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전통예술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전통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뭘까요? 옛날 것, 낡은 것, 고리타분한 것, 보수적인 것, 뭐 그렇겠지요? 저는 오늘 그런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전통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나라의 집단적 무의식은 유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 핏속에 이어져 내려 온 무의식이 바로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이란 한 민족의 삶이 갖는 형식과 내용을 규정짓는 공통체적 유산입니다. 따라서 전통을 얘기할 때는 공동체성, 주체성, 독창성 등이 함께 이야기됩니다.

전통예술에는 미술, 서예, 건축, 공예 등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통 공연예술에는 탈춤, 무속, 농악, 꼭두각시, 남사당놀이, 판소리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각각의 공연예술에는 그 기예를 지켜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전통예술인들을 인간문화재 또는 명인, 명창 등으로 부릅니다. 이 분들을 예전에는 광대, 재인, 악공, 잽이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렀지요. 저는 대학교 다닐 때만해도 광대라고 하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코에 빨간 공을 붙인 서양의 삐에로를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국악한마당 공연에서 줄타기하는 전통광대를 처음 보았는데 그 광대가 줄에 올라서서 하는 말이 “이 줄타기가 옛날에는 화랑의 기예였소이다.” 하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화랑이라면 신라 시대의 무사 집단인데 줄타기를 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궁금해하다 광대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삼국유사?, ?삼국사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을 보면 우리 민족이 고대의 무천, 동맹, 영고 같은 제천의식을 행할 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사흘 밤낮을 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때 노래를 작곡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 노래를 부른 사람도 있었을 테고, 악기를 연주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 춤을 춘 사람도 있었겠죠? 즉 예술가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고대의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 중 고운 최치원의 기록이 고대 예술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그윽하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있으며 유교, 불교, 도교의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민중을 교화하는 것이다.”는 것인데 이 글에 소개된 ?선사?는 선교와 관련된 역사책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선가(仙家)는 신라의 국선 곧 화랑으로 보며 그 시원은 삼한의 소도의 제관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다” 라고 했습니다. 화랑의 시원이 삼한시대의 신성한 장소였던 소도(蘇塗)에서 제천의식을 행했던 집정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관의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고구려에는 조의선인(鳥衣仙人)이 있었는데 ‘새의 날개 같은 옷을 입은 선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예들을 통해 고대사회에서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제천의식을 행할 때는 제관으로서 활동하며, 일상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예술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왕족이나 귀족에 속하는 상류계급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제천의식과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을까요?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신라시대의 지배층이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화랑들과 함께 예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고려시대 이후 천민 계급으로 살아가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광대”라는 말은 고려시대에 서역에서 들어 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라고 하는데 예술가를 지칭하는 단어로서 광대와 화랭이, 재인 등의 용어와 뒤섞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생각됩니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엄격한 신분제도의 벽을 넘지 못해 광대들은 기생, 무당, 스님, 백정 등과 함께 천민계급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은 평민층인 농부나 어부와 한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자기들끼리 기예를 전수하면서,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계급을 형성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러한 사람들이 조금씩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실학사상이 일어나고 평민 가사, 탈춤, 판소리 등의 가치를 양반들 중의 몇몇이 인정하게 되면서 평민 문학, 평민 예술이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종과 대원군이 권력을 쥐었던 조선조 말에는 광대들이 왕족이나 고위 관리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심지어 궁궐에 불려가 임금 앞에서 기예를 보이기도 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명인, 명창, 국창 등의 명예로운 이름으로 우대 받으며 많은 돈과 신분의 상승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은 또 다시 천대받게 됩니다.

