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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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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특강공지

  강연제목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132 회
  초청연사 조선희 (前 씨네21 편집장)
  강연일시 2000년 11월 23일
  강연장소 본부관 학술회의장
  조회수 24906 회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이 제목 좀 낯익으시죠?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란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염두에 두고 지어 보았어요. 이것은 '한국에서 남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이런 강연의 제목이 되어서는 안 되죠. 여성의 문제가 더 이상 다큐멘터리, 강연의 제목이나 주제가 될 수 없는 시대가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 여성으로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과학이 발달해서 남자가 아기를 낳기 전에는 여성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거예요. 전에 제가 한 대학신문 기자 단체 워크숍에서 강연을 한 뒤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어요. 대학 졸업 후 결혼과 직장생활을 함께 해나가고 싶은 학생에게 손을 들라고 했더니 그 중 절반이 손을 들었어요. 그런데 졸업 후 직장만 다니고 결혼은 하지 않을 사람을 조사했더니 아무도 없었어요. 나머지 절반의 의견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그 가운데 한 학생이 말하길 졸업하고 우선 취직을 했다가 결혼하면 그만둔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제가 굉장히 놀랐어요. 요즘 여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저는 78학번인데 제가 학교를 졸업할 때는 여자들이 취직하기도 어려웠지만 취직을 하더라도 결혼하면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저는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 모두 가치가 있는 일이고 뭐든지 일단 끝까지 다 해보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게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요즘엔 세상도 많이 바뀌었는데 여성들의 생각은 왜 그대로일까 싶어요. 많이 바뀌긴 했지만 한국 사회는 지식인 여자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신문에서 '한국 사회는 남자들의 공동 사회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보았는데 다분히 공감이 가요. 유엔 개발 기구에서 해마다 인간 개발 지수를 조사하는데 그 가운데 남녀 성차별에 관한 항목이 있어요. 그것을 보면 한국이 얼마나 여성 인권에 있어서 후진국인지 알게 되지요. 1999년도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3.7%예요. 조사 대상 156개국 가운데 132등이에요. 한국보다 비율이 더 낮은 나라가 24개국뿐입니다. 그 24개의 국가를 찾아보았더니 회교국가가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파푸아뉴우기니, 피지 같은 작은 섬나라들이에요. 그러니 한국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알겠죠? 그리고 행정관리직의 여성 비율은 116개국 중에 112등인데, 재미있는 것은 여성 취업률이 130개국 가운데 27위라는 거예요. 한국의 GNP 순위가 23등쯤 되거든요.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은 잘 살고 여자들 교육도 많이 시키지만 여자에게 사회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는 것은 결사적으로 막는 국가라는 얘기지요. 요새 여자들이 성공했다고 하는 분야는 대체로 예술이나 방송처럼 순전히 개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곳뿐이에요. 경제계나 정치계 즉 사회 권력과 연관된 분야에는 좀처럼 여자들이 진출하지 못하고 있어요. 1982년 제가 기자지망생으로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다녔을 때를 생각해보면 더 아득하고 한심해요. 그 당시에는 여성을 뽑는 신문사와 방송사가 전체 중에서 절반밖에 안 됐어요. 제가 입사한 연합통신 수습기자 열 명 가운데 여자는 저 혼자뿐이었거든요. 그 때 동아일보에서는 입사한 어떤 여기자에게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각서까지 쓰게 했어요.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셈이죠. 그러나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아요. 그렇다면 이제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갈까, 이런 얘기를 해볼까요? 직장에서 새출발하는 여성들의 경우는 참 어려울 거예요. 