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신익희(申翼熙) 선생님이 창립하시고 김성곤(金成坤) 선생이 이어받으신 뿌리깊은 대학의 목요강좌에 제가 초대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대학 안에까지 들어오기는 처음이지만, 가끔 북한산 산책하다가 학교로 향한 오르막길을 체육부 학생들이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젊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소개하시는 이일환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지금의 우리가 가치관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염려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신익희(申翼熙) 선생님이 창립하시고 김성곤(金成坤) 선생이 이어받으신 뿌리깊은 대학의 목요강좌에 제가 초대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민대학 안에까지 들어오기는 처음이지만, 가끔 북한산 산책하다가 학교로 향한 오르막길을 체육부 학생들이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젊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소개하시는 이일환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지금의 우리가 가치관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염려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올해는 광복 50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압제로부터 해방된 지 50년인 해입니다. 이 자리의 앞자리에 계신 교수님들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저처럼 일제치하에서 살아왔던 사람으로 50년 전을 회고할 때 해방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해방의 기쁨을 맛본 것은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가서 동경 아래에 조그만 섬들이 많은데 그 중 유황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도라는 섬에서였습니다. 마침 그 날 해방을 맞이하는 그 시간 학병들끼리 모여서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모두가 껴안고 만세를 부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엔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해방되는 날 피워보니 머리가 어지럽지도 않고 해서 그 이후 술 담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전 담배가 저 자신에 육체적으로 해롭다는 것을 알고 끊게 되었습니다. 담배 끊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끊는 것'입니다.)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지 못한 채 우리는 미·소 양 강대국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도 이 시간까지 남북분단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남북 분할 점령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남북분단으로 고착되었고 마침내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해방 50년, 분단 50년의 오늘날 우리 모두 통일을 갈망하지만 '어떻게 하면 통일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하는 통일의 길을 모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고 가장 부끄러운 일이며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남북이 합쳐 하나가 된다면 지금이라도 남북 칠천만 동포가 힘을 합쳐 세계 굴지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이치가 뻔한데, 지금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5천 년 동안 같은 피를 나누고 살아왔으면서도 마치 원수처럼 총칼을 겨누고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의 실정이 홍수피해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듣고도 우리가 효과적으로 도와줄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을 만큼 우리 사이가 이렇게 벌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 남한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서울을 비롯해 대부분이 황폐화되었었고, 그것을 경제적으로 만회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불안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유당 시대의 이승만 독재정권시대, 4·19혁명, 6·3사태, 10월유신, 10·26사태, 12·12사태, 그리고 80년대의 5·18광주민주화항쟁, 6·10항쟁, 6·29선언, 이렇게 지나온 30년 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많은 정치적 불안을 느끼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갈등, 고통을 겪었습니다. 국민이 끈질기게 꾸준히 고통을 겪으면서도 헌신적으로 노력했고, 투쟁하고 희생도 겪고 해서 아직도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민주주의적인 문민정부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정치적 발전을 이룩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악조건들 속에서 아까 말했듯 부존자원도 없고 인구도 많고 땅도 좁은 상황, 그리고 정치적 불안도 계속 있었던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모두가 다 부지런히 일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오늘날 국민소득 1만 달러에 국민총생산이 우리보다 더 큰 나라인 러시아보다 높고, 무역도 세계 10위 안에 들고 있습니다. 젊은 학생들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당연한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옛날을 생각할 때, 왜정 때를 생각할 때, 이것은 엄청난 성취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그 때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5천 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군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투신을 하고 목숨을 걸고 민족의 자존을 위해 힘썼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들, 그런 한국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세계인은 별로 없었습니다.
해방되고 얼마 후에 미군들을 만나게 됐을 때, 미군들을 보며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말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몰라서 지도를 그려주며 설명을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고, 다음 독일에서 한 5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당신은 한국인이요?'하고 물어보는 경우는 세 번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당신은 중국사람이요?'하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일본사람이요?'하고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뿐더러 20 몇 년 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부속국민학교에 가서 교장신부에게서 소개를 받고 1학년 아이들에게 한국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를 물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고, 2학년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얼굴을 보니 동양인이었는데, 가까이 가니 그는 한국인이었어요. 3학년 학생들에게 한국을 아느냐 했을 때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한 명이 2학년 한국학생의 형이었는데, 한국에서 온 것을 밝히길 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4학년에서 8학년까지 올라갈수록 거의 한국학생이 없었는데, 그 중 한국을 안다는 학생에게 세계지도에서 한국 위치를 짚어보라 했을 때 알지를 못했습니다. 일본, 중국은 그 위치를 잘 알면서 한국의 위치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시아의 나라들,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을 잘 알면서 한국은 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서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저희가 설립한 동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미국뿐 아니라 미국의 각 도시에 대해 다 잘 알기 때문에 그 반대로 미국도 우리를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20년 전의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모르겠습니다.