일제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인 육당 최남선 선생은 “조선조의 재인, 광대들은 적극적으로 특별한 권장을 입지 못하고 무식, 무기력한 예인들이 사회 최하층적 지위에서 구차히 존속하다보니 거기 쇠잔이 있을 뿐이고 발달이 없으며 저락이 거듭될 뿐이지 향상을 볼 수 없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조건 하에 있다 보니까 수 천 년을 하루같이 몸을 놀리는 기술과 우스개 놀이쯤에 그치고 드디어 다른 데 만한 순희곡적(편집자 : 서구의 희곡문학을 가리키는 말) 생장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하루 바삐 그 방법을 개량하여 서구의 예술을 익히면, 외국 사람들에게도 조소를 면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글은 일제 시대 우리 지식인들의 전통예술에 대한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이광수 선생 등 유명하다는 모든 지식인들이 당시 조선시대의 예술과 풍습을 봉건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루 바삐 개화, 곧 서구화, 일본화 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서구의 예술 사조들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서구에선 30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던 예술 사조들, 즉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계몽주의와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표현주의, 상징주의까지 30년 사이에 물밀 듯이 이 땅에 들어와서 서구문화의 전시장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문물, 신문명에 심취하고 경도되니 전통 예술과 관련된 모든 활동들은 점점 쇠잔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과 북으로 나눠지면서 남한에서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문화적인 식민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60년대에 일어난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미신타파를 명목으로 전통적인 가치관과 예술관이 괄시를 받게 됩니다. 저는 7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저는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영화나, 오페라 아리아나 이태리 민요에 열광하고, 서양의 고전 음악을 좋아하고, 독일에 유학 가길 희망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시골에 놀러갔다가 친구가 다니는 국악원에 구경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판소리라는 것을 들었는데 그 음색의 묘한 느낌과 가슴에 와 닿는 선율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음악이 있었는데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70년대의 대학가는 서구의 히피 문화가 휩쓸었던 때입니다. 머리를 기르고, 청바지와 통기타와 미니 스커트가 대표적인 청년들의 문화였죠.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80년대 들어오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습니다. 대학가에 풍물패나 민요패가 만들어지고 학생운동과 부합되면서 전통문화 부흥운동이 대학가에 크게 번져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이런 전통 문화의 부흥은 다시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대학 문화의 쇠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세대 문화가 다시 힙합 문화나 영상 문화로 바뀌면서 급속도로 서구 대중문화에 종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그동안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서구문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교육을 받아왔고 익숙해져 있다는 것에서 찾게 됩니다.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전 세계 관객들을 사로잡으며 미국적 이상과 꿈을 주입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헐리우드 영화를 ‘팍스 아메리카의 전도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월트 디즈니’에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들이 전 세계 어린이들의 정서와 문화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 문화를 지킨다는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만 벌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문화적 충돌과 투쟁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몇 년 전, 베니스 영화제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니스 광장에 있는 조그만 까페에 들어갔는데 그곳이 괴테가 앉아서 커피를 마셨던 까페로 유명한 곳이라는 겁니다. 허름하고 비좁은 카페의 낡은 벽에는 그곳을 거쳐 간 예술가들인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등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고, 그것을 주인은 대단한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대학의 부총장님이 영국에 여행을 갔답니다. 워즈워스라는 유명한 전원시인의 유적을 찾아서 여행을 하는 길이었는데 어느 산골마을에서 깜짝 놀랐다고 하더군요. 관광코스에 들어 있지도 않은 한 민박집 할머니가 옛날에 워즈워드가 하숙했던 집이라고 워즈워드와 관련된 자료를 모두 구해서 집을 꾸며 놓고 안내를 한다는 것이에요. 그걸 평생의 즐거움과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상황은 어떨까요? 제게 그 말씀을 해주신 그 부총장님의 누이동생이 조지훈 시인이 살았던 집에 살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자기 누이한테 “조지훈 시인은 청록파 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인데, 이 분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여기다 만들자.”고 하였더니 누이 대답이 “그러면 집 값 떨어져요.”였답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볼까요?

