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을 목요특강으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러분은 디자인에 관심이 많습니까? 디자인이 어떤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디자인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저는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디자인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요사이 매스컴과 미디어를 통하여 새로운 트렌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디지털(Digital), 디자인(Design), 디앤에이(DNA)가 그것입니다. 이것을 '새로운 키워드' 또는 새로운 '삼디(3D)'라고 합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습니까? 먼저 디지털이란 무엇입니까? 디지털의 가장 핵심적인 분야는 정보통신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통신을 사용했습니다. 과거에도 전화를 걸어 음성을 전달했지만 그것은 매우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디지털을 통하여 통신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오감(五感)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현재 어떤 통신수단도 냄새와 맛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맛과 촉감, 후각 등의 정보를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디지털이 추구하는 발전 방향은 인간과의 교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지털의 발전이란 결국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신경 전달이 디지털 타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저의 말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DNA 기술의 발전 방향은 우리의 인체를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 생로병사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을 괴롭혀 왔던 질병과 노화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결국 DNA 기술 역시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자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디자인은 껍데기를 만들어내는 미술이 아닙니다. 디자인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20세기는 과학의 세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과학기술의 대부분은 20세기에 발명된 것입니다. 동시에 20세기는 인류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세기였습니다. 1·2차 세계 대전, 월남전, 6·25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매우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과학 기술이 살육 수단이 되어 버린 비참한 세기였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한 우리의 관심은 발전된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맥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창출해 내려는 인간생태학적 관점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새로운 세기의 과제입니다. 디자인이 중요해진 이유는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샤워합니까? 보통 샤워하는 데 얼마쯤의 시간이 걸립니까? 북미주의 경우 샤워하는 데 평균 12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샤워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행동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물을 피하는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물의 온도가 맞지 않아서 샤워기의 물을 피하고 또 비누칠을 하면서 물을 피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샤워 중에 물을 피하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인지하는 자신의 행동은 전체의 약 30% 정도라고 합니다. 삶의 맥락적인 이해란 삶의 모든 순간순간에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려는 노력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사진은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실제로 관찰하지 않으면 무엇이 불편하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디자이너들은 우리의 삶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디자이너란 사람들이 일상에서 혹은 삶에서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개선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디자인이 다루는 분야는 제품 디자인이나, 시각 디자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롭게 실천하는 것을 광의의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모든 디자이너의 화두입니다.

디자이너가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어떤 영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10대를 이해합니까? 그렇다면 70대가 가장 원하는 상품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생들에게 70대를 위한 제품 디자인을 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노인들을 위한 전자제품을 디자인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실제로 노인들과 며칠 정도 함께 생활해 본 후에는 성인용 기저귀를 디자인합니다. 사람들이 삶의 어떤 부분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지 정밀하게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색을 보면 맛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렌지색을 단맛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짠맛을 연상하는 색은 무엇일까요? 붉은색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매운 라면을 먹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지닌 생리적인 욕구나 반응도 디자인에 의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삶의 모든 경험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디자인은 좋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것은 수도꼭지 사진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수도꼭지를 생산하는 한 회사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의 보통 가정은 약 40년에 한 번씩 수도꼭지를 간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꼭지가 잘 팔릴 턱이 없었습니다. 이 회사가 디자인 회사에 잘 팔릴 수 있는 모양의 수도꼭지 디자인을 의뢰했습니다. 의뢰를 받은 디자인 회사는 수도꼭지가 일상에서 어떻게 쓰여지는지에 대한 관찰부터 시작했습니다. 부엌과 호텔 등 현장으로 나가 직접 많은 관찰을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일반 사람들이 수도꼭지 모양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물만 잘 나오면 수도꼭지 모양에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수도꼭지가 아니라 깨끗한 물이었습니다. 