지도상에는 그려져 있지만, 그것이 한국이라는 것도 모르고, 한국인이 5천 년 간의 오랜 역사를 가진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던 것도 세계는 모릅니다. 그런 처지에 있던 우리나라가 오늘 이만큼 우리 나름대로 반쪽에 불과하지만 민주국가로서의 기틀을 이룩하고 경제적으로 이만한 위치,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는 시점에서 아직 문화적으로 세계에서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하고, 노벨상을 탄 사람도 없지만, 음악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인 트리오도 있고, 또 스포츠는 세계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어 아무튼 우리는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60년대 우리나라는 GNP면에서 필리핀에도 떨어졌었고, 문화적으로도 후진국으로 평가되었으며, 중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보다도 뒤처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경제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자랑스러울 만큼 한국인은 끈기가 있고 어려움도 시련도 이겨내는 지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은 누군가, 한국사람들은 어떠한가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점에서 자랑만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2∼3년 동안 짧은 기간에, 우리가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시기에, 너무도 끔찍한 대형사고가 잇따라 터져 많은 인명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열차 전복 사고, 서해 훼리 침몰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행주·성수대교 붕괴, 서울·대구 도시가스 폭발사고 그리고 최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사고가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것입니다. 대구 도시가스 폭발시에 구라파 여행중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불란서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독일신문에 도시가스 폭발사고 제호로 "사람의 부주의와 태만에서 일어난 사고"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안전관리에 손을 썼다면, 인명존중의 마음에서 그런 위험에 미리미리 대처했더라면, 그런 사고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아쉬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삼풍 붕괴사고는 너무나 안타까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사고였습니다. 서울 제일의 최고급 백화점이 일시에 무너졌다는, 그리고 1천여 명의 인명이 희생됐다는 것이 말입니다.
신문을 보니 이렇게 사고가 나기 전에 사고를 예측케 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 발생했는데도 대피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상황에 대해 쓰여 있었습니다. 제때 대피의 조치만이라도 취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고는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온 세계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사고의 나라, 집도 다리도 길도 안심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는가! 우리는 어떤 가치관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이런 사고를 일으키게 했는가, 참으로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많은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화내빈(外華內貧) 또는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사고를 일으키게 했는가? 이러한 사고들을 죽 지켜볼 때 인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국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일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일으킨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물질적인 발전이 화려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 당시 백화점 주인은 검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재산인 백화점이 무너지는데, 백화점이 무너질 줄 알았다면 미리 막지 않았겠느냐라는 백화점 주인의 이 말은 그 붕괴는 고의로 일으킨 게 아니라는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일순간에 전재산이 날아갈 줄 알았다면 집을 허술하게 짓지 않았겠죠.
그러나 여기에 어떤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1천여 명의 희생이 난 시점에서 자기 재산의 손실을 먼저 따지는 데에 비애가 느껴집니다. 문제는 첫째 집을 잘못 지은 데 있는데, 우리 건축기술이 지은 싱가포르의 한 건축물은 훌륭합니다. 외국에 나가선 훌륭한 기술을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렇지가 못할까요? 우리의 건축이 설계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것인지?