유럽의 여러 나라는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전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의 교육과정에 자기네 전통문화를 알려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독일 역시 괴테나 하이네, 바그너, 베토벤 같은 예술가들을 내세워서 많은 문화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생 시절에 독문학를 공부했기 때문에 하이네의 시에 아름다운 선율을 곁들여서 소개된 로렐라이 전설에 도취돼서 “언젠가 독일에 가면 로렐라이 언덕을 꼭 가봐야지.”하고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 갔다온 제 친구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독일어 교과서에 속았다는 겁니다. 로렐라이 언덕은 아무 것도 없는 강가의 인어조각상인데 독일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고 전설을 아는 독일인들도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독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의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로렐라이 언덕을 꿈꾸면서 얼마나 많은 동경과 찬미를 보내고 있습니까? 외국 문화를 섭취하고, 수용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쳐 외국문화에 대한 숭배와 찬미로 흘러가면서 자기 문화에 대한 비하와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잠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 중에서 경제적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거대한 외국 자본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느 경제학자의 강연을 들어보니 우리나라에서 외국 자본의 비율은 37%나 된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이 18% 정도, 미국이 10%도 안 되는 것에 비교해 보면 그 비율이 얼마나 높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외국 자본이 토종 자본을 잠식하지 않도록 갖가지 보호장치를 하면서 싸워나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IMF가 터지면서 너무 쉽게 그 보호장치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커진 문제는 외국 자본 37%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는 70%의 효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대주주나 50%이상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창업자의 주식은 대부분 부동주식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는데 비해 외국 자본들은 수시로 움직이기 때문에 37%의 주식만으로도 주식 시장이 농락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원리 속에서 우리나라가 경제적 주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경제 식민지화, 즉 경제적 종속화는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문제가 문화의 차원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에 있어서도 약육강식의 원리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지배하게 되어 있고, 그 현상은 거대한 물결처럼 지금 이 세계를 몰아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외국문화에 95% 이상 잠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변을 한번 살펴보세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문화활동,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음악,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놀이, 여러분의 패션, 음식, 모든 것들이 어떠합니까? 그 배후에는 거대한 외국의 문화자본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화의 시대이고 문화전쟁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인 창의력이 굉장히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문화가 옛날처럼 오락거리나 여흥거리가 아닌 엄청난 경제적 기반을 이루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 상품은 얼마나 됩니까? 각 나라마다 식물 꽃씨나 토종 볍씨 같은 토종씨앗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토종 씨앗을 하나 뺏기면 그것이 외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개량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가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경제적 손해를 입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도 원래의 것이 어디에서 생산되느냐에 따라서 부가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문화자본가들은 저작료를 받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온통 저작료를 지불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외국의 음반, 영화, 뮤지컬, 게임, 에니매이션 등을 수입하여 떼돈을 벌고 그 대신 엄청난 액수의 저작료를 지불하는 거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외국의 문화자본들은 직접 돈을 쓸어가기 위해 문화시장 개방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에서는 우리나라에 영화를 직배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10년이나 기울여왔고 지금도 ‘스크린 쿼터제’를 없애라고 집요하게 정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나라 영화산업을 잠식하기 위해서는 어떤 걸림돌도 없어야 되는데, 이걸 못하게 하는 최고 걸림돌이 바로 ‘스크린 쿼터제’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문화업계는 외국 자본의 거대한 침투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위기에 몰린 21세기 한국 문화예술계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을 저는 창조와 수용, 전승 등의 세 가지 요소의 접점에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수용하며 자라납니다. 어느 정도 성장해서는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창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후세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려고 하지요. 이렇듯이 한 인간은 살아가면서 창조와 수용과 전승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전승에서부터 심각한 좌절을 겪었습니다. 만약 전통문화가 순조롭게 전승되었다면 현재 우리의 전통과 예술에 대한 모습이 지금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단절되기도 하고, 비틀어지기도 하면서 심각한 좌절을 겪었습니다. 과거 봉건국가 시대에는 중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당시 상류문화는 중국문화 일색이었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대에는 역시 지식인이나 상류계층이 일본문화나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50년 동안은 서구문화 유입시기였습니다. 