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논어>에 대해서 강연을 하게 되니까 아주 쑥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어디 가서 {논어}에 대해 강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제가 {논어}를 배운 것은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였는데,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너무 동양인의 의식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공부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공부하면서 혼자 즐거워하고 감격하고 하면서 나만의 보배로 소중히 간직했는데, 올 연초에 텔레비전에서 <논어>를 강의하는 분이 공자의 인품과 가르침을 너무 훼손한다고 생각되어서 비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자에 대해 강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논어>논쟁에 휩쓸리게 되어서 <논어>의 해설서도 더 읽어보게 되고, 또 <논어>의 영역서들도 들추어보면서 {논어}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번역과 논평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논어> 주요구절들의 여러 영역자들이 어떻게 해석해서 영어로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검토해 보는 <영어로 배우는 논어>라는 책까지 쓰게 됐어요. 오늘은 그 영역본과 해설서를 통해 서양의 학자들이 공자와 그의 가르침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공자의 사상이 서양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세기초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서양인에게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촉발시켰습니다. 마르코 폴로 견문록의 성공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중세와 근대 초기에 동방 여행기를 써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중 대부분은 황당한 허구로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여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중국 왕실과도 친교를 갖게 되면서 서양인에 의한 중국의 정신 문화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예수회 본부로 보내진 그들의 서찰에 의해 유럽은 처음으로 중국의 진면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책으로 출판되어 중국에 관한 중요한 학습자료가 되었던 이 편지들은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 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어요. 그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청나라의 황제와 고급관리들의 굉장한 우대를 받고 중국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 사상이 당시 중국의 국가 이념이요 통치 철학인 것 같이 소개한 것도 나중에는 비판을 받게 되었어요. 사실 청나라가 유교를 국시로 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공자의 사상으로 다스려지지는 않았죠. 명말에서 청조에 이르는 중국의 통치 이념은 공자의 이념이 아닌 신유학 또는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이 공자를 시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선교사들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논어}를 읽었고, 그 도덕적인 고결성과 백성을 위한 통치이념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 당시 서양의 여러 사회적인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열성적으로 소개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동양 선교의 위대한 개척자 마테오 리치는 당시 중국의 철학이 원래의 유학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서양의 동양학 학자들은 성리학이나 역대 중국 왕조의 통치 사상이 공자 자신의 가르침과 관계가 적다는 사실을 놀라워하면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이 공자의 가르침의 일부분만을 발전시킨 이념이라는 마테오 리치의 지적은 청나라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리학의 절대적인 권위 때문이었는지 처음 마테오 리치가 이 점을 지적했을 떄 중국에서는 그것을 얼른 수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의 사후 청대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비판하고 정통 경학의 고전적인 분석 방법을 도입하여 금석학, 고증학 등을 발전시켰습니다.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소개한 중국의 사상은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문예부흥기의 지적흥분과 사회변동을 겪고 나서 중세적인 세계관이 아닌, 좀더 인간 중심적이고 평등지향적인 사회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능력과 인격을 검증 받은 관료가 통치하는 관료주의 통치 원칙과 공자의 만인 협동적 세계관은 세습적 귀족제도의 폐단을 혐오하고 평등사상에 입각한 세계관을 갈구하던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가 민중을 영적인 노예상태에 묶어 두고 있다고 생각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공자의 무신론적인 면모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공자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수호성자가 되었다고 H. G. 크릴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유학과 중국에 대한 견해는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만큼 대접받지 못했던, 그리하여 중국에 대해 인상이 좋을 수만은 없었던 다른 유럽인들에 의해서 강력한 반박을 받게 되고, 중국이 공자의 사상에 입각해서 통치되는 나라가 아니며 중국대륙을 정복한 청나라가 얼마나 탄압적인 통치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지적이 활발히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상가들은 중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지요. 정치의 목표가 국민의 복지여야 한다는 공자의 사상과, 세습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해 선발된 능력 있는 관료가 통치를 하도록 되어 있는 중국의 제도를,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폭제라고 생각하고 열렬히 수용했어요. 그러니까 공자의 가르침이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사상적으로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 때 볼테르와 라이프니츠 외에 많은 사상가들이 동양사상에서 유럽이 지향해야 할 미래상을 보았고 몽테스키외는 중국의 사상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으나 한편으로 공자, 맹자의 피치자 중심의 정치 사상을 환영했습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상류층들이 광적으로 수집했던 중국 예술품들은 유럽의 예술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적인 견제와 조화의 미학에서 벗어나 파격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 표출되는 낭만주의적 미학이 형성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 사상이 서양인들의 기독교의 내세 지향적인 인생관을 현세 지향적인 인생관으로 전이시켰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 휴머니즘의 공로이지만, 볼테르는 동양의 발견이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도덕적, 물리적 우주를 열어주었다고 말했지요. 즉 유럽의 전통과 관습에 위배되는 것은 성립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관념을 깨고 수많은 이단적인 사상이 대두될 수 있는 토양을 형성시켰다는 말이지요.
