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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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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특강공지

  강연제목 가치와 세상(Reality)과 나
  139 회
  초청연사 이인용 (MBC 해설위원)
  강연일시 2001년 05월 10일
  강연장소 본부관 학술회의장
  조회수 23735 회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제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함께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뉴스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뉴스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뉴스는 '세상을 보는 창'입니다. 우리는 시간, 공간적인 제약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하루종일 아무리 돌아다니며 보고 듣는들 그게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신문이나 아홉 시 뉴스를 보면, 그 날 하루 내가 직접 보고 듣지 못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죠. 그래서, 뉴스는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뉴스가 보여주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닙니다. 신문에는 지면의 제약이 있고, 방송에는 시간의 제약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다 담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뉴스가 보여주는 세상은 '선택된 세상'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택해서 보여주는 세상일까요? 그것은 바로 언론(기자)입니다. 뉴스는 언론(기자)에 반영된 현실(reflected reality)이고, 언론(기자)이 재구성한 현실(reconstructed reality)입니다. 기자가 이 세상(현실)에서 무엇을 기사로 쓸 것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서 재구성한 것이 기사가 되는 거죠. 결국 '뉴스는 기자가 쓰는 것'이라는 정의가 가능해요. 이 정의는 기자가 굉장히 오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제가 초년 기자 시절 남대문 경찰서를 출입했어요. 그 때 출입 기자가 아홉 명이었지요. 그 아홉 명이 이른바 '담합'을 하면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기도 해요. 예를 들어, 말단 경찰관의 작은 비리를 기자들이 취재했다고 합시다. 기사를 쓰면, 신문의 1단 정도가 될까 말까 하겠지만, 일단 기사화되면, 이 경찰관은 옷을 벗을지도 모르는거죠. 이 때 출입 기자들이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이 일은 '있었지만, 없던 일'이 되는 겁니다. 기자들은 이 세상을 직업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기자가 기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제조업과 비교해 본다면 공장에서의 공정과 똑같습니다. 기사는 곧 언론이 생산해내는 상품입니다. 그런데, 기자가 선택한 기사거리는 기사가 되기 위해 공정을 거치면서, '가치'가 담기게 됩니다. '선택'이라는 과정에도 물론 가치가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기사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되는데, 결국 여러분이 보는 세상은 기자의 가치관에 의해 한 번 걸러진 세상입니다. 언론에 대해 항상 말이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사를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봐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기자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것을 포착해 기사화 할 때 무엇이 영향을 미칠까요? 이것은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외부적 요인으로는 첫 번째가 권력입니다. 어떤 권력(정권)도 언론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큰 문제없이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언론에 영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언론에 대해 간섭하고 압력을 넣는 근본 기제입니다. 문제는 권력과 언론의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권력과 언론은 숙명적으로 갈등과 긴장의 관계에 놓이지만, 둘 사이가 힘의 균형을 이루면, 그것은 건강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또 하나가 자본이에요. 언론도 기업의 형태로 운영이 되죠.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광고주의 영향력입니다. 만약 어느 특정 신문에게 어떤 기업이 막대한 광고 비용을 집행한다면, 그 기업은 신문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외부 요인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저는 오늘 내부적인 요인을 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부적인 요인은 바로 기자 '안'에 있습니다. 기자도 사람에 따라 취향과 판단이 다르고, 가치 지향이 다르지요. 역사관도 다르고 이데올로기도 다를 겁니다. 기자의 각기 다른 생각이 이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현상과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포착할 때 각기 다르게 작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기자 자신의 이해관계가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요. 