제 경우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때 정말 좌절도 많이 했고 황당한 일도 꽤 겪었어요. 처음에는 정말 열심히 했지요. 남자들과 똑같이 하면서도 좀 더 잘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어요. 그 당시 여자는 사건 보도 기자를 시키지 않았지만 저는 예외였어요. 경찰서에서 야근을 할 때 시체부검에 참관하기도 했는데 옆에 서 있던 남자 기자가 쓰러지는 일도 있었어요. 그 때 부검했던 시체는 연탄가스로 죽은 열 한 살 짜리 여자 아이였어요. 시체가 들어오면 처음에 눈꺼풀을 핀셋으로 까뒤집어서 눈을 봐요. 그 다음엔 질 안에 정액이나 다른 이물질이 있나 살펴보지요. 그러고 나서 톱으로 두개골을 써는데 겉이 굉장히 딱딱해서 톱질할 때 거의 흥부네 박타는 소리가 나거든요. 그러던 중에 옆에 서 있던 남자 기자가 퍽 쓰러졌어요. 곧바로 실려 나갔지요. 나중에는 부검 참관하다 쓰러진 기자라고 두고두고 소문이 나더니 결국 일 년 뒤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말았어요. 그 후로 저는 절대 그런 식으로 퇴출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의식이 강해졌던 것 같아요. 수습이 끝나고 부서 배치를 받을 때 저는 경제부를 희망했어요. 처음에는 경제부에 배치됐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문예부로 바뀌었어요. 알아보니까 어떤 선배의 로비 때문에 제가 여자들이 많이 가는 문예부나 생활부 쪽으로 가게 됐던 거예요. 저는 정말 일도 열심히 하고 술자리도 절대 빠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차별을 받게 됐으니 얼마나 분했겠어요? 국장 앞에 달려가 항의하며 펑펑 울었지요. 또 하나는 제가 경찰서에 드나들던 수습 기자 때의 일이에요. 다른 기자들과 술을 마시고 헤어졌는데 선배 하나가 여관을 잡아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방에 들어와서 저를 덮치는 거예요. 거의 난투극 끝에 그 사람을 쫓아냈는데 나중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혼자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이 사실을 폭로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그 선배와 여관만 안 가고 그냥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면서 지냈지요. 제가 기자생활을 20년쯤 하고 나서 되돌아보니 여성이 직장생활 하는 것도 어렵지만 한 직장에서 정년퇴임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부장도 해봤고 '씨네21' 창간에도 참여했으니 기자로서 불운한 경우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실 절반은 성공 절반은 실패한 셈이죠. 기자로서 편집국장이나 그 위까지는 올라보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소설을 쓰는 게 꿈이라서 결국 기자생활을 접었지만 직장에서 더 큰 가능성을 보았다면 그만두지는 못했을 거예요. 직장생활에는 확실히 여러 차별이 존재해서 재능있는 여성들이 불리하게 밀려나는 게 엄연한 사실이에요. 그러나 여성들 자신이 스스로 자각을 하고 좀 더 도전적으로 부딪혀본다면 이 사회가 훨씬 빨리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여기자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여기자들이 신문사 안에서 활발하게 움직인 덕분이에요. 가령 한겨레신문 안에서도 여기자들이 조직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장이 새로 바뀌면 사장을 찾아가 우리의 의견을 전달했어요. 다른 신문사들의 여기자들은 어떤 식으로 배치돼 있다, 한겨레신문의 상황은 지금 이런데 어떻게 해달라는 식으로 의사를 표명했죠. 저도 부장을 지냈기 때문에 그런 대표단에 많이 끼기도 했어요. 한겨레신문은 진보매체이고 요즘은 여성 고급 인력도 많아졌기 때문에 여기자들을 키워서 활용해야 신문이 훨씬 산뜻해지고 탄력 있어진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을 했지요.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 조금씩 사회 각 분야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육탄공격을 했기 때문에 벽이 조금씩 깨진 거지요. 가정에서의 문제도 여자들에게 쉽지 않아요. 저는 딸이 둘인데 큰 아이가 아홉 살, 작은 아이가 일곱 살이에요. 둘째 아이를 낳은 해에 '씨네2'1을 창간했어요. 그만두기 전까지 일주일에 하룻밤을 샜지만 그 전에는 이틀밤, '씨네21' 초창기에는 사흘씩 밤을 샜어요. 마감 때까지 편집을 맞추기가 참 어려웠어요. 잡지 편집 외에도 기본적으로 조직관리를 하자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는 시간을 내 사람들을 만나야 해요. 그러다 보니 저녁 때 아이에게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져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 두 달 되었을 때 독일에 있는 시어머니께 맡겼어요. 그리고 여섯 살이 되어서야 아이를 찾아왔거든요. 사실 저는 지금도 아이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어요. '씨네21'이 3년쯤 지났을 시기에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제가 좀 편해졌고 그 때 아이를 데리고 왔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어요. 