{논어}는 16세가 말 스페인인 멘도사의 {중국대제국사}에 부분적으로 번역, 소개되었고 17세가 말에 불어로 완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이름으로 고유명사화 된 'Confucius'는 공부자(孔夫子)의 서양식 발음으로, {논어}가 처음 유럽에 소개될 때 쓰여져 고착되었습니다. 영역은 19세기에야 처음 이루어졌는데 1861년 첫 완역 <논어>가 나온 후, 영국과 미국 사람 또는 중국 사람에 의한 영역본이 잇달아 간행되었어요. 1990년대에는 제가 아는 것만도 다섯 개의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논어를 처음 영어로 완역한 제임스 레그는 1840년부터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중국의 고전을 연구해서 사서 삼경을 모두 번역했는데, 원문뿐만 아니라 주요 주석서들까지 참고하여 세세한 주를 덧붙였어요. 레그의 작업은 감탄을 자아낼 만한 방대한 작업인데 그가 선교사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이룬 이 업적을 보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학자는 많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동양학자들 중에는 서양인이 {논어}를 제대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제가 살펴본 몇 편의 서양인의 번역서는 해석과 번역이 지극히 우수했어요. 아주 100퍼센트 흡족한 번역은 없었지만, 동양학자의 해설서 중에서도 100퍼센트 흡족한 해설서는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서양인이 <논어>를 제대로 이해,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려면 <논어>의 서양어 번역이나 해설을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해야 할텐데, 동양학자들은 무조건 서양인은 동양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학자들은 서양의 문학이나 철학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자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학문적인 편견은 빨리 버리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성장을 위해서 좋습니다. 유학의 본고장에서는 논어가 종교적인 경전으로 외경의 대상이 되어 학자나 일반인이 공자의 풍부한 인간미와 사상의 핵심적 면모를 감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반해 서양인들은 신선한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공자를 되살려 냈다는 크릴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미 역자들의 해석과 주석에서 보여지는, 공자의 사상과 인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이해에 저는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논어}의 최초 영문 번역자인 제임스 레그(James Legge)는 중국을 서양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중국의 고전을 전부 번역한 훌륭한 학자인데도 공자를 싫어했다고 해요. 그러나 선교사 생활에서 은퇴하고 런던 대학에서 동양학 강의를 하면서는 읽을수록 공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공자가 정직하지 못했고 중국인들이 정직하지 못한 것도 공자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그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기독교 사상이 유학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의무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자를 현존했던 생생한 인물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그는 공자가 정직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양화편] 20장에서 유비가 찾아 왔을 때 공자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는 그가 돌아갈 때 그에게 들리도록 거문고를 탄 일화를 지적했습니다. 물론 공자는 유비에게 자신이 그를 일부러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거문고를 탄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매우 정직한 '알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지식한 선교사였던 레그는 그런 정직함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레그와 같이 초기 영역자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충성심에서인지 공자를 오해하고 폄하한 사람이 몇 명 있었던 것 같아요.
