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이빨을 뽑았죠. 평생 옥수수죽만 먹고 살아도 사랑만 얻을 수 있으면 된다기에. 이빨 빠진 사자를 보고 농부가 이런 얘기를 해요. “자네 그 발톱 말이야. 어디 꽃 같은 처녀의 가슴에 낭만을 심을 수 있겠나.” 사랑에 눈 먼 사자는 발톱도 뽑았어요. 그 사자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농부는 야성을 잃어버린 사자를 사위로 삼은 것이 아니라 몽둥이로 패서 내쫓았어요. 농부의 딸을 사랑한 사자의 우화가 기록된 이유는 명확해요. 사랑이 맹목이 되면 그 사랑도 지키기 어렵다는 거죠. 생각해 보면 딱 맞는 말이에요. 자기의 장점을 사랑 때문에 버렸는데 장점을 버리고 나니 사랑도 지키기 힘들다는 아주 명확한 교훈을 주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교훈이 사실은 첫사랑이 깨지는 이유와 연결돼 있죠. 첫사랑이 몇 살 때였어요? 제 조카는 열 네 살인데 자기는 네 살 때 첫사랑을 했다고 주장해요. 네 살 때 유아원 다닐 때 7살인 한 아이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했대요. 사랑이란 말에는 울림이 별로 없어도 첫사랑이라는 말에는 울림이 있죠. 그 첫사랑이 대부분 깨지는 이유는 열정만 있지 그것을 지켜나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 우화가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 맹목이 되면 그 사랑을 지키기 어렵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바로 서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우화가 어떤 교훈만 주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마음을 끈다는 것입니다. 그 끌림은 사자의 순수한 마음 때문에 생긴 거예요. 순수에 감염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순수에는 아주 무서운 독성이 있어요. 그 독성에 한번 감염되면 자기 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결심하게 되죠. 오히려 생을 못 바쳐 아까울 뿐이죠. 사실 사자의 선택은 상당히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선택이었어요. 아름다운 것 속에 어리석은 것이 안 들어 있으면 우린 그걸 보통 영악하다고 하지 아름답다고 하지 않아요. 어리석음은 대개 순수에서 나오는 거예요. 맹목으로 약해지고 초라해져도 언제나 순수한 힘. 그것이 감성의 힘이고 여성적인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힘이고 요즘 서구에서 되돌아보는 힘이기도 합니다.
여성적인 힘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남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입니다. 우리가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을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성적인 힘은 대체로 목적 지향적인 힘이죠. 또한 권력을 꿈꾸는 힘이에요. 일반적으로 여성적인 힘은 관계 지향적인 힘이에요. 권력의 통제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에요. 그리고 순수와 사랑을 지향하는 힘이지요. 물론 남성이 여성적일 수 있고 여성이 남성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적이죠. 그들은 대개 여성적이라는 말을 굉장히 듣기 싫어해요.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남성들은 대개 자신이 로맨틱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해요. 그런데 그 동안 사회가 너무 남성적인 힘, 경쟁과 지배, 합리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이 너무 지쳐 버렸어요. 이제는 여성적인 힘을 살리는 것이 시대적인 조류가 되었어요. 물론, 여성적인 힘을 강조한다고 해서 남성적인 힘이 악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남성적인 힘만이 지배해 온 세상은 균형을 잃어버린 세상이고 균형이 맞지 않는 자체가 악이라는 얘기죠.
여성 속에 남성이 있고 남성 속에도 여성이 있다는 칼 융의 학설은 다 아실 겁니다. 이 사회가 남성은 남성적으로 커야 하고 여성은 여성적으로 커야 한다고 가르칠 때 남성의 경우 여성성이 억압되고 여성의 경우 남성성이 억압되기 마련입니다. 다른 예로,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드클리프’를 보세요. 상당히 폭력적이고 잔인하죠. 여주인공 ‘캐더린’과 헤어지게 만든 모든 것에 대해 마치 악마와 같은 복수를 하잖아요. 굉장히 지독한 남성성을 뿜어대는데 그 소설은 여성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가 썼지요. 반대로 남성 작가들이 그려내는 여성은 실제와 잘 맞지 않아요. 여성은 없고 어머니만 있죠. 극단적인 남성성만 추구하며 살다 보니까 자기 속에 여성성이 억압된 거지요.