이 회사는 수십 년 동안 자신은 수도꼭지를 파는 회사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 없는 일을 열심히 한 회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건 깨끗한 물이었지 수도꼭지의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디자인 회사에서 해준 디자인은 수도꼭지 앞부분에 정수필터가 달렸고, 필터를 교체할 시기가 되면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는 이렇게 수도꼭지를 파는 회사에서 6개월마다 필터를 교체해 주는 정수기 회사로 바뀌었고, 회사의 규모는 이전보다 10배 이상 커졌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지만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뛰면서 생각하자'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사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중에 우스꽝스러워 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구호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인 선택이 중요합니다. 디자인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다음은 샤워꼭지 사진입니다. 미국에서는 환경 규제로 인해 샤워할 때 분 당 2.5갤런 이상의 물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정말 감질맛 나는 샤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똑같은 물의 양으로 어떻게 하면 샤워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물방울 사이즈와 물줄기에 따라 샤워하는 느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연구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소량의 물을 쓰면서도 만족감을 주는 샤워꼭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디자인의 개념은 사람들이 물건을 쓸 때 겪게 되는 총체적인 경험을 향상시켜 주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요컨대 디자이너는 모양만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한 자물쇠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이 회사의 심볼 마크는 총알 맞은 자물쇠입니다. 즉 총을 맞아도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호황을 누리던 이 회사는 자물쇠 특허가 사라지자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 회사의 자물쇠를 카피한 값싼 중국 제품이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점에서 값싼 중국제를 팔기 시작하면서 회사는 서서히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장이 견디다 못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의뢰했습니다. 의뢰받은 디자이너들은 우선 자물쇠가 실제로 사용되는 현장 관찰을 시작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보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단순히 모양만 새롭게 만드는 것으로는 중국 제품과 경쟁이 힘들었고, 이미 회사가 침몰 단계였기 때문에 신제품을 만들 시간이 없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소비자 조사를 해 보았는데 사람들이 자물쇠 모양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보관해야 할 물건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이 자물쇠를 통해서 보관해야 할 스포츠용품과 자동차 공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자물쇠는 철물점에서만 팔았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우선 동일한 제품을 여러 가지 포장으로 나누어 슈퍼마켓, 자동차용품 가게, 운동용품 가게 등에서도 자물쇠를 팔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매출이 10배 올랐습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끈 다음 디자인을 바꿨습니다. 우선 자물쇠의 표면을 플라스틱으로 씌운 제품을 디자인했습니다. 표면이 쇠로 된 자물쇠를 자동차에 걸고 다니면 페인트칠이 벗겨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교도소 출신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 후에 자물쇠의 굽은 사이가 좁은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굽은 사이가 넓은 자물쇠는 공구로 절단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도둑들은 손이 덜 가는 자물쇠, 즉 공구로 절단하기 쉬운 자물쇠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디자인 한 것입니다. 이렇게 디자인은 모양을 만들기 이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서 삶의 경험을 향상시켜 가는 과정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술과 환경,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시골의 할머니가 처음 서울에 와서 지하철을 탈 때 매우 당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표를 사기도 어렵고, 게이트 통과하기도 어렵습니다.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기차표 파는 방식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표를 사는 것도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디자이너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사회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합니다. 특히 정보 소외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현대 사회에서 이는 더욱 절실합니다. 과거에는 빈부의 격차가 심했지만 앞으로는 지식의 격차가 빈부의 격차보다 더욱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정보에 계속 접속하는 사람이 똑똑해지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살이가 더욱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정보에 접속하기 힘든 세대, 가령 노인들을 위한 디자인에 힘써야 합니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과학 기술이 나왔을 때 이것을 사회에 부작용 없이 접목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고민합니다. 새로운 과학 기술이 사회에 보편화되기 이전에, 디자이너들은 우리의 삶에서 이것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합니다. 즉 디자이너가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입니다. 앞으로 블루투스 기술이 발달되면 여러분의 휴대폰 단말기에 마음대로 MP3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파일을 바로 휴대폰으로 받아서 돈도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터렉션((Interaction) 형태가 수없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새로운 기술을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지에 대해 디자이너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영화나 연극을 만드는 것과 상품을 만드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디자이너는 영화와 연극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 성공하는 제품은 단지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는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나이키는 단순히 'JUST DO IT'이 아니라 나이키의 스토리를 팔고 있습니다. 문화와 접목된 상품을 파는 것입니다. 이것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전반적인 국가 경쟁력이 약화됩니다. 