라이오널 자일즈(Lionel Giles)의 {The Sayings Of Confucius}는 1907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것은 {논어}의 완역이 아니고 그 일부를 몇 개의 범주로 묶어서 정리한 부분역입니다. 완역이 아니어서 몹시 아쉽지만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여러 구절들을 훌륭히 번역해 놓아서 마음에 꼭 들어요. 뿐만 아니라 그의 서문에 들어 있는, 서양인들의 공자와 유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에 대한 반박도 매우 흡족합니다. 자일즈는 위대한 중국학자인 레그가 일생을 바쳐 해석한 역서에서 공자 사상의 진수를 놓쳤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레그는 {논어}에 쓰인 같은 한자를 어느 문맥에서나 같은 뜻으로 파악한 경직성 때문에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나아가서 자일즈는 레그가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자가 혼란한 시대 상황에서 어떠한 품위와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처신했는가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공자 사상의 근저에 있는 충(忠)과 서(恕), 인(仁), 예(禮)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했으며, 공자는 레그가 말한 것 같이 형식적인 예의 노예가 아니었고 오히려 진정한 선의에 어긋나는 인습적인 예와 도덕률을 무시하는 데에서 고귀한 용기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공자야말로 중국인에게서 편견의 멍에를 벗겨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일즈는 {논어}에 관한 여러 핵심적인 사항들을 정확하게 해설해 주었습니다. 특히 유교는 사후의 징벌이나 보상을 전혀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도덕이 인간이 행해야 할 고귀한 도리이기에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세속적인 기독교보다 진일보한 윤리 체계라고 주장했어요. 그리고 공자가 세속적인 지혜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위대한 이상주의자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그가 실제적으로 성취한 것에 힘입은 게 아니라 그의 고결한 상상력과 윤리적인 확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자가 엄격하고 완고한 인간이 아니라 언제나 밝고 평온한 인간이었고 그를 따라 고난스러운 망명생활에 동행한 제자가 그토록 많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애로운 스승이었던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초에 중국과 중국인을 서양인에게 이해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임어당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만을 온전한 사상으로 생각하는 서양 독자들을 위해 {대학}과 {예기}를 중심으로 공자의 사상을 소개했고 {논어}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구절들만 몇 십 개씩 뽑아 소개했어요. 미적 감각이 풍부했던 임어당은 공자가 지극히 세련된 예술적 감각을 갖고 있었으며 인생의 아이러니를 초연한 자세로 즐겼던 인물로 규정하고 그의 재치와 유머를 강조했어요. 그가 발췌한 구절들은 대개 짤막한 경구들로 이것들을 아주 유연하고 경쾌하게 번역해 냈는데 어떤 부분은 좀 경박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이 간과했던, 공자가 살던 시대의 혼란과 민초들의 극심한 고통을 잘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임어당의 해석은 송대(宋代)의 주자학자들이 공자를 비인간적이고 교조적인 인물로 만든 것에 대한 강력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는데, 공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자를 기질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유머 감각과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임어당은 공자를 자기와 비슷한 기질의 인물로 파악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의 미적 감각은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공자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그의 재치나 미적 감각보다는 무서운 좌절을 극복해낸 인(仁)의 힘이라고 믿기에 임어당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한 임어당의 간략한 해설은 동양 사상에 문외한인 서양인들에게 유학과 공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임어당은 유학이 인간의 동료인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해서 합리적인 사회 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며, 독특하게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지 않았고 법가 사상처럼 법치로써 국력을 키우려는 사상이 아니고 도교처럼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며 냉소적인 사상도 아닌, 현세적인 인도주의 사상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리고 도덕적 이상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 유학과 기독교 사이에 유사성이 있으며 공자의 가르침이 정치, 사회는 물론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친 것이라는 점에서 모세의 가르침과 비교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고전 연구에 통달했던 탁월한 동양학자 아더 웨일리(Arthur Waley)의 {논어} 영역본은 1938년에 나왔습니다. 웨일리는 {시경}의 연구와 번역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쌓았고, {서유기}도 번역한 영국인 학자입니다. 그는 공자의 생애를 다룬 모든 기록이나 저서를 불신하는 입장에 서서 {논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공자의 전기적 사실과 인간적 면모만을 소개하고 {논어}에 나오는 여러 관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청대 고증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웨일리는 {논어} 전권에 공자 자신의 말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팔일편]에서 [태백편]까지를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가장 신빙성 있는 텍스트로 보고 [향당편]과 [요왈편]은 공자의 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유교의 교리 또는 훈시로, [헌문편]에서 [양화편]까지는 유교에 적대적인 글들이 삽입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이런 견해를 가진 데에는 [헌문편]에서 [양화편] 사이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논하는 구절이 있고 공자와 도가(道家) 인물과의 대화에서 공자가 조금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구절이 있다는 데 기인한 것이죠. 