사람들은 여성적인 것이 나약하다는 이유로 박해했어요. 간디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었죠. 그건 여성적인 운동이에요. 남성적인 운동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서 펼치는 행동 같은 것이죠. 빈 라덴이 하는 것도 같은 운동이에요. 이슬람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빈 라덴의 손을 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무고한 민간인을 무수히 해치는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남성적인 운동의 한계예요. 반면에 여성적인 운동은 그렇지 않아요.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얼마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중국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는데, 세계의 지성인 천 명이 아무 이해관계 없이 비행기를 타고 가서 동참을 해 줬어요. 비폭력 평화 운동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여성적인 운동은 사람들을 모으기가 참 좋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 지향적인 운동이기 때문이지요.
테레사 수녀 같은 분을 보세요. 그 분의 기도문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나는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을 바라볼 뿐입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한 사람을 통해 세계 전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결국 위대한 사랑이지요. 남성은 뭐라고 하나요? ‘나를 세계의 대표로 뽑아 달라. 그러면 내가 세계를 구원하겠다.’ ‘나는 우주소년 아톰이 되겠다.’ ‘독수리 5형제가 되겠다.’ ‘나도 영웅이 되어 세상을 정의로 재판하겠다.’ 이런 식으로 말하죠? 여성적인 건 안 그래요.
이번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어요.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있죠. 무한 경쟁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더군다나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세계의 절반을 지지해 주던 이념이 무너지니 자본주의를 견제할 체제가 없는 거죠. 자본주의의 독주가 시작되면서 모두가 부의 축적을 위해 끝도 없이 경쟁하게 되었어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에는 이런 모습이 그려져 있죠. 애벌레들끼리 어딘가를 높이 올라가려고 경쟁하는데 그 때 아래에 있던 애벌레가 위에 있던 애벌레에게 물어봐요. “거기 왜 올라가니?” 위에 있던 애벌레가 하는 말이, “몰라. 다른 애벌레들이 올라가잖아.” 서로 짓밟고 짓밟히면서 올라가는데도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면서 질문도 잘 안 해요. 그건 반성하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화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이렇죠? 여러분들은 산이 많고 인구에 비해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는 골프가 안 맞는 스포츠라는 걸 아실 거예요. 그게 환경 친화적인 스포츠도 아니죠. 그런데 박세리가 미국에 가서 우승하고 난 뒤에 난리가 났죠. 수많은 학부형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을 골프 교실 같은 데에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다고 다 박세리처럼 성공할까요? 아이들에게 무조건 야구만 시킨다고 다 박찬호처럼 되나요? 한 명의 박찬호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십 만 명의 박찬호가 울어야 돼요. 그렇죠? 마찬가지로 한 명의 박세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십 만 명의 박세리가 울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십만 명에 속하기가 쉽지 한 명에 속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한 사람만 주목하고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은 잊어버리잖아요. 그 한 사람을 위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남성적인 힘이 필요해요. 그 힘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살아온 거예요. 그것만 강조하는 사회는 정말 징그러운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2000년이 오면 마치 세상이 달라질 것 같이 호들갑을 떨던 1999년 12월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거예요. 외국계 은행의 명동 지점장이 자살했었죠. 36세의 한국 사람이었어요. 그는 33세에 자기 실력으로 은행 지점장까지 올라간 사람이에요. 무한 경쟁 체제에서 이겼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외국계 은행의 명동 지점장이 될 수 있었죠. 그는 말하자면 젊은이들이 지향하는 모델이었어요. 대학을 나온 후 자기 능력을 키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거든요. 실력도 있고 명예도 있고 그에 걸맞게 돈도 많았고요. 그가 남긴 유서에 의하면 그에게는 건강도 경쟁력이기 때문에 매일 새벽 6시에 헬스클럽에 갔답니다. 