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저는 원래 학교 교단에서 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26살 때 한양대학교에 시간강사로 들어가서, 1년 만에 전임강사가 되고, 3년 만에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조교수로 있다가 미국 교환교수로 갔는데, 형식은 교환교수였지만 학위를 하러 갔습니다. 한양대에 다시 돌 아올 작정이었으나 정치상황이 바뀌어서 정계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벌 써 약 19년째가 되니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저는 직업이 대학 교 접장, 국회의원 이 둘밖에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 돌아올 때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반갑고 설레는 감정이 듭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의논해 보고자 하는 제목은〈한국인의 의식구조와 민주주의〉, 즉 한국인의 의식구조 중 특별히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의식 구조에는 어떤 특성이 있으며, 그러한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토착시키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저해되는가라는 점을 오늘 의논하고자 합니 다.

한국인의 의식구조, 정치의식구조의 총괄체를 정치문화라고 합니다. 의 식구조의 총괄체를 문화라 하고, 정치의식구조의 총괄체를 정치문화 (political culture)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보는 시각에는 대칭되는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낙관적으로 보는 시각, 하나는 지극히 비관적으로 보는 시 각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뛰어난 문화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문화를 지극히 낙관적 시각으로 보 는 것인데, 이러한 사람들의 밑바탕을 자세히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근 거없는 자만심이나 열등의식의 반작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문화를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는 경우도 많 습니다. 흔히 얘기해서 조선인은 엽전이다, 사대사상이 높다, 당파성이 강 하다, 이런 표현은 열등의식의 발로 내지는 일제치하에서 정책적으로 한국 인의 결함을 강조하던 습관이 남은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인의 문화, 정치 의식구조를 보는 시각은 지극히 낙관적이어서도 비관적이어서도 안 됩니 다. 객관적으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서 흑백논리의 판단을 벗어난 연구방 법에 의해서 한국인의 의식구조 문화가 고찰되어야 합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정치의식구조)의 밑바탕에는 다섯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1)유교의 유산
(2)농경문화의 유산과 영향
(3)한국인의 정치사적 영향
(4)한국인의 전통적인 무당주의, 즉 샤머니즘
(5)서양에서 수입된 서구문화의 영향

첫째, 유교(儒敎)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규범으로서 두 가지 측면 에서 영향을 미쳤는데, 유교의 기본개념인 삼강오륜은 한마디로 집약해서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불평등 당위론입니다. 인간관계가 불평등한 것을 당 연하게 여기는 사회체제 질서는 유교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신 하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연장자는 연하자보다 절대적으로 위에 서는 것 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유교의 기본개념입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 통치 자권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절대복종을 전제로 하는 사고입 니다.

두번째, 우리 사고의 기저에 영향을 미친 것은 농경문화입니다. 농경문 화는 유목문화에 대칭됩니다. 농경문화는 정착해서 하늘의 혜택을 바라고 사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몬순지대에 살고 있죠. 한 곳에 정착해서 타력(하 늘의 혜택)에 의존해 사는 이러한 생활권의 영향으로, 우리는 소탈하고, 부 드럽고, 타협이 뒤따릅니다. 또 정착해서 살기 때문에 비합리적일 정도의 융통성이 있고 수동적이고, 봉쇄적이고, 계보적으로 승계해 내려가는 삶과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농경문화의 영향은 기 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인 의식구조를 갖게 만듭니다.

세번째는 한국정치사로부터 오는 영향입니다. 한국정치역사는 불안과 위 축의 역사라고 봅니다. 외침(外侵)의 연속, 국민과 관계없는 내치(內治)의 역사입니다. 통일신라 이후 900여 차례의 외침을 경험한 우리의 견지에서 볼 때, 흔히 교과서에서 말하는 은근과 끈기는 우리가 생존해갈 수 있었던 전략이자 지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치에서 선정(善政)은 예외적인 현 상이었습니다. 조선조왕 27명 중 성군(聖君)은 10명 이내였습니다. 옛날에 는 정치인이 없었습니다. 관원만 있었죠. 관료가 곧 정치인이었습니다. 관 의 태도는 공격적이고 가학적이었죠. 가렴주구가 거의 당연시되고, 가렴주 구 안 하는 사람은 무조건 지배복종시키는 체제였습니다. 이른바 민중들은 이것에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안, 좌절, 실망의 연속이 었습니다. 도피의 메커니즘에 빠졌던, 마조히스트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가 학적인 관원과 피학적인 민중이라고까지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네번째 영향은 전통적인 종교인 샤머니즘 무당주의였습니다. 샤머니즘이 란 신통력을 갖고 재화구복의 능력을 가진, 특정한 인격체인 샤먼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샤머니즘은 불교, 기독교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대중최면, 안수 등은 샤머니즘적 현상이고, 고승 등은 역술가 점쟁이입니 다. 종교의 본래 목적에서 일탈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왜 그런가? 전통의식구조가 샤머니즘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뿐 만 아니라 정치지도자에 대한 기대도 그렇습니다. 김영삼 하면 샤먼으로 봅니다. 김대중도 같습니다. 우리는 정치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샤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간 이러한 샤머니즘이 한국정치의식에 영 향을 미쳐서 권위주의와 독재가 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태시켰습니다.