그것은 기자 개인의 이해관계일 수도 있지만, 기자가 소속된 언론사의 이해관계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1997년 9월 11일 MBC 아홉시 뉴스에 나갔던 기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 때 경상남도 김해에서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 사건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 때 기자는 그 사건을 주목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기사가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어제 새벽 2시 반쯤 경남 김해시 모 아파트 14층에서 19세 이모 양이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수치심이 꽃다운 나이의 여대생을 죽음으로 내몬 것입니다. 이 양이 남긴 짤막한 유서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답답한 심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한 이 양의 선택은 정조관념이 희박해진 요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렇게 썼어요. 자, 보세요.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팩트(fact,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자가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이 사건을 보았어요. 기자는 그 사건에서 이 시대에 교훈을 줄 수 있는 요소를 발견했던 것이지요. 즉 그 기자에게는 성폭행으로 잃은 여성의 정조가 목숨과 바꿀 만큼 소중한 것이고, 그 여대생의 죽음이라는 선택은 '정조관념이 희박한 요즘 세태'에 교훈을 줄만한 아주 가상한 행위였겠지요. 기자를 통해 이 여대생의 죽음은 그렇게 평가됐어요. 여대생의 자살이라는 한 사건이 기자의 가치관을 통해 이렇게 재구성되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됐겠어요? MBC는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 날 제가 뉴스를 끝내고 나왔을 때 어떤 사십대의 주부가 전화를 하셨어요. 중학교 다니는 딸과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딸을 딱 붙잡고 "너는 저런 일을 당하더라도 죽으면 안 돼." 라고 얘기했대요. 얼마나 절박했겠어요? 기자의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이런 불량 상품 같은 기사가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깊이 생각해볼 문제예요. 또 하나 예를 들지요. 공직자의 재산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잘 아시죠? 공직자가 공직에 있는 동안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시키지 않았는지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일 년 사이에 재산이 얼마나 늘었나를 전부 신고하게 돼 있고, 1급 이상 공무원에 대해서는 그것을 공개하게 되어 있어요. 98년- 99년 공직자 재산 등록과 공개 결과, 재산증가에서 1위를 한 사람은 당시 농수산물 유통공사의 감사로 일 년 사이에 재산이 20억원 늘었어요. 그 사람이 그 전 해에 신고한 재산은 4억원이었는데, 일 년 사이에 20억원이 늘어 24억원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 재산이 어떻게 늘었나 하는 것도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언론이 알려주어야 했지요. 그 사람은 그 전에 부인을 잃고 홀로 지내던 사람인데, 1999년에 재혼을 했어요. 그런데 재혼한 부인이 친정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20억원이에요. 한 가족의 재산을 합해서 신고하니까, 24억원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재산 증가는 어떤가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재산 증가가 아닙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 사람은 오히려 공직에 있다는 이유로 사생활이 다 노출됐던 겁니다. 공직자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겠지요. 그러나, 이것을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부각시켜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중앙일간지가 그 사실을 가지고 기사를 썼습니다. 그 제목이 '재혼으로 굴러온 20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웃었지요? 왜 웃으셨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재미있어서? 다 이유가 되겠죠.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은 중앙 일간지예요. 그렇게 제목을 뽑은 기자에게 그 공직자의 결혼은 어떻게 비춰졌을까요? '넝쿨째 굴러온 호박', 즉, 횡재로 보였던 걸까요? 제가 보기에 그 기사는 인권침해 수준이에요. 그 공직자를 이렇게 희화화할 수 있는 권리가 언론에 주어져 있습니까? 저는 이 기자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아무 잘못 없는 공직자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론과 권력과의 관계는 항상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지만, 이런 부분은 쉽게 지나칩니다. 제가 80년대에 기자 생활을 할 때는 언론이 만들어내는 기사가 불량품이 되는 이유가 권력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권력만 아니면 우리는 아주 좋은 상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이제 우리 언론은 정치 권력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는 달리 기사가 불량품이 되는 원인으로 이제는 외적 요인보다 내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97년 12월에 IMF 경제 위기를 맞게 됐습니다.