그리고 일곱 시에 출근해서 일곱시 십분이면 회의를 소집했대요. 하루에 한 시간 잔적도 허다하대요. 은행을 위해 자기 삶을 다 바친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건 뭐가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공한 사람이라면 사는 게 행복해야 할 텐데 자살을 하다니요? 하루에 한 시간 잔 적이 허다했다면 말 다한 거지요. 저는 잠을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스타일입니다. 제가 제일 신경 쓰는 게 잠이에요.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지고 옆 사람들까지도 불안하게 하지요. 어떤 책에 보면 현대 문명은 잠 도둑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현대인은 잠을 빼앗긴 채 과중한 일을 해 나간다는 얘기지요. 인간이 모든 동물들 중에 제일 일을 많이 한대요. 하루 네 시간 이상 일하는 동물이 없대요. 잠도 빼앗기고 바쁘게 살면서 성공을 인생의 유일한 자랑으로 삼는 그런 가난한 인생을 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고 그 여유는 배워야 돼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아시죠? 서구의 명문 고등학교가 배경입니다. 전인교육을 안 시키는 학교가 명문 고등학교죠. 왜냐하면 학생들을 명문 대학에 많이 보내야 하니까. 그런데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이에요. 명문 대학을 갈 수 있는 능력만 개발하다 보니까 다른 부분의 능력은 죽일 수밖에 없지요.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그 명문 고등학교 출신이에요. 그들의 사진들을 학교의 한 방에다 모아 걸어 놨어요. 학교에서 그 방을 만든 이유는 분명하죠. ‘봐라. 선배들이 이렇게 훌륭하다. 너희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이 선배들처럼 될 수 있다.’ 그런데 키팅 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그 방에 들어가잖아요. ‘자 봐라. 이 학교의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다 죽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다 죽는다.’라고 말하지요? 이렇듯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기에도 일생은 부족해요. 요즘은 다들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고 난리예요. 그런데 창의력이 어떻게 생겨요? 아무리 열심히 관찰하며 외운다고 창의력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자연스런 관심에서 생기죠. 어떤 일을 사랑하게 되면 그 일을 하다가 생기는 어떤 어려움도 행복하게 이겨내요. 키팅 선생이 말합니다. ‘인생을 즐겨라.’ 인생은 한 번 뿐이니까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뜻이겠죠. 즐겁게 살려면 여유를 가지면서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아침에 천천히 명상을 한다든지 조용히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아요. 지금은 다들 너무 급하고 너무 각박하고 너무 예민해져 있어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참 많은 여행을 했어요. 전국 각지에 사는 친구들을 다 만나고 돌아오는 데 십 일이 걸렸어요. 저는 크리스찬이지만 사찰을 좋아해서 산마다 사찰을 많이 찾아 다녔어요. 그 때에 우리나라 산신각에도 애정을 갖게 되었죠. 산신들은 산마다 달라요. 거기에 얽힌 많은 설화들이 있지요. 고되게 여행하며 마을 주민들을 통해 설화를 듣고 우리 것을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요즘 우리는 여행을 어떻게 가지요? 비행기 타고 갔다가 콘도에 짐 풀고 2박 3일 고스톱만 치다가 와요. 사진을 뽑아 봐야 어디 다녀온 줄 알죠. 차로 가더라도 막힐 때 가면 도로에 서 있다 왔다는 느낌만 남아요.
느림에 익숙해지면 보이는 게 굉장히 많아요. 목표 지향적으로 살면서 성공 하나를 얻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어요. 여유를 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유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해요. 많은 것을 가지면 풍요로워 보이죠? 사실은 사는 게 더 각박해져요. 큰 아파트에 살기 위해선, 고급차를 타기 위해선, 고급 의상을 입기 위해선, 골프를 치기 위해선, 돈이 상당히 많이 들죠. 그것을 얻기 위해선 그야말로 무한 경쟁에 길들어져야 해요. 정신없이 바쁘게 되고 바쁘다는 것이 유일한 자기 삶의 내용이 돼요. 사실 인생의 자유는 더 많은 필요를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있잖아요. 이는 법정 스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기도 해요.
영국의 런던 대학에서 세계 54개국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한 보고서가 나왔어요. 이 결과가 상당히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순서로 따지니 1위가 방글라데시였어요. 2위가 나이지리아, 3위가 인도. 하위권에 미국, 일본, 독일, 스위스, 프랑스, 영국이 들어 있었어요. 희한하지요?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알고 있는 나라에선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만큼 적고 또 그 나라들에선 자살율이 높지요. 선진국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대요.