독일사람들은 세 가지 국민성을 자랑합니다. 질서, 부지런함, 철두철미함.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울러 건물을 짓는 데 준공검사, 용도변경검사 등의 과정에서 얽힌 행정의 부패가 심각하고 극명하게 일어났습니다. 결국 기업주, 건설업체, 행정관청 공무원들에게 필요한 가치관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더 넓게 말하면, 그 모든 것을 내포하는,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에 기본적인 가치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약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세계와 국제무대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는가. 세계 선진국을 상대로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제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정직과 성실의 결핍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좀더 정직 성실했다면, 모든 점에서 기업주도 설계자도 공무원도 성실과 정직이 그 바탕이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국제화, 세계화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물론 하이테크 첨단기술이 앞서야 하고 자본의 힘도 있어야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앞서야 할 것은 정직과 성실입니다. 정직과 성실이 한국의 정신적인 기초가 되어 있다면, 그래서 세계사람들이 이렇게 인정하게 된다면, 이것은 세계경쟁에서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우리를 믿어주고 우리의 상품을 믿어줄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너무나 부족하지 않았는가 반성이 됩니다. 결국 정직과 성실이 없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물질위주, 황금만능주의를 낳았고, 그래서 돈이 제일인 사회를 만들어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그 안에서 인간부재의 전도된 가치관을 낳았고, 그것이 그런 엄청난 인재로 인한 붕괴사고를 연발시킨 것입니다. 돈이 앞서고 인간이 잊혀진 사회, 이른바 한국병이라는 부정부패로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깊이 병들어 있는 그런 나라,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나라이고 우리 자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되었는가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서두에 말씀드린 버나드 쇼와 정신박약자 두 사람이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파손·침몰하여 두 사람만이 바다에 떠 있게 되었는데, 구명대는 하나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 때 쇼만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정신박약자는 아무런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쇼는 살아서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박약자는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로 쇼가 살아야 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쇼는 그 상황에서 판단할 수 있는 자로서 판단력을 가진 그 사람이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킨다면 그는 그 행위 자체로써,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친 그 행위 자체로 자신이 쓴 모든 글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쇼가 희생이 되어서 정신박약자를 살려낸다면, 그 행위 자체가 지금까지 그 사람이 글로써 말한 휴머니즘과 인간애를 현실로 증명해 주는 행위가 되면, 그 행위, 그 사랑은 큰 사랑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벗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친 사랑이고, 이기적인 인간사회에 참으로 참된 이웃 사랑의 등불을 밝히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치관 중에서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저는 아까 손을 든 분들이 어느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정말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전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일종의 엘리트사회 지향이지요. 그러나 약자의 생명을 짓밟고 일어선 쇼의 인생관은 무엇이겠습니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한 자는 사회발전에 구체적으로 이바지를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자이므로 도태되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면 병약자, 불구자 등 약자들은 제거돼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신 건강한 자, 국위선양 할 수 있는 자, 과학자, 기술자, 경제가, 재벌, 돈 있는 사람, 힘있는 사람이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일 것이고 약자는 죽고 강자만 살아 남는 사회, 즉 약육강식의 사회에 극도로 이기적인 사회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가 추구하는 문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문명사회, 그곳에 인간다움은 없습니다. 타고난 두뇌와 지성은 있어도 마음과 정신은 없을 것입니다. 남녀관계, 인간관계에서 성애는 있어도 참으로 인간다운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혼이 없는, 마음이 메마른 사회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이 실제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역사가 현대에 있었습니다.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이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치즘에 의하면 아리안족처럼 우수한 민족만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非)아리안족, 즉 유대인들을 6백만 명이나 살해했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고 나치즘의 이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집단들은 같은 민족이라도 정신병자, 정신박약자, 유전병자 등 불구자까지 무수히 집단적으로 가스실로 보내든지 제거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본 영화〈홀로코스트〉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 아무도 나치즘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도 우수한 사람을 만들자는 것은 좋은 이론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받아 우수한 사람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우생학적 입장은 인간에 대한 가치판단을 생물학적인 우열에 두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우수한 것이 참인간의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면, 그렇지 못한 인간에 대한 관념은 저능아, 병약자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인간대접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일텐데, 그런 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 장애자, 관심을 써줘야 할 자의 설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우리 사회는 장애자를 잘 받아들이는 사회인가요? 여러분들 가끔 신문을 보면, 우리 사회가 장애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회복지시설이 들어서게 되면 동네 이웃들이 나서서 반대 데모를 합니다. 신부님 중의 한 분이 장애자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 분이 남북장애인 걷기운동을 제안해서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북쪽에서 반응이 없어서 하지 못했습니다. 북쪽에는 장애인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요.