과거의 상품에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워크맨은 반드시 모터가 들어있고 마그네틱 헤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상 공간의 MP3로 바꾸면 실체는 없지만 워크맨과 동일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전 것이 새 것으로 대치될 때 사람들의 머릿속에 적합성이 생기지 않으면 새 것을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 나오게 될 디지털 제품에 대해 과거에 우리가 써오던 것과 맵핑(mapping)을 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상품의 영역이 허물어지면서 패션과 디자인과 가전제품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MP3 플레이어가 부착되었지만 세탁도 가능한 옷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디자인은 일상에서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화병입니다. 화병은 200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미 기존에 있는 물건이지만 우리의 관점에 따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사양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사양산업으로 지정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대학이 학부제가 되면서 대학의 구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화학공학과, 섬유공학과, 고분자공학과가 합쳐서 하나의 학부가 됩니다. 섬유는 사양산업이라고 하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섬유공학과는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제입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60년대 대학 입시에서 수석한 학생들 대부분은 화공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졸업할 때 취업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석유 위기가 온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인기만으로 미래를 파악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나중에 혜택을 받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디자이너로서는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있는 이상 사람과 관련된 학문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컴퓨터의 경우 6개월만 쉬면 박사학위를 가진 이도 일반 사람과 똑같아집니다. 변화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옛날과 지금이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신 것은 가위 사진입니다. 가위에 관심 있는 기업은 우리나라에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 거의 수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핀란드의 한 회사는 일 년에 약 1억 개의 가위를 팔고 있습니다. 개 당 단가가 5달러니까 5억 달러 치의 가위를 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양화된 산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하지 않는 기업 문화 자체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에 사양이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컴퓨터 회사인 아이맥 같은 경우는 디자인을 바꾸어서 회생한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기존의 컴퓨터는 아이보리 또는 회색뿐이었습니다. 아이맥은 이를 투명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이와 똑같은 재료가 그릇에서 쓰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문화적인 현상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보다 먼저 컴퓨터가 가정의 생활용품이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상을 잘 읽는 능력이 있어야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디자인과 예술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예술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은 변합니다. 또 새로운 방향을 찾기도 합니다. 시장의 쓰레기만 모아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새로운 심미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디자인은 명백히 새로운 가치를 추구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지 않으면 디자인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예술은 주관적입니다. 반면 디자이너는 비슷한 것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주관이 개입되면 안됩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하고 철저히 대중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은 사실 누가 디자인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디자이너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소비자를 위해 디자인합니다. 예술의 과정은 창의적이고 비정형적이며 개성적입니다. 반면 디자인은 조직적입니다. 하나의 디자인이 완성되기 위해서 수 백 명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마케터 등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명작 중에 두 사람의 공동작은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공동작이 있습니까?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공동 작곡한 곡이 있습니까? 반면 디자인은 굉장한 팀 작업입니다. 예술은 천재들이 하는 것입니다. 100년 전에 반 고흐는 자신의 작품 중 한 점만을 동생이 경영하는 화상에 팔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화상에서는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영국 경매장에서 고흐의 그림이 200억 원에 경매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50, 60년대의 작품이 요사이의 모던한 작품보다 감각적으로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예술가는 시대를 앞서서 미리 사는 사람으로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낳습니다.

저는 74학번입니다. 입학 당시의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머리는 장발에, 좁은 바지를 입으면 간첩 같다고 해서, 14인치 판탈롱 바지를 입었습니다. 지금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유행이었고 너무 당연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간첩 같다고 해서 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대적인 정서가 있습니다. 유행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필요악입니다. 유행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선진국이 그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유행을 만들기 위해 일 년에 몇 차례씩 디자이너들이 밀라노나 파리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들은 미리 유행 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일부러 그 제품을 많이 만듭니다. 이러한 합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디자이너들이 서로 각개 전투를 하게 되면 손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담합을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옷이지만 작년과 올해의 것은 다릅니다. 복고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10년 전의 것과 지금의 것은 어딘가는 다릅니다. 10년 전의 것은 10년 전의 것일 뿐입니다. 예술은 장식성에 뜻을 둡니다. 그래서 대개 많은 예술을 궁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파트롱의 후원을 받아 창작을 했습니다. 반면 디자인은 경제성이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투자에 대한 효과가 중요합니다.