현재는 서구문화의 유입 현상이 점점 광범위하고 폭력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또한 이런 배경 속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창조력의 고갈”입니다. 창조력이라는 것은 전승과 수용이 잘 될 때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다 보니 우리 것을 만들어서 남에게 팔고 보급하는 데는 경험이 부족하고 기반도 안 닦여있는 실정입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소설을 아실 겁니다. 여러분들도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가 나온 뒤로 서점에서 한 번쯤 봤을 겁니다. 그 소설은 영화가 흥행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 번역도 안 되었을 책입니다. 그 소설의 원작자는 영국에서는 유명한 신화학자이자 영문학자입니다. 그는 북유럽의 고대 신화에 대한 해박한 연구를 바탕으로 50년대에 그 책을 썼습니다. 그 소설은 영국에서 인정을 받고 판타지 소설의 원조로서 문학사에 거론되긴 했지만 세계적인 관심을 일으킨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헐리우드의 영화산업과 연결되면서 이 책은 반세기만에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문화상품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만들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도 그 이전의 상황, 즉 작가의 노력을 주목해 달라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작가는 창작의 열정과 고통 속에서 그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지 떼돈을 벌려고 그 작품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죠? 그 사람이 그러한 작품을 만들려고 열정을 가지고 몰두하게 된 배경에는 영국문학과 언어학, 신화학 등 자기 문화와 전통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들여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바로 “창작행위”입니다. 창작행위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 어느 민족에서나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 예술의 기초 씨앗입니다. 그러나 기초적인 창작행위가 우리나라에서는 갈수록 줄어들면서 창작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토종 들꽃의 씨앗을 많이 보유해야 전 세계의 원예 사업에서 싸워나갈 수 있는 것처럼, 창작의 씨앗을 많이 보유해야 한 민족의 문화 경쟁력은 커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힘을 바탕으로 문화산업도 형성되고 발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기초적인 것보다는 당장 큰 수익을 남기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계나 애니메이션 쪽에 지망을 많이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요즘 판타지 소설에 푹 빠져 있습니다. 왜 그렇게 빠져 있는지 궁금해서 저도 아들이 보는 판타지 소설을 봤습니다. 그걸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제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고대 신화나 전설에 대한 이야기와 거의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설이 현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과 연결되면서 일찍부터 새로운 창작품이 되어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고, 또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신화나 전설이야말로 전통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안타까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환타지 소설의 대부분이 외국 신화와 인물들에서 소재를 선택하고, 우리나라의 신화나 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더라는 사실입니다. 또 세계 각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무기, 전사들, 수호신들, 마왕들을 소개한 책을 봤습니다. 아마도 게임을 즐기거나 판타지 작가가 되려는 아이들을 위한 해설서로 기획된 책일텐데 일본의 출판사에서 여러 명의 일본 작가들에게 의뢰해서 시리즈로 발간된 책이더군요. 그런데 그 책들의 공통점이 먼저 그리이스나 유럽 고대의 신들을 먼저 정리해 놓고, 뒷부분에다 중국과 인도의 신들을 소개하고, 마지막 장에 반드시 일본의 신들을 소개해 놓았더군요. 한 마디로 일본에서는 이미 자기나라 신들에 대한 마케팅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에도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에 대한 캐리커쳐를 만들어 보고, 이러한 것들을 소재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고 도전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나 “천국의 신화”, “바람의 나라”와 같은 게임 등 몇몇 작가들이 시도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도된 실적은 아직까지 참으로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보다 많은 창조적인 근원과 영감의 원천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 아들이 보는 판타지 소설을 보고 느낀 안타까움입니다. 저는 한국의 신화나 설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어떻게 작품을 한번 만들어 볼까 오랫동안 고민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판타지 소설과 그와 관련된 글들을 읽으면서 이런 쪽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창작력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상황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세대들의 노력이라는 점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영화도 외국에 저작권을 받고 판권을 파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엽기적인 그녀” 같은 한국 영화의 판권을 산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것은 십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외국 것을 살줄만 알았지 우리 것을 팔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연예술에서도 “난타”나 “명성왕후”, “지하철 1호선” 같은 작품들이 세계 공연예술계에 진출해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높은 저작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직접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마케팅을 하고 해외 공연계에 진출하여 좋은 반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극장장으로 있는 국립극장에서도 얼마 전에 콜럼비아 페스티발에 당당하게 초청료를 받고서 공연을 갔습니다. 국립극장이 50년이 되었는데 초청료를 받고 해외에 나간 것은 처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반응이 좋으니까 초청하겠다는 제안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작권, 판권이 하나의 씨앗이라고 하였을 때 그 조그마한 씨앗이 얼마나 많이 확대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21세기 우리 문화의 최대 과제입니다.