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고, 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쳤고, 중산층이 무너진다는 아우성이 들려왔습니다. 실제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는 걱정스런 진단도 나왔습니다.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한 방송사에서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취재했어요. 연예인들이 다 부자는 아니지만 일부 돈 많은 연예인들은 좋은 차를 타고 다니지요. 그 방송사에서 탤런트 A 씨는 벤츠를 타고 다니고, 가수 B 양은 BMW를 타고 다니고, 영화배우 C 씨는 볼보를 타고 다닌다고 보도를 했어요. 이건 팩트(fact, 사실)지요.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재구성이 됐습니다. "(거리에 노숙자가 넘쳐나고,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는 등 우리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일부 연예인은 (철없이 아파트 한 채 값에 가까운)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고 말입니다. 괄호한 부분은 이런 뉘앙스로 재구성이 됐다는 뜻입니다. 이 보도가 나가자, 과연 시청자들은 분노했습니다. 나라 사정이 이런데, 돈 좀 있다고 어떻게 고급 승용차만 타고 다닐 수 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지요. 시청자들의 반응을 접한 A 씨, B 양, C 씨는 얼마나 놀랐겠어요?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 보도 때문에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되었어요. 그 연예인들은 깜짝 놀라서 전부 차를 팔고 국산차로 바꾸었어요. 그런데 방송사에서는 한 달 뒤에 또 이런 보도를 했어요. "우리 방송의 보도가 나가자, A 씨는 벤츠를 팔아 체어맨을 샀고 B 양은 BMW를 팔아 엔터프라이즈를 샀고 C 씨는 볼보를 팔아 그랜저를 샀다"고. 이런 보도를 한 기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 기자에게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겠죠. 애국심이지요. 그런데, 그게 과연 애국일까요? 사실 이런 보도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빈부의 격차를 캠페인으로 해결할 수 있나요? 부자를 비난해서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나요? 제가 94년부터 96년 말까지 워싱턴에서 특파원을 지냈는데, 그 때 한미 통상 분야의 제일 큰 이슈가 자동차 문제였어요. 미국은 우선 자동차 무역의 엄청난 역조를 수치로 제시하면서, 한국의 높은 세금과 외제차 광고 금지, 매장 면적 규제같은 제도적인 문제와 함께 외제차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적 거부감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미국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연예인 외제차 고발(!)'과 같은 보도가 나가면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관의 상무관들이 얼른 녹화를 해요. 그리고는 통상 협상 때 그것을 자료로 내놓지요. "한국에서는 일부 연예인들이 외제차 타는 것 가지고도 저렇게 비판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장사할 수 있겠느냐"며 항의를 하지요. 그런 항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제는 애국의 기준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몇 가지 예를 통해, 어떤 사실이 기사가 되기 위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말씀드렸어요. 이제는 우리의 신문이나 방송의 기사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리 방송 뉴스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2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갈수록 절감하는 건 언론사가 됐든 기자 개인이 됐든 정직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느 언론사든 기자든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걸 나무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최소한 정직해야 돼요. 이것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직업 윤리의 문제이고 프로패셔널리즘의 문제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축소하거나 과장해서는 안 되는데, 부끄럽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솔직히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데, 우리 언론이 그것을 따라 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 언론은 겸손하지도, 정직하지도 않고, 게다가 전문성마저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 언론은 스스로 내부를 돌아 봐야 합니다. 이제는 권력과의 관계에서 바로 서는 것 외에 우리 언론에 또 무엇이 절실하게 요구되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입니다. 제가 앞에서 '기사는 기자가 쓰는 것'이라는 정의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 정의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기자가 '보는 만큼' 기사가 나올 거예요. 또 기자가 '아는 만큼' 기사가 정확해져요. 그러니까, 기자는 많이 보고, 듣고, 많이 알아야 해요. 물론 단순히 많이 보고 많이 아는 것 이상이어야 하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사에는 기자의 '가치'가 녹아 들어가기 때문에 바른 역사 의식과 가치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기자가 세상을 보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상업성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장사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문이나 방송이나 입장이 같아요. 