결과적으로 예술과 디자인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예술이 동기를 제공한다면 디자인은 거기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예술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비즈니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싸치앤싸치'라는 광고 회사에 싸치 컬렉션이 매우 유명합니다. 싸치는 언더그라운드 작가에 투자를 많이 했고 많은 콜렉션을 했는데 그것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디자이너는 많은 연극과 전시회를 보아야 하고, 현대 미술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국제무대에서 다른 사람들과 당당히 겨룰 수 있습니다. 그러한 소재가 없으면 경쟁력이 없습니다. 실력은 곧 매력입니다. 대학 시절에 토플책만을, 상식책만을 들고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감각과 감성을 많이 키워야 합니다.

디자인의 역할이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디자인은 상품의 기능에 형태를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디자인은 사람들의 경험을 창출해내고 더 나아가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새로운 브랜드의 옷을 입고 학교에 오면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야기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디자인이 만들어 내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디자인의 벽이 퓨전화 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궁극에 가고자 하는 방향은 재미 즉 펀(fun)을 만드는 디자인입니다. 문화 컨텐츠를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를 보다 매력적으로 만들려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즐길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월드컵을 개최하는 데 과연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입니까? 63빌딩을 보여줄 것입니까. 외국에는 더 높은 빌딩이 있고 심지어 그것을 폭파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외국인들을 우리의 고옥에 재우고, 돼지가 꿀꿀거리는 화장실을 보여주고, 양반의 목침을 베고 잠을 자게 하고, 숭늉을 먹게 하면 그들은 비싼 돈을 내면서라도 우리의 문화를 체험하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 컨텐츠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현재 관광 불모지입니다.

디자인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문제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디자인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제일 곤란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 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면 용감해지지 않습니까? 공부를 안 할수록 공부할 것이 없어집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를 조명해 나가는 자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만 보면 곤란합니다. 인간 사회, 소비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미래 예측이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여러분 삼 년 뒤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알아야 합니다. 알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포캐스팅(forecasting)을 하지 않고 백캐스팅(backcasting)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우리의 마음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구상이 없으면 미래는 오지 않습니다. 디자인은 비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미래에 비전을 만들어 놓고 역산해서 현재를 살펴봅니다. 디자이너는 그들이 구상한 비전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가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합니다. 신기술이 개발되기 앞서서 이것이 미래에 우리의 실생활에 어떻게 접목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도출합니다. 이것이 백캐스팅입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디자인이란 전략적인 사고를 말합니다. 전략하면 손자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아는 것, 즉 자신의 핵심역량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잘하는 것, 그것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파악하여 어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디자인입니다. 그래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아이디어의 안출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시장과 고객과 기술을 이해하고 일정한 과정을 밟음으로써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요즘 사람들은 상품 자체보다는 브랜드를 보고 삽니다. 기업이 지닌 이미지가 제품의 가치에 주는 효과가 엄청납니다. 삼성이 63억 달러의 브랜드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코카콜라는 630억 달러의 브랜드 가치가 있습니다. 코카콜라의 붉은 빛과 이름만 지니고 있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630억 달러를 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브랜드는 그 자체로 돈입니다. 디자인은 영향력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입니다. 브랜드 자산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관되게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소비자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나이키는 '우리는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이미지를 초지일관 내세워서 성공했습니다. 