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bar  bar bar

국민대학교 교육학과

민족애와 인간미를 겸비한 최고실력의 교육전문가 양성

THE DEPARTMENT OF EDUCATION

Home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목요특강공지

  강연제목 중동정세와 한국
  129 회
  초청연사 소병용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
  강연일시 2000년 11월 02일
  강연장소 본부관 학술회의장
  조회수 24563 회
 
오늘 제 얘기가 많은 학생들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지 않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중동 정세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계화된 경제 속에서는 다른 정치·문화권과 무관할 수 없는데 예를 들어 중동사태가 악화되면 우리 경제에 많은 손실이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제 3차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이 열렸습니다. 제 1차 회의는 1996년 방콕에서 열렸고, 제 2차 회의는 1998년에 영국 런던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제 4차 회의는 앞으로 2년 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릴 것입니다. 왜 중동 얘기는 하지 않고 ASEM 얘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세계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ASEM 개최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NGO그룹에서 ASEM 개최에 많은 반대를 했습니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세계화가 되면 무역과 투자의 국경이 허물어지게 되어 각 나라 정부가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해 필요한 보호막을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경이 있을 때는 불리한 무역을 통제·봉쇄할 수 있었는데, WTO로 대표되는 제도 안에서는 어느 나라 회사든 생산성이 높고 효율성을 갖춘 회사가 시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 국내 시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효율성을 갖춘 외국 회사들, 투자가들이 들어오면서 국경의 보호 속에 비능률적·비생산적으로 운영·관리되던 회사들이 견뎌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내 시장이 잠식당하고, 많은 피고용자들이 실직하게 되니까 NGO그룹에서 ASEM 개최와 세계화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세계화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경제와 완전히 유리돼 생활한다면 모를까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인 것입니다. 세계화가 거역할 수 없는 대세라면 그 거친 파도를 어떻게든 잘 타고 넘어야만 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을 못해 우리가 어떤 수모와 고통을 겪었습니까? 세계 변화의 모습을 정확하게 읽고, 대세의 파도를 타고 힘을 기른 일본에게 우리가 어떤 굴욕을 당했습니까?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도 그때와 같다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미 관계, 대북 문제에서도 심정적인 대응보다는 우리가 현실에 얼마나 잘 대응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꺾을 수 없다면 악착같이 그 추세에 맞추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럼 이것이 중동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중동 문제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원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들을 혼동하는 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도 현실적으로 유일한 방안이 있다면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만 지금의 중동 문제는 해결됩니다. 오늘 미국 뉴스를 보니까 이번 중동사태로 인한 사망자가 175명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인 147명, 이스라엘인 28명이라는 실로 엄청난 희생을 낳은 겁니다. 이번 사태는 9월 28일부터 시작되었는데 한 달이 조금 지나는 사이에 175명의 사람이 죽었으니까 엄청난 사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럼 지난 날 중동사태에 대한 제 경험을 잠시 얘기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1989년, 저는 쿠웨이트 대사로 임명받았습니다. 1년 뒤인 1990년 8월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해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당시 이라크는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8, 9년 동안 이란과 전쟁을 치룬 상황이었습니다. 이란이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 혁명 때문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이라는 항구를 욕심 낸 사담 후세인이 이란에 쳐들어 간 것입니다. 10년 전쟁 끝에 표면적으로는 이기고 진 자가 없었지만, 사실상 이라크가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이라크는 침공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수많은 젊은이만 희생시키고,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당연히 국민의 원성이 높아지고 정치가 혼란스러워지니까 그걸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쿠웨이트에 쳐들어갔던 겁니다. 쿠웨이트 침공의 직접적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수요공급의 원칙상 기름생산을 줄여 값을 올리자는 게 사담 후세인의 생각인데, 쿠웨이트가 여러 가지 국내 사정으로 산유국 간에 약정한 할당량 이상으로 기름을 생산한 것이 침공의 한 가지 이유입니다. 당시 200만 배럴을 할당량으로 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쿠웨이트에서 250만, 300만 배럴까지 기름을 채취해 국제유가가 내려간 건 사실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쿠웨이트와 이라크 국경에 겹쳐있는 라말라 유전지대가 원인이었습니다. 이 지하 유전 지대 중간을 가로질러 국경선이 그어져 있는데, 어느 한편에서 기름을 다른 편보다 많이 그리고 빨리 뽑아내면 국경 건너편의 기름이 그쪽으로 빨려 나간다고 이라크는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 땅 속에 있는 기름을 누가 효율적으로 뽑아 내느냐하는 묘한 경쟁상황이 발생했던 겁니다. 