한국 사회도 이미 고학력 사회이니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죠. 이렇게 되면 사회가 복지 문제까지 해결해 줘야 되거든요. 그러나 지금은 저처럼 아이들을 시댁이나 친정에 맡기는 방법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포기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한 세상을 살다가 떠나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죠.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 못한 여성들이 자식들에게 자신의 꿈을 떠맡기게 되죠. 자식에 대한 강박감이 이래서 생기는데 그게 자식에게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요. 엄마가 직접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모습을 자식에게 특히 딸에게 보여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함께 잘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죠. 저도 직장생활에 몰두하다가 별 희한한 일들을 다 겪었어요. 가령 세금 고지서를 제 때 처리 못해서 운전면허도 취소돼 봤고 자동차세를 안 내서 자동차 번호판을 동사무소에 빼앗긴 적도 있어요. 전기가 나가 어두컴컴한 집에서 애들과 애들 봐주는 아주머니가 튀어나온 적도 있고, 전화가 끊긴 적도, 가스가 끊긴 적도 있었어요. 저에겐 일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아이들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누구나 슈퍼우먼이 될 수도 없고 또 섣불리 슈퍼우먼이 되겠다는 생각도 말아야 해요. 가정 일을 남편과 조금씩 분담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여성들은 정치 쪽에서 남성들과 일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결과 국회의원 여성 할당제에 대해 찬반 양론이 거세게 부딪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성 운동가들은 이런 법률을 공조직은 물론 일반 회사에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일례로 이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전 문화부 장관 신낙균 씨는 여성 인력의 수준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활용한다면 아주 무능한 여성 인력까지 마구 끌어다 쓰게 될 테고 결국 이런 법률이 실패사례로 남는 것은 아닌가 우려했지요. 제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실력으로 공평하게 경쟁해야지 그런 할당제의 혜택으로 여성이 회사에 입사한다면 들어와서도 부끄러울 것 같아요. 일반 회사에는 앞으로 자연스럽게 여성 인력이 늘어갈 것이라고 봐요. 남성과 여성으로 변별되는 성향이라는 게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가령 여성을 어떤 정치 고위 관리로 임명하면서 그 분야는 여성의 섬세함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잘 해낼 거라는 논평에 대해 저는 굉장한 거부감을 느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기본적인 속성 자체가 아주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저는 사회생활 하면서 결단력 있고 과감한 여성들을 많이 보아 왔어요. 여성이 오랜 시간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은 감안해야겠지만 모든 분야에서 모든 여성들이 섬세하고 모든 남성들이 과감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제가 직원이 천 명쯤 되는 직장 안에서 일하면서 느낀 여성들의 강점은 무엇보다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해요. 남성들은 목전의 이익에 대해 절대 양보도 안 하고 또 그것 때문에 쉽게 배신하곤 해요. 그리고 연줄을 상당히 중요시 여겨요. 여태까지 사회의 주류가 남성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악습들을 남성들은 자연스레 저지르고 있지만 여성들은 사회의 비주류였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인간적 악습과는 상당한 거리를 갖고 지내올 수 있었지요. 그래서 여성들은 대개 온당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 같아요. 한겨레신문에서도 보통 어느 부서에서나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여성이었어요. 우리 사회가 이런 여성들의 강점에 좀 더 눈을 돌렸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조금 화제를 돌려서 여러분께 저의 대학 시절에 대해 후회되는 점을 말씀드릴게요. 저는 흔히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었어요. 70년대와 80년대에는 대학생으로서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 말하자면 시대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었어요. 