저는 여러분 나이의 대학시절에 끊임없이 서구예술을 동경했고, 서구예술을 공부했고, 서구예술에 심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전통예술을 접하고 나서는 내 창작의 원천으로 그 전통을 삼아가면서 인생관도 바뀌고 삶의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고향을 무지 싫어했습니다. 제 고향이 전라도 전주인데, 어려서부터 가난의 흔적이 너무나 많은 그 곳을 떠나 어서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진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도 한국을 빨리 떠나 독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가족도 싫어서, 가족하고도 멀리 떠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들었던 판소리 때문에 거꾸로 전라도 말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 말이 그렇게 다양한 표현과 영롱한 문학적 향기가 있는가를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향의 땅에 대해서도 궁금해지고 자연스레 내 고향에 어떤 예술적 기풍이 남아 있는지도 느끼게 되더군요. 그러다 보니 핏줄에 대한 애정 곧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랑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전통이라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형식 곧 그 분들의 삶의 자취이고 향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조금만 지나면 전통의 계승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문화적 취향에 입각해서 전통을 바라볼 것인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TV 같은 매체에서 민요를 부르는 프로그램이 나올 때, “저 구닥다리 좀 꺼버려.” 하는 태도와 “얘, 그래도 저게 할머니가 좋아했던 노래니까 한번 들어보자.” 하는 태도와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너무도 다르죠. 일례로 여러분도 가족들과 함께 노래방 가 보신 적 있죠?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아버지가 조용필 노래나 이미자 노래 부르면 아들은 썰렁하다고 앉아 있습니다. 또 아들이나 딸이 신세대 노래를 부르면 어른들은 ‘저게 무슨 노래야. 한마디도 알아먹을 수가 없네.’하는 심정으로 침묵을 지킵니다.

세대간의 문화적 장벽이 이렇게 높습니다. 이러한 장벽은 한 가족을 갈등 속에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세대간 문화적 단절의 골이 깊습니다. 앞 세대의 문화를 부정하는 경향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세대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계층 간의 정서적 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상대방의 문화를 비판하기 전에 상대방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핏속에 집단적 무의식의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는 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 익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노래를 아들이 좋아하고, 손자 노래도 할아버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적 활동이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저에게 전통이라는 것은 ‘나를 숨쉬게 하고, 나를 활기 있게 만들어 주고, 또 창조의 열정에 불타게 하는 소중한 원천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전통이란 것은 있습니다. 그 전통은 현대에 와서도 문화의 지층 아래에서 지하수가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땅을 파고 들어가 얼마나 많은 창조의 샘물을 솟아오르게 하느냐에 따라 한 국가 혹은 한 민족의 문화 경쟁력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아놀드 토인비가 이야기한 짧은 구절 하나로 이 강의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창조하는 힘의 신성한 섬광은 아직도 우리들 안에 살아 빛나고 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