몇 년 전 쿠알라룸푸르에 다녀와서 느낀 일입니다. 특급호텔에서 묵는데 5만원 정도 들어요. 밖에서 식사를 푸짐하게 먹었는데 2천원이 안돼요. 그 나라 사람들은 여럿이 어울려 저녁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저녁 식사를 해요. 우리도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는 마실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지요? 바로 그 분위기예요.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분위기였어요. 따뜻하고 흥겨웠어요. 다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는데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한 나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한번은 영국을 갔었는데 여관에만 묵어도 20만 원 정도 돈이 들었어요. 런던은 굉장히 물가가 비쌌어요. 택시를 한번 타더라도 7만 원이었어요. 또 그 나라 사람들은 시간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불쑥 찾아가면 안 되고 미리 다 약속을 잡아야 해요. 다시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내가 부자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를 알겠죠? 거기엔 여유가 있고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얼마만한 땅이 필요한가를 묻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있어요. 하느님이 한 사람에게 말뚝을 박는 만큼 땅을 주겠다고 하니 이 사람은 욕심이 나서 끝도 없이 걸어 나가 말뚝을 박습니다. 그러다가 죽죠? 죽어서 땅 속에 묻히는데 묻힌 만큼의 땅이 그가 차지한 자리였지요. 많은 철학자들이 권력과 행복과의 관계, 돈과 행복과의 관계, 명예와 행복과의 관계를 숙고하면서 결국 그 둘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는 싱거운 결론을 내려요.
사실 돈이 없으면 주눅 들고 불편하지요. 그러니 돈이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해요. 돈이 많을 때는 구두쇠 노릇 좀 하지 말고 베푸는 걸 배워야죠. 권력도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도 영원하진 안잖아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청와대가 지금 얼마나 욕을 먹고 있나요? 우리나라에선 정권 말기가 되면 힘도 없고 너무 비참해져요.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직업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겠어요? 그러니 권력을 가졌을 때 사람을 내려보지 말고 잘 베풀어야지요. 그 권력으로 비리 안 저지르고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야죠. 마찬가지로 명예가 있을 때에도 그 명예를 가지고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는가 고민해야죠. 옛날 영국에서는 전쟁 나면 귀족들이 제일 먼저 자기 아들을 군대에 보냈잖아요. 없을 때도 주눅들지 않는 것, 있을 때도 무시하지 않는 것, 그렇게 어떤 균형을 잡아주는 힘. 그것이 바로 여성적인 힘이에요.
이러한 여성성을 깨우기 위해서 사랑을 믿어보세요. ‘사랑’, ‘감성’, ‘느림’은 21세기의 화두일 거예요. 사랑은 구호가 아니에요. 사랑하자고 외치는 사람 중에서 정말 사랑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빈 구호는 흡인력이 없어요.
박완서의 소설 중에 ‘미망’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근대 이후부터 해방 직후까지를 배경으로 한 개성상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런 부분이 있어요. 잘 사는 나라의 선교사들이 이 가난한 한반도에 와 보니 기가 막히죠.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겠어요? 옷은 일 년에 춘하추동 네 번 갈아입고, 머리도 아주 가끔씩 감았겠지요. 또 사람들의 온몸에는 이가 살고 집안에는 벼룩, 빈대가 들끓으니 선교사들은 거의 인간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이런 비참한 백성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겠죠. 거기 선교사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나와요. 선교사들은 “하나님, 제가 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은 그 백성들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이죠. 참 기분 나쁜 말입니다.
저는 개성이 너무 다른 동생과 고등학교 때까지 한 방을 썼는데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이상한 소리를 해요. “언니, 나 오늘부터 언니를 사랑하기로 했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물어보니 동생이 그 날 성경을 읽었대요.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써 있더랍니다. 그런데 이게 동생이 한 농담이니까 넘어갔지, 만약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 말을 한 친구와 당장에 원수가 되었겠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기에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아주 화가 날 겁니다. 크리스마스 때나 어린이날이 되어서야 고아원이 북적대잖아요. 그 때가 되어야 정치인들이 혹은 그 사회에서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뭔가 좀 베풀다가 사진을 찍죠. 그런 애정은 받아도 고맙지 않기 마련이에요. 받는 사람의 심정도 헤아려야지요.