이라크가 이란과 전쟁을 하느라 여러 가지 장비가 노후돼 생산량이 늘어나지 않는데 반해 쿠웨이트는 그 간 계속 시설투자를 해온 결과 기름을 많이 채취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라크 쪽에 있는 기름이 쿠웨이트 쪽으로 자꾸 흘러가니까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석유를 훔쳐간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십 몇 억 달러를 쿠웨이트 왕에게 청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이라크 국내 사정이었고, 전쟁을 결심한 사담 후세인이 트집을 찾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로 인해 7개월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중동사태가 우리와 무관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한국 교민들 때문입니다. 그 당시 쿠웨이트에는 한국인 350명이 살고 있었고, 현대와 대림이라는 회사가 제법 큰 도로 공사와 전기배선 공사를 맡고 있었습니다. 쿠웨이트 대사였던 저에게는 작업반은 물론 350명이나 되는 교민들을 안전하게 철수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활한 사막을 자동차로 달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를 지나 요르단 수도인 암만까지 이동한 후, 미리 준비해 둔 비행기를 이용해 교민들을 서울로 옮겨오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ILO는 열대지방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낮 최고기온이 섭씨 50℃가 넘으면 야외작업을 중지시켜야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그런 더운 날씨에 일주일 간 2000㎞를 강행군하는 철수였습니다. 중동사태로 인한 우리 교민들 피해는 무척이나 컸습니다. 무역이니 원유조달이니 하는 문제들도 많지만 중동사태가 어려워지면 몇 천 명의 교민들이 또 다시 그런 고초를 겪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 전쟁은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격퇴하면서 7개월 후에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9년은 소련이 허약해지면서 냉전 체제가 무너지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 소련이라는 패권경쟁국을 잃어버린 미국도 상당 부분 중동 문제에 방관할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사담 후세인 자신의 배후에 소련이 없다면 미국이 발 벗고 나설 이유가 없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15, 16개국이 국제군을 만들어 쿠웨이트를 원조하는 의외를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후세인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시가 얘기했던 소위 '새로운 국제질서(New International Order)'였습니다. 그전의 국제질서가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공동관리 체제였다면, 소련이 몰락해 버린 후 미국이 단독으로 국제질서를 관리하는 새로운 세상이 됐다는 것이 '새로운 국제질서'입니다. 바로 그 '새로운 국제질서'가 정착한 것을 후세인은 몰랐던 겁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미국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 체제 속에 지금 우리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거운 걸 오래 올려놓으면 용수철의 탄력이 약해지듯 국제 질서도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국제질서'에 조금씩 틈이 생기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지금의 중동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고 생각한 아랍국가들이 미국의 관리 체제에서 빠져 나와 직·간접적으로 그것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좀 더 핵심으로 들어가서 우리와 중동사태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국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적 측면이고 그 다음이 정치안보적 측면입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원유 대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동에 대한 우리나라의 원유의존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1999년 우리나라가 수입해서 쓴 원유의 72.4%를 중동에서 수입했고, 1998년에는 원유의 75.9%, 97년에는 73.9%를 중동에서 수입했습니다. 통틀어 얘기하면 중동에 대한 원유 의존도가 대략 73∼75% 정도인 것이죠. 중동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원유공급이 끊어지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73∼75%의 원유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난 17, 18세기가 석탄을 주연료로 하는 석탄문명이었다면, 최근 70, 80년 동안은 석유문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유를 얻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로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중동사태는 우리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참고로 원유 수입을 돈으로 환산하면 1999년에는 130억 달러, 1998년에는 78억 달러, 1997년에는 120억 달러를 지출한 게 됩니다. 금년에는 연말까지 200억 달러를 지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밖에도 약간의 천연가스를 수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우리가 중동에 수출하는 물품도 있습니다. 대개 여러 가지 제조·공산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동 각 국에 수출한 기록을 보면 1999년에 43억 8천 달러, 1998년에 65억 달러 어치의 상품을 팔았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수출량에 4.5%를 차지하는 수치입니다. 여기까지 볼 때 무역역조가 엄청나게 크지만, 건설부문에서도 중동은 우리에게 큰 시장입니다. 중동 건설시장에서 우리나라는 1999년에 34억 달러, 해외 건설수주총량의 37.3%에 해당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 이전에도 해마다 비슷한 물량을 통해 지금까지 약 100∼150억 달러 정도를 벌어들였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전망은 어떨까요? 지난 십 년 간 기름값이 너무 싸서 중동지역의 많은 나라들은 채무국으로 전락을 했었습니다. 