그는 중국 경전과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자 말씀 중에 여러 귀절을 당시의 속담이나 유행하던 말에서 공자가 인용한 것으로 처리했고 {시경}에서 인용한 부분은 시로 번역했어요. 노련한 문학 번역가의 작품답게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강력히 전달되는 구절이 많은 반면 또 자신의 배경지식을 충분히 반영하느라고 장황하게 된 구절도 상당 수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동양학 강좌에서 학생들이 가장 유용하게 참고하는 책 중에 하나인 크릴 (H. G. Creel)의 {Confucius and the Chinese Way}는 <공자와 중국의 길> 또는 <공자와 중국의 道>라고 번역할 수 있겠죠. 원래 {Confucius: the Man and The Myth}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인데 이 책은 공자라는 인물과, 중국에서의 공자 사상의 수용과 변천 과정, 그리고 공자의 사상이 유럽과 현대 중국에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설득력 있게 해설한 책입니다. 그는 공자가 보통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인식되어 있으나 사실은 위대한 혁명가 중의 한 사람이라 보았고 공자의 사후 몇 세기 안에 중국에서 세습귀족이 사라진 것은 누구보다도 공자의 영향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공자는 마음속으로 세습군주제를 폐지하고 싶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상황이 군주제가 폐지된다면 온 중국이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힘없는 백성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군주를 그대로 두고 덕이 있는 신하가 실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관료 중심제로 개편하려는 무혈혁명을 기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크릴은 춘추 시대가 제후국 간, 제후국 내의 패권다툼으로 살벌한 시대였고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개념이 지극히 미약했기 때문에, 공자가 한 제후국에서 법치로써 백성을 편안케 하면 다른 제후국의 백성들이 그 제후국으로 이주를 하고 싶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제후국들도 존립을 위해서라도 덕치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등용하여 통치 이념을 구현하게 해줄 제후를 찾아서 천하를 주유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공자가 출신 계급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두뇌와 열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여 관료 후보로 양성했던 점을 들어 그를 민주적인 신념과 자세를 지녔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릴은 묵자, 맹자, 한비자 등이 어떻게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변용시켰으며, 중국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공자의 사상이 세력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어떻게 왜곡되었는가를 분석했습니다. 또한 공자의 원칙에 투철하면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가식 없는 인품, 그리고 수많은 좌절과 시름 속에서도 변함없었던 자애로움을 강조하며 후대 유학에 의해 왜곡된 공자가 아닌 진정한 공자의 모습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올바른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 받을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물론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논어}의 번역서와 중국 사상에 대한 해설서만 읽고 책을 썼는데 공자의 사상과 인품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고 핵심적인 면을 아주 쉽게 해설해 놓은 점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공자의 통합적 인간관에 관심을 두고 국가라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 전원의 정신이 형성하는 것이고 인간은 상호관계 속에서 성숙할 수 있다는 공자의 근본 명제를 파악했습니다. 공자 사상의 합리적, 실용적인 면모와 함께 그의 인생에 대한 경건한 태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공자의 염원을 지적했고, 공자의 삶의 원동력은 권력욕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되려는 의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철학과 매우 다른 공자의 사상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이 야스퍼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돼요.
70년대 이후의 영역자들은 대개 전통적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채택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번역이 매끄럽게 읽히기보다는 아주 이론적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영역자들도 이전의 번역자들과 같이 공자의 교조적인 이미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공자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했지요. 그리고 현대로 오면서 더 많은 역자들이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공자의 전기를 지극히 불신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문학적으로 제일 제 마음에 든 번역자인 사이먼 레이즈(Simon Leys)는 벨기에 출신으로 중국 문학을 오래 강의한 학자이자 소설가인데 간결하고 정곡을 찌르는 번역 때문에 매우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해설하고 교육자로서의 공자를 논하는 한편 독자들에게 공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소설가답게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말하기를 삼가한 것을 주목하라고 권합니다.
전반적으로 {논어}의 영역자들과 해설자들은 동양이 학자들과 달리 유학의 중압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위대하고 투철한 신념을 지녔으면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가식이 없었던, 만인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공자를 되살려 내는 훌륭한 작업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서양학자의 시각이 우리에게 공자의 참모습을,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진실을 새롭게, 진정으로 인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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