다섯번째, 수입된 서양문화가 있습니다. 서양문화는 곧 기독교문화이고, 또 자유, 평등, 권리의 개념들이 담기는데, 우리에게 습관화되어 있지 않 는 개념은 평등개념입니다. 기독교사상의 평등당위론은 우리에게는 처음 다가온 사고였습니다. 수평적인 관계인 기독교에 반해 우리는 수직적 인간 관계로 봅니다. 사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세미나는 가능하지 않다고 봅 니다. 세미나를 하려면 반론이 있어야 하는데, 권위있는 학자에게 젊은 학 자가 반론하기 어렵습니다. 정당에서도 그러합니다. 정당의 구조에서 단일 지도구조가 맞지 집단지도체제가 안 맞습니다. 최고위원들이 9명, 10명 있 어선 안 됩니다. 수평적 관계는 습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한국은 담 뱃값도 차등되어 있습니다. 몸의 부위도 차등을 둡니다. 저는 이런 다섯 가 지 사고가 우리 사고의 기저에 융합, 조합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 정치의식구조에는 일곱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민족주의, 권위주 의, 명분주의, 배타주의, 편협성, 유동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감상적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첫번째, 한국인은 민족주의적입니다. 당연합니다. 단일민족으로 오랜 통 일된 사회를 가졌고, 외침 속에 똘똘 뭉쳤습니다. 한국인은 민족공동체의 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표현보다 '우리'라는 표현을 더 잘 씁니다. 우리와 남의 구별도 강합니다. 그런데 정치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가 해방 후에는 땅바닥으로 떨어져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왜 잠재화되어 있었는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김구, 김규식을 포함한 민족주의자들이 거세되어서 민족주의를 들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정권유지가 외세 의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면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셋째는 남북 모두가 통일지향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 다. 민족주의가 강하다 보면 한민족은 뭉쳐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생겨 나기 마련이죠.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지하에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것이 70년대에 들어와 대학, 지성인, 민중에 의해 햇빛을 볼 수 있었고, 민 족주의는 민주화에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흐르지 않는 한, 세계화와 국제화에 배치되지 않는 한, 아직도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면서 자립경제, 자주외교, 자주국방을 하는 데, 민주화가 뿌리 내리는 데 대치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두번째, 권위주의가 강합니다. 농경문화, 샤머니즘, 유교문화, 불안과 위축의 정치사로부터 권위주의가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자들은 한국 정치의 권위주의를 두고 순종형 정치문화라고 합니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민주화를 위해 배제시켜야 합니다.

세번째, 명분주의가 강합니다. 동양 3국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정치는 명분의 정치다'라고도 합니다. 또 정치인 중 존경받는 사람은 명분의 정치인입니다. 어떤 학자는 행정의 형식주의 등을 말하기도 했지만 개념을 잡기는 어렵습니다. 대체로 원칙적인 것을 좋아하고, 수정가능성, 타협가능성이 대단히 적은 것이 명분주의의 특성입 니다. 이러한 명분주의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을 좋아하고, 원만하고 종 용적인 것을 선택합니다. 영의정에는 인물이 없다는 말도 그 얘기와 통합 니다. 성과있는 행동이나 성실성은 저 뒤로 갑니다. 사람이 좋다는 말도 이 와 일맥상통합니다. 명분주의만 살리는 정치는 안 됩니다. 실용주의적 노 선이 들어와야 합니다. 타협과 대화를 통한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데, 이렇게 되려면 실용주 의노선을 가미해야 합니다.

네번째, 배타주의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심합니다. 남북관계도 적대 적이고, 여야관계도 그렇습니다. 왜? 한국인은 대가족, 자연부락 중심의 사고여서 그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살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배타성도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감상주의입니다. 인정이 많기 때문에 감상주의에 곧잘 빠집니다. 친한 사람은 봐주어야 되고, 이래서 책임추궁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20 만 명이 이승만을 울면서 보낸 것도 그 한 예입니다. 박정희 죽은 뒤 한 해 6백만 명이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감상적입니다. 원칙 이 없이 판단이 흐려집니다.

여섯번째, 편협주의입니다. 지연, 학연, 문벌, 족벌 따지는 게 심합니 다. 다른 나라도 그렇기는 하나 한국은 좀더 심합니다. 예를 들면 난상 선 생이 56년 선거에 출마했을 때 "김해 김씨가 7백만이요"했다는데, 이런 풍 토는 고쳐져야 합니다. 학교도 그렇습니다. 지역감정이요? 이런 것도 여러 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고정관념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한국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곳도 없습니다. 흑인들을 짐승 취급합니다. 반 성해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대단히 유동적입니다. 어쨌든 권위주의, 명분주의, 배타주 의, 감상주의, 편협주의, 이 다섯 가지는 수정, 보완, 배제시켜야 한국 민 주주의가 깊게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한국의 2000년대의 정치는 다섯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우선 민족주의를 정치적 지주로 삼는 정치,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는 정 치, 통일로 지향하는 정치, 세계화와 국제화를 부흥 선도하는 정치, 정보 사회와 후기산업사회에 맞춰가는 정치입니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는 데는 단기적 과제와 장기적 과제가 있다고 봅니 다. 장기적 과제란 위에 이야기한 우리의 잘못된 의식구조를 개선해 가는 것입니다. 단기적 과제로는 첫째, 과거청산이 있습니다. 비민주적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입니다. 김영삼 씨가 잘해야 하는데,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 다. 둘째, 비민주적 법률제도를 민주적으로 바꾸어 가는 것인데, 그 중 제 일 중요한 것은 정권교체입니다. 아직 제대로의 민주적인 정권교체의 전통 까지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 국민이 아직 민주주의에 대해 훈련이 되 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의식구조의 파행을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차원의 문제 만은 아닙니다. 정치, 사회, 종교 지도자가 각성해 국민을 계도해서 제대 로 된 의식구조를 갖게끔 했을 때, 우리 후손들은 참다운 민주사회에서 살 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과 제가 함께 노력합시다. 감 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