사랑을 받는 자가 행복할까요, 사랑을 하는 자가 행복할까요? 일반적인 답은 사랑을 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그 반대일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자가 행복하다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을 줄 때 사람이 성숙해지기 때문이죠.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은 사랑을 키우지 못해요. 제 연구실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요.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 보면 요즘에는 왕자들, 공주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 왕자들의 고민이 뭐냐하면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니?” 하고 제가 물으면 그 왕자는 잘 모르겠다고 얘기해요. 공주들도 마찬가지예요. 받기만 하는 사람은 정신이 크질 않아요. 집안 좋은 아이들이 철이 더디게 드는 것과 같은 이치죠. 돈 많은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은 뭔가 부족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매일 자기한테만 못해준 것처럼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타낼까 고민하기 일쑤예요. 누가 봐도 자녀들의 풍족한 보호막이 되지 못하는 부모를 오히려 아이들은 더 존경하기도 한대요.
공주님도 왕자님도 오로지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하고, 상대방이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으로 상대에게 더 방자해지기만 하지요. 그런데 진정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상대의 작은 변화에 대해서도 아주 민감하죠.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본능적으로 알아채요. 상대가 아프면 그 사람의 마음이 더 아프지요. 상대가 기쁘면 더 기쁩니다. 사랑의 힘은 함께 느끼는 능력이죠. 남을 나로 느끼는 능력이에요. 이건 아주 신비한 능력이에요.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잖아요. 표정부터 달라져요. 태도도 겸손해져요. 겉보기에는 사랑을 하면 강해지기보다 약해지죠. 자기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 생겨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보이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 볼까요?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을 함부로 변경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지금 새만금 개발을 보세요. 새만금 갯벌이 여의도 면적의 140배예요. 엄청난 갯벌을 메워 땅을 만든다면 그것은 대규모 생명 파괴예요. 갯벌을 농토로 바꿔 쌀을 재배한다지요? 지금 쌀이 남아돌더라도 미래를 생각해서 농토를 만들어야 한대요. 그런데 우스운 일은 우리나라에서 매년 새만금 갯벌 면적 절반 이상의 농지가 용도 변경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서는 멀쩡한 갯벌을 7조원 이상의 돈을 들여 농지를 만든다니요? 괴상한 발상이죠. 그래서 지금 국제적으로도 반대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는 세계 5대 갯벌 중의 하나거든요. 독일에 가 보세요. 별로 크지도 않은 갯벌을 막아 놓고 보호 구역이라고 출입을 금지시켰어요.
그런데 몇 달 전에 북미의 인디언들이 새만금에 왔어요. 이들도 상처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 도처의 환경이 파괴되는 곳에 가서 자기들의 전통 노래를 불러요. 그들은 굉장히 넓은 지역에서 살던 부족 사람들이었어요. 130년에서 140년쯤 되는 나무가 즐비한 숲 속에서 연어를 주식으로 살았대요. 그런데 캐나다에서 원목을 채취하느라 그들의 주거지를 무차별적으로 훼손했고 그들은 자기들의 고향에서 쫓겨났지요. 그런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들이 환경이 파괴되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그 부조리를 세계에 호소하는 것이죠. 저도 그 노래를 들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요란한 노래도 아니었어요. 그 노래는 찬송가처럼 따뜻하기도 하고 염불처럼 엄숙하기도 하고 우리 민요처럼 애절하기도 했어요. 그 노래가 바닷바람에 실려 퍼지니 묘한 감동이 일어났어요. 그 소리는 자연에서 나온 소리였어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같이 울었지요, 아무런 이유 없이. 그게 바로 자연에 대한 알 수 없는 사랑이거든요. 그것은 또 자연과 연관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지요. 더 이상의 생명 파괴를 막아야겠다는 힘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에요.
그 사람이 자연을 사랑하건 사람을 사랑하건 관계를 사랑하건 간에 사랑 속에서 인생을 배울 필요가 있어요. 사랑 속에서 인생을 배우면 슬픔과 고통도 사람을 깊이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될 거라고 믿어요.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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