스타벅스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자판기 커피는 백 원입니다. 스타벅스는 삼천오백 원에서 오천 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더 좋아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실 사치입니다. 스타벅스는 누구든지 이 정도의 사치는 누릴 수 있다는 총체적인 경험을 만들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디자인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우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미적 감각, 기술과 경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사진은 우리나라 국민 관광 단지입니다. 여기에 이백여 개의 식당이 있는데 80%가 전주 관련 식당입니다. '전주 원조식당', '전주 별미식당', '전주 전통식당' 등등, 이것의 결과는 결국 덤핑입니다. 남이 하면 너도 나도 똑같이 하다가 결국은 제살 깎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습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디자인계에도 이세이 미야키나,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같은 스타가 필요합니다. 즉 전문 디자이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앙드레 김이 연간 약 삼십 억 매출을 올리는 데 이세이 미야케는 몇 천 억,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조 단위가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를 키워야 합니다. 디자인에는 품질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차적인 품질인 작동성을 중시했습니다. 지금은 외관과 편리성뿐만 아니라 소비자 개개인의 만족감을 중시합니다. 디자인 그 자체만으로 소비자에게 만족감을 주기 어렵습니다. 제조나 생산과 관련된 기술,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이 디자인과 유기적으로 잘 조합되었을 때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컬러 유행을 주도했던 것은 반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색채였습니다. 2001년부터는 네덜란드 화가 버미어의 그림에 나타난 색채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유럽 상품은 이미 버미어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눈이 작아서 망막의 시세포가 서구인에 비해 10% 정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우리나라 제품은 색채에 대한 감각이 유럽 상품에 비해 떨어집니다. 그리고 관심도 없습니다. 색을 나타내는 이름도 표준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빛의 삼원색 색상과 색의 삼원색 색상이 다른 데 이것을 나타내는 이름은 똑같습니다. 색채에 대한 기본 인식이 매우 낙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품뿐만 아니라 웹사이트를 봐도 우리의 색채 감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문제는 타이포그라피(typography)에 대한 무지입니다. 이는 일종의 시각적 요소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두 시계의 정확성은 다르지 않습니다. 자판의 모양만 조금 다른데 가격은 50배 가량 차이가 납니다. 브랜드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래픽의 차이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80%가 외국으로 수출됩니다. 거기에는 로마자 표기를 해야합니다. 현재 로만폰트가 이만 가지 정도 있고 각 활자마다 독특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른 활자가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구의 활자 문화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로만활자에 대한 감각이 떨어집니다.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을 붙여서 나가면 제 3세계 제품이 되고 맙니다. 오히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폴의 제품이 우리나라 제품보다 훨씬 세련됩니다. 중국도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것을 말하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굵은 글씨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굵은 글씨는 멀리서 보면 글자가 뭉개져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이태리의 유명한 디자인 학교의 심볼입니다. 그런데 이 심볼은 김창렬 화가의 모티브(물방울)를 유사하게 모방한 것입니다. 유럽의 디자이너는 아시아의 작은 국가인 우리나라 현대 미술에까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은 현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본을 국제 무대에서 대접받게 하는 것은 라멘, 아이보, 워크맨 등입니다. 이 제품은 일본이 최초로 컨셉을 만들어서 전세계에 히트시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 전세계적으로 히트시킨 제품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성덕대왕신종입니다. 서기 770년의 세계 최첨단 정보통신기기입니다. 위의 음관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 종을 설치할 때 밑에는 음동 아래를 30㎝쯤 팠습니다. 독특한 음향효과를 내기 위해 디자인을 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잔향이 남고 소리가 멀리까지 퍼집니다. 천 년을 넘도록 우리가 이 종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 독특한 디자인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천 년 후에 기억될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천 년 후의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일을 하고 있는가?' 이러한 역사 인식이 필요합니다.

요사이 유행하는 디자인의 트렌드는 지구의 환경을 고려하는 '환경 디자인', 노약자와 어린이, 젊은이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통합 디자인', 이슬람과 크리스찬과 불교도가 함께 쓸 수 있는 '문화 디자인', 사용자를 우선 고려하는 '사용자 중심 디자인'입니다. 끝으로 "오로지 불변하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 피터 드로커의 말을 소개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