고 저하고 끝까지 앉아서 봤는데, 제작자가
영화 다 끝 난 다음 자기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장호가 개판쳤다
그러는 거예요. 그 래서 그 영화를 창고에다 처박아놓고 극장에 안
붙였습니다. 저는 어떤 조 작에 의해서 전혀 일을 못하고, 먹고는
살아야겠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궁 여지책으로 문화영화를,
새마을영화를 좀 만들어 달라고 해서 강원도 어느 목장에 가서 촬영하고
있는데 느닷없이〈바보선언〉을 붙인다 그래요. 1년 이 지났는데.
그날 개봉하는 날도 저는 강원도에 있다가 전화를 걸었더니 손님이 많다
고 그래요. 참 알 수 없더군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강원도에서
달 려왔습니다. 단성사에 갔더니 완전 매진돼 버렸어요. 영화가
이상하게 귀 신들린 것처럼 계속 연일 매진되고,〈바보선언〉이라는
하나의 정말로 알 수 없는 신화가 생겼습니다. 그 다음에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어요. 저도 좀 어리둥절하죠. 사실은 포기했던 영화죠.
자살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던 영화인데 그렇게 잘 됐으니까요.
그 때 제가 하나 느낀 게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통제가 심하던 시절
에는 그 기록이 굉장히 은유로 숨어드는데, 말하자면 이런 영화는
혼자서 절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독재정권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정직하게 얘기를 했죠. 이것은 저 혼자
만든 영화가 아 니라 전두환 대통령과 같이 만든 영화다, 통제와 압박이
심하지 않으면 이 런 영화가 나올 수 없다, 딱 한 번만 이런 영화는
가능하다라고 얘기를 했 습니다. 그런데 그 후 저는 편법으로 타협하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 는데, 어느 날 불행한 악마의 유혹이었나
봅니다.
한 2년을 활동을 못하다가〈바디랭귀지〉라는 책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무릎이란 단어가 굉장히 인상적으로 눈에 띄었습니다. 그 단어를 곰곰이
굴리고 굴리고 하다가〈무릎과 무릎사이〉라는 한 좋은 제목을
생각해냈죠. 그 제목 하나 가지고 거기다 이야기를 붙여서 다시
영화활동을 하기 시작했 는데, 그것은 순전히 제목만 가지고 활동한
셈입니다. 순전히 제목만 가지 고 30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작자들한테 외면당하는 감독이 아니게 되고 다시 활동할 수 있었는데,
그후에 제가 좀 타락했어요.
돈 되는 영화에 눈독을 들여가지고 계속 히트를 쳤습니다.〈어우동〉,
〈외인구단〉, 이렇게 히트치고 나니까 계속해서 돈을 만져야겠다,
영화사 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꼭 제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닌가 봅 니다. 그 후로는 하는 영화마다 실패를 하고 교통사고까지
겹치고 하다 보 니까 아주 빈손으로 돌아왔죠. 이렇게 해서 1990년대로
넘어옵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좀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 작년말에 후배가 와서
〈바보선언〉같은 영화를 한 번만 다시 만듭시다 그래요. 제가 마음이
약 해져서 그런 영화를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럴려면 어 떤 적개심이 있어야지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지금은
독재시대가 아니 니까 적개심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최고의
적은 나 자신이다 라고 생각하고 제 자신의 문제를 다루기로 했죠.