그 시절은 군사정권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여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학생들도 조직활동을 해야 했어요. 제가 2학년이었던 1979년에는 10·26 사태가 나서 학교가 휴교되고 그 이듬해인 1980년에는 5·18 항쟁 때문에 또 휴교가 되어 저는 절반밖에 대학에 다니지 못했어요. 물론 공부를 대학에서만 하는 건 아니에요. 사회에 나가 책도 훨씬 많이 읽게 되고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체험하지만 기초적인 지식이나 인문과학적 교양은 거의 대학생 때 습득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저는 기본적인 부분이 참 부족했고 대학생활을 왜 그렇게 보냈던가 후회가 되지요. 사실 그 때 저는 교수보다 우리 동아리 선배가 훨씬 위대해 보였고 학과 공부보다 동아리의 세미나가 더 흥미진진했고 학과 사무실이나 도서관보다 동아리방이나 학교 앞 술집에서 살다시피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학교에 가서 제가 관심있는 강좌를 들을 수 없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여러분은 대학생 때 인문 교양을 성실히 쌓아 올렸으면 좋겠어요. 저는 '씨네 21'을 그만둔 후 소설가 지망생이 되었어요. 원래부터 저는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최근에 이창동 감독이 부친상을 당해서 찾아갔었는데 거기서 한 제작자가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문학 쪽에서 영화 쪽으로 건너오는데 영화 쪽에서 문학 쪽으로 건너가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저는 엄격히 말해 영화 쪽에서 문학 쪽으로 건너간 게 아니에요. 원래부터 글쓰는 게 직업이었고 기자로서 글쓰는 게 재미가 없어져서, 그리고 오래 전부터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자 하는 것이죠. 사람이 살다보면 생활 때문에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살지만 더러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전부터 꿈꿔왔던 것을 이루기 위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일생에 한 번이나 두 번쯤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데 제가 기자생활 20년을 접고 소설을 쓰기 위해 나선 것은 제 인생의 한 두 번쯤인 그 전기에 해당하겠죠. 그런데 왜 시나리오도 아니고 소설이냐고 누군가 물어오기도 하죠. 제가 볼 때 영화를 만드는 일은 너무 위대해 보여서 제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뛰어난 영화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은 이렇게 얘기했어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는 것은 범퍼카 안에서 전쟁과 평화를 쓰는 것이다'라고. 영화를 만들 때에는 수많은 배우들과 스텝들은 물론 배급이나 홍보 등 영화 제작과 관련된 전부를 고려해야 하지요. 이 엄청난 공동작업을 관할하는 감독의 역할은 웬만한 재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공동작업에 20년 동안 참여해 왔고 이제 혼자 글을 쓰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게 제 인생의 꿈이고 모험이지요.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몇 마디 말씀드리고 마쳐야겠네요. 얼마 전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여성들에게 사회에서 살아나갈 철학을 물은 적이 있어요. 미리 철학을 세워놓고 사는 건 아니지만, 저는 여성들에게 정직하고 씩씩하게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은데 자꾸 꾀를 부리면 어떻게 살아 남겠어요? 정직하고 씩씩하기라도 해야 자기 자리를 찾지 않겠나 생각해요. 저는 원칙을 지키며 자기 일에 충실할 때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다고 봐요. 물론 여성들뿐 아니라 모든 남성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겠지요. 그 동안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연일시 초청연사   강연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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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2001-4-12 권혁조   21세기 영상산업
135 2001-3-29 황수관   뉴 밀레니엄 시대의 건강 관리
134 2001-3-22 박원순   한국의 시민사회와 21세기
133 2000-11-30 한상규   『크리에이티브』는 영혼의 접미사!
132 2000-11-23 조선희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131 2000-11-16 인요한   북한의 의료 실태
130 2000-11-9 이해인   나의 삶과 기도의 시
129 2000-11-2 소병용   중동정세와 한국
128 2000-10-19 김성주   Wake up Korea!
127 2000-10-12 개교 제 54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해공, 성곡 그리고 국민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