신문은 발행부수 경쟁에, 방송은 시청률 경쟁에 빠져 있지요. 아까 '결혼으로 굴러 들어온 20억'이라는 기사를 낸 중앙 일간지 기자의 내적 욕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일단 눈에 띄어야겠다는 것이겠지요. 그 제목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다면 그것은 일단 성공한 편집이에요. 단순하게 보면, 그 제목이 튀어보겠다는 한 기자의 욕구에서 나온 것 같지만, 넓게 보면, 그것은 신문을 많이 팔아보려는 언론사의 상업적 욕구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스포츠신문 1면에는 왜 꼭 옷을 벗은 여자들 사진이 실리는지 짐작하시겠지요? 지난 번에 'PD수첩'을 보니까, 벗은 여자의 사진을 낼 때 신문이 훨씬 더 잘 팔린다는 거예요. 이런 상업적 의도는 워낙 드러나 있으니까, 누구나 다 그 저의를 알아요. 그러니, 대처할 수가 있어요. 이를테면, 신문의 선정성을 방지하는 위원회도 만들어지고 시민단체의 항의도 빗발치지요.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이렇게 벗은 여자 사진처럼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상업적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 상업성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이 사회 문제를 다룰 때 진지함이 줄어들어요. 진지하면 재미없고, 재미없으면 독자나 시청자들이 안 본다는 거지요. 이게 큰 문제입니다. 저는 4년 동안 해왔던 '뉴스데스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어요. "4년이 지나면서 우리 언론이 정치 권력 못지 않게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고,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힘만큼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해 늘 자문해 왔다"고 말입니다. 사실 힘이 강해지면, 책임도 커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언론이 상업적인 동기에 의해 의제 설정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사회가 어떤 현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현안을 다루는 언론의 의제설정 방식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고리채에 관한 기사 보셨죠? 몸을 담보로 한 고리채. 일 년 금리가 600%였나요? 그걸 어떻게 갚겠어요? 꼼짝없이 노예가 되는 거예요. 그런 사례가 그렇게 많으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언론에서 다루게 될 때는 부각되는 게 당연하지요. 많은 국민들이 우려하고 개탄했습니다. 그 때 정부가 무엇을 했습니까? 연 60%로 이자를 제한하는 이자제한법을 만들었어요. 제가 경제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그런 식으로는 절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정부의 그런 결정은 나오기까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요? 언론이 어떻게 의제설정을 하느냐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언론이 그 사례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니까 국민의 여론은 들끓죠. 여론이 들끓으니 정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얼른 법을 하나 만든 거예요. 하지만 그 법으로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어요. 시장은 더 음성적이 되고 그나마 그렇게라도 고리채를 얻어 쓸 수 있던 사람은 더 힘들게 되지요. 고리채가 지하로 들어가면 법망을 피해나가느라 이제 위험수당까지 더 붙게 됩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을 하느냐 하는 것이 결국 그 사안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수단을 가지고 있는 정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새벽 두 시에 백악관 경내에 경비행기가 추락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틀어보고 깜짝 놀랐지요. 물론 큰 뉴스죠.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나라 청와대 앞마당에 경비행기가 떨어졌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경호실장, 수도방위사령관, 공군의 무슨 책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겠지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몇 달이 지나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백악관 담장 길을 걸어가다가 코트에서 무언가를 딱 꺼냈는데, 기관총이에요. 백악관을 향해 기관총을 드르르륵 쏴버렸어요. 백악관의 유리창이 깨지고 난리가 났지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범인은 곧바로 잡혔지요. 이런 일이 연달아 일어났는데도 미국 언론과 정부의 대응을 보면 참 놀라워요. 당시 미국 언론은 물론 그 사실을 크게 다뤘어요. 백악관 경호 시스템이 어떻게 됐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언론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 백악관 경호실 차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은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어떻게 일하고 있나 알 수 있도록 국민이 백악관에 충분히 다가갈 수 있는 접근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대통령에 대한 경호도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상충하는 부분에 대해 항상 고심하고 있다. 