우리나라에는 통상 4백만의 장애인이 있다고 봅니다. 이 신부님이 좀 무리한 일을 추진해서 남한의 장애인들만 데리고 한라산에서 임진각까지 열흘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임진각에서 마지막 감사미사를 드릴 때, 장애인들이 너무 힘들게 보여 신부에게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대답은 이랬습니다. "북쪽에선 아무 반응도 없는데, 제가 이렇게 추기경님 보시기에 미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애인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장애인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이 신부님 말씀은 옳은 말씀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위해 집을 구하려 해도 장애인을 이유로 방을 주지 않는 실정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장애인을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언제 우리가 참인간이 되는가? 장애인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웃으로 받아들일 줄 알 때, 우리는 참인간이 됩니다. 장애인들은 결코 동정을 바라지 않습니다. 장애인들의 주장은 우리도 인간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접받기를 바라는 겁니다. 장애인으로 사회에서 살 수 있게 정치나 경제가 바뀌길 바란다고 말한답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장애인들을 같은 이웃으로 인간으로 받아들일 그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이 인간이 되고, 우리 사회가 인간적인 사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국민소득이 높고 아무리 번드르르한 집을 짓고 자동차 수출이 많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배척하고 약한 자를 돌봐주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다운 문명사회라고 우리 스스로 자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약자 경시는 인간 경시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급기야 그것은 약자로 될 위험이 있어 보이는 것은 진작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관념, 주장을 나오게끔 한다라고.
실제로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이 주장이 현실화되고 여러 나라에서 제도로서 그것이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임신중절법, 낙태허용법입니다. 이 법은 우생학적 입장뿐 아니라 부모가 원치 않을 때는 태아를 없애도 좋다는 법입니다. 특별히 인구조절에 있어, 인구조절의 최선책은 낙태밖에 없다라고 보는 것이 그 방면의 전문가들의 의견이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알게 모르게 절대다수가 여기에 동조하든지 또는 적어도 적극적인 반대의 입장에 서질 않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태아도 분명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제 자신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는가 하면 제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을 때부터가 아니고 임신에서부터 제 생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임신 후 삼 개월이 되면 인체구조가 다 갖추어져, 이를 낙태수술하려면 머리를 깨고 팔다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지나친 표현인지 모르지만 능지처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인구조절을 위해서?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자식을 죽였다? 그 결과 그래야만 경제가 발전하고 그래야만 우리가 문명사회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 생명들을 수없이 죽이는 그런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인가? 국가의 정책수립자 입장에서 이런 방법이라도 써야만 하는가?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황폐화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아기를 메스로 잘라 달라고 하는 어머니는 그 수술과 함께 어머니다운 사랑까지 도려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것을 아시는지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1년에 알게 모르게 죽어가는 태아의 수가 얼마인지 짐작이나 하십니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많습니다. 150만에서 200만입니다. 인구가 훨씬 많은 미국도 150만 정도입니다. 전세계적으로 1천만이 훨씬 넘겠지요. 나치에 의해 유대 6백만 명이 희생된 때에는 온 세상이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 생명의 학살에 대해서 세계가 분노는커녕 동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 생명은 그만두고라도 위의 북한산의 나무가 다 죽었다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 안에서 매일같이 나무가 아닌 인간이 죽어가는데 우린 아무도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생명을 이 세상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으로 봅니다.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하십니다. 인간생명은 들의 백합보다도 더 존귀합니다. 하늘의 별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들에 백합이 많다고, 하늘에 별이 많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기엔 아름다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세상은 아이들이 너무 많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박약자를 죽이고 쇼가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은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서 사랑을 모조리 앗아갈 것입니다. 미래를 창조할 힘을 가질 아이들을 없애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다시 우리 자신은 어떤 가치관에서 살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의 미래의 주인공이 될 여러분들은 어떤 가치관에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도 느끼고 많은 사회학자들이 말하듯 세계는 분명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인간적인 인간이 되는냐 동물적인 인간이 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기계적인 인간이 되느냐, 사람이냐 돈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중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가 갈구하는 것은 인간다운 사회일 것입니다. 그리고 참사랑을 갈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슬퍼하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아쉽다, 진실한 사랑은 없는가 하고 묻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러분이 바라는 미래는 참으로 인간다운 정신과 사랑이 가득 찬 미래입니다. 저는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이런 미래를 위해서 진리와 사랑, 자기희생의 사랑을 찾으시길 바라며, 그 진리와 사랑의 정신으로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두서없는 말씀 너무 길게 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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