그런데 다루다 보니까 자 꾸 제 자신에 총부리를 겨누는 게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총부리 가 겨누어지는 셈이 되어서
사람들한테 분명하게 제 의사가 전달되지 못하 고 오해를 일으키는 그런
영화가 됐습니다. 어찌 됐든〈천재선언〉은 지금 시대에 저 자신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관객들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그 런 사생아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제 이야기와 그 동안의 한국영화 이야기를 종합해서 오늘의 시
점에서 한국영화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21세기는
영상산업이 각광을 받고 각종 영상자원이 경쟁하는 새로운 시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대기업들이 자본을 영화계에 집어넣어서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습 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국영화를 만드는
속성은 변하지 않고 있고, 구조 적 취약점들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지 않은 최근 3년 동안에 영화계가 많이 바뀌었는데, 제가 소
외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3년 만에 영화를 다시 만들면서 현장이
바뀌었 다는 기대가 있었고, 그리고 제가 영화 만들면서 늘 꿈꾸던 것이
완벽한 준 비와 철저한 계획들이 페이퍼 워크로 잘 준비되는 그런
것이었는데, 그 꿈 을 지금 젊은 세대가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 다. 주변의 젊은이들은 다 모르는 얼굴인데, 이
사람들하고 일하면서 전혀 한국영화 제작현장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실망을 했습니 다. 여전히 즉흥적이고 현장에서 기다리는
일이 많고 프로페셔널한 점이 전혀 없이 사람 숫자만 굉장히
많아졌어요. 외국영화의 스태프 인원수를 흉내내려고 하는지 무슨 코디,
의상, 분장, 미용 많이들 따라다니는데 전 부 문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적은 숫자라도, 저만 해도 8년 동안 조감독 생활을 하는 바람
에 아주 능숙한 일꾼이었는데, 지금은 영화 현장에 한 2∼3년의
경험으로 스태프으로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서투르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예요. 그 바람에 돈 낭비가 심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많고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서 한국영화는 그 탄생시기부터 문제점이
많았었는데, 여전히 새로운 세대 가 영화에 들어왔는데도 그런 근본적인
문제점은 고쳐지지 않고 있구나 하 는 실망을 하게 되고, 또 대기업이
돈을 투자하면서 대기업은 돈만 투자한 것이지 영화제작의 경륜이 없기
때문에 현장을 영화인들한테 맡겨두는데, 그 새로운 영화인들이
미숙해서 낭비가 정말로 딱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대기업이 믿는 것은 영화인을 믿는 것이 아니고, 스타 시스템,
즉 안성기, 문성근, 강수연, 최진실, 그런 보장이 되는 스타들에게
엄청난 돈을 주어서 끌어들이고 그것으로서 기획에 큰 일조를 했다는
안이한 생각 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전에 우리가 신인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던 그 때에 비해서 제작비율은 지금이 더
악조건입니다.
그 때는 배우에게 주는 비용이 절약이 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화에
사용하는 비용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스타들에게 그 많은 비용을 주기
때 문에 실제로 영화에 드는 비용은 적게 되는 거죠. 오히려 상대적
빈곤을 느 끼면서, 대기업 젊은 세대들로 이루어진 이 전성기 같은
시기가 오히려 한 국영화에 도움이 안 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젊은 엘리트들이 경쟁적으로 영화에 들어오고 있는
데, 이 사람들이 예전같았으면 한국영화의 엘리트로서 한국영화를
예술적 으로 성장시키는 몫을 담당했을 텐데 반대로 대기업의 그런
마케팅전략에 철저히 동조하면서,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나쁘게
말하자면, 대기업의 선 봉에 서서 한국영화를 상업적으로, 상업적이란
게 꼭 나쁘다고 생각을 하 는 것은 아니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 니다.
제가 15년 전에 일본에 갔었는데, 왜 지난날의 일본영화는 참 좋은 것들
이 많았는데, 지금 젊은이들이 만드는 영화는 볼품이 없을까 생각했거든
요.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 후에 젊은이들의 사고라든지 그런 것들이
안 이해지고 시간 죽이기 같은 데에 빠져들면서 젊은이들의 영화가 아주
이례 적으로 소비성의 영화만 나왔었는데, 15년이 지난 후 지금
일본영화는 정 말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꼭 그 당시의 일본영화계의 변화를 지금 한국영화에서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대기업의 자본이기 때문에 더 두렵습니다.
재벌기업들이 문화를 살리는 쪽보다는 영화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 힘이 막강하고 파워가 세기 때문에 한국영화를 내리막길로 달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일본처럼 되지는 말았으면 하고 바라면서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은 어떻게 보면 포물선의 정점 마지막 완벽한 성장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젠 내리막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여전히 분단 상태이고, 분단현실과 통일의지가 전국민들로 하여금
남한만 단일국가로서 만족하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런 첨예한
의식들이 우리 젊은 세대에 아직도 중요한 의무감으로 남아 있어, 그런
현실의식, 문제의식에 의해 구 원받을 수 있다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영화뿐만 아 니라 모든 문화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이 들어요. 대중가요 속에 우리와 상관없는 외국
단어들이 들어가고, 아무리 뛰어넘어도 백인이 될 수 없는데도
백인우월감 의 대중문화를 이런 아시아의 청년들이 쫓아간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도 굉 장히 불리한 싸움이고 아주 우리를 더욱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 다. 아주 재미있게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워낙 가진 것이 부 족하여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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