대통령 경호를 위해 국민의 접근권을 희생시킨다면 백악관으로 들어서는 통로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으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곤란하다. 접근권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대통령에 대한 경호에 만전을 기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우리는 연구하고 있다." 그 일 이후 누구도 쫓겨나지 않았어요. 언론도 정부가 무책임하다고 비난을 안 해요.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지금도 연구하고 있을 거예요. 저는 이것이 사회의 성숙도와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자제한법 하나 던져 놓고 끝냈습니다. 그리고,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실제 책임이 있는 사람보다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곧바로 쫓아내고 넘어가지요. 겉으로는 굉장히 신속하고 효율적인 책임 행정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더 무책임해요. 제가 얼마 전 한 잡지에 '개각의 역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대개 실패한 정책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만, 실패한 개각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아요. 잦은 개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일관성 없는 정책들을 만들어 냈지요. 결국 정책이 실패해서 개각을 했는지, 개각을 자주 하다보니까 정책이 실패했는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게 됐어요. 실제로 우리 정치에서 개각은 국면전환을 위한 상당히 절묘한 수단이에요. 개각을 하고 신문이나 방송이 며칠 동안 개각 관련 기사로 뒤덮이다 보면 개각의 배경이 되었던 국정실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흐려집니다. 작년에 국정 쇄신 문제로 정가가 떠들썩했었지요? A 최고 의원이 주장하기를 B가 물러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여론 때문에 B는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언론의 태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정쇄신 논의가 나오게 된 배경은 온 데 간 데 없고, 누가 누구와 싸웠는데 다른 누가 편을 들어줬다는 둥 권력 싸움만 다루었어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언론이 어떠한 방법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정부도 거기에 맞춰 대응하게 됩니다. 언론이 만약 문제의 핵심을 진지하게 다루었더라면, 결국 정부의 조치도 달라졌을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의약분업 문제를 우리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의사가 나쁘다고만 썼지, 문제의 본질은 실질적으로 거의 다루지 못했어요. 많은 국민들이 의사들에게 돌을 던진 후에 나아진 것이 무엇입니까? 결과적으로 언론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충분히 독립해 있고, 상업성에 찌들지도 않고, 전문성을 가지고 진지하게 사회 문제를 다룬다면 정부의 대응 방식도 확실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당장 오늘밤 뉴스부터라도 유심히 보면서 언론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는지 그에 따라 어떤 여론이 형성되고, 정부는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 이슈를 가지고 면밀히 추적해 본다면, 좋은 논문거리도 될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은 여담인데 제가 어딜 가든지 제일 많이 받는 질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중에 정치를 하겠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뉴스를 끝내고 옆에 앉은 여성 앵커와 얘기를 나누던데, 그게 무슨 내용이냐는 겁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저는 정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학을 전공한 저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우리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는 남의 눈, 남의 기준에 의해 좋은 자리라고 하는데 제가 앉게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족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또 하나. 뉴스를 끝낸 후에 여자 앵커와 특별한 얘기를 나누는 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왠지 싸운 것 같고, 자연스럽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건네게 되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강연일시 초청연사   강연제목
144 2001-9-13 신경림   사이버 시대의 시
143 2001-6-7 정운영   세계의 유행과 우리의 삶
142 2001-5-31 박인수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음악회를 겸한 강연)
141 2001-5-24 이영희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의 미
140 2001-5-17 이인호   사회구조와 개인윤리
139 2001-5-10 이인용   가치와 세상(Reality)과 나
138 2001-5-3 이태복   21세기 새로운 사회, 젊은이 어떻게 살 것인가
137 2001-4-19 윤종웅   대학생활과 사회생활
136 2001-4-12 권혁조   21세기 영상산업
135 2001-3-29 황수관   뉴 밀레니엄 시대의 건강 관리
134 2001-3-22 박원순   한국의 시민사회와 21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