씀씀이는 많고 기름값은 싸다보니 굉장한 재정압박에 시달려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경제가 호황이던 70, 80년대 초에 투자해놓은 엄청난 시설들이 제대로 유지·보수가 안 돼 낡아버린 실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기름값이 배럴당 30달러가 넘게 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쿠웨이트, 걸프 연안에 있는 나라들, 그리고 이란 같은 나라조차도 기존 시설을 확장·보수하는 한편 새로운 시설을 늘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채비를 갖췄다가 다시 한번 중동시장을 공략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전망은 밝습니다. 그리고 우리 경제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 중 하나인 외국자본, 특히 FDI(직접투자)자본을 중동에서 끌어와야 합니다. 돈이 남아돌아서 물처럼 쓴다는 중동 자본가들이 투자할 곳을 찾고 다닐 때 중동 달러를 국내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로 정치안보측면에 대해서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국제질서'로 관리되는 세계입니다.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입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기분이 나쁘지만 이것이 사실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가 됐건 초강대국이 세계질서를 관리해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군사력이 상당히 약해져 있는 실정에서 중동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면, 미국은 도리 없이 중요한 이익이 걸려있는 중동지역에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잠재적인 군사분쟁 지역에 있는 미국의 군사적 방어능력, 소위 억지능력이 상당히 약화되고, 이 지역들에 불안정한 정세가 조성될 수 있습니다. 결국 중동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우면 우리도 안정과 평화를 구가할 수 있지만 중동에서 군사적인 분쟁이 본격화되면 동북아 지역은 상당한 정세 부담을 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중동과 우리나라는 정치안보 측면에서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중동과 우리의 관계를 경제적 측면과 정치안보적 측면 두 가지로 살펴보았는데, 이 밖에도 문화적 측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아랍과 우리나라는 많은 교류가 있진 않았습니다. 쿠웨이트의 어떤 학자에 의하면 아랍권에 7, 8세기부터 전해오는 고전 중에 신라에 관한 얘기가 한 줄 나온다고 하니까, 당시 아랍권에는 이름만 알려진 정도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다만 최근까지 중앙박물관 관장을 하던 정양모 선생의 말에 의하면 유리 제조 기술이 없었던 신라 고분에서 유리그릇,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는데 아라비아 전래설이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의 사실 외에는 지금까지 문화적 관계는 아주 희미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문화적 관계 역시도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계화된 시대에 잘 살기 위해서는 상품 생산성이 높아야 하는데, 그 생산성에 간접적 요소로 작용하는 문화의 비중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지금 일본경제의 성공에는 문화적 요인이 큽니다. 일본은 자신들을 문화적인 나라로 서구에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사람들의 조롱거리였던 혼다 자동차나 일본 스시집이 일본에 대한 좋은 인식 때문에 지금은 미국 상류문화 깊숙이 자리잡게 됐습니다. 또한 스리랑카에는 캔디라는 오래된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옛 실론 왕국의 수도인데, 거기에 한문으로 불치사(佛齒寺)라고 적혀있는 큰절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일본 근대화를 앞당긴 명치천황이 인도양 한복판에 있는 스리랑카의 불치사라는 절에 직접 서명을 한 종을 매달아 주었다는 겁니다. 이렇듯 일본은 이미 백년 전에 문화홍보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문화홍보 노력이 부족합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선 정부가 문화사업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둘째, 회사들이 상품의 판매증진을 위해 깨끗한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셋째, 해외 문화선전에 개미군단의 역할이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과 저, 국민 모두가 해외 문화선전에 힘써야 할 개미군단이지만 아쉽게도 우린 그 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해외 여행지에서 볼쌍 사나운 짓을 해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쿠웨이트 사람이 저에게 "여보, 대사. 우리나라(쿠웨이트) 사막에 도마뱀이 굉장히 많았는데, 요즘은 보기 어렵게 됐소."라고 하더니, 씩 웃으면서 그 이유가 한국사람들이 와서 다 잡아먹었기 때문이랍니다. 얘기인즉 60∼80년대 중반까지 중동에 많은 한국 근로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보이는 대로 잡아먹어 쿠웨이트 사막에 도마뱀이 멸종 위기에 놓였다는 겁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는 10만 명, 쿠웨이트에는 2만 명 가량의 한국인 근로자가 있었는데, 지나친 과장이겠거니 하고 현지에 있던 현대건설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이것이 사실이랍니다. 이것이 어디 쿠웨이트뿐일까요? 중동 사람들이 한국사람 얼굴을 보면 도마뱀부터 떠올라서야 될까요? 지금부터라도 문화적 홍보가 잘 이루어져야 중동 여러 나라들과의 우리의 관계가 더 좋아질 수 있고 빠르게 세계화되어가고 있는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가 수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중동사태에 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지난 9월말 경에 시작되어 전개되고 있는 사태로 147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28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직접 원인은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리쿠르드 당 당수인 Ariel Sharon이 지난 9월 28일 수백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모스렘이 신성시하는 Al Aqsa 이슬람 사원들이 있는 Temple Mount라는 곳을 시위 방문한 것에 대한 팔레스타인 측의 항의 시위와 이에 대한 이스라엘 측의 과격한 대응조치였습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걱정되는 것은 지난 1987년에서 91년까지 집요하게 계속되었던 인티파다처럼 장기화되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과격해져서 중동지역 정세를 결정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199년의 걸프전쟁 발발이 그때 인티파다로 조성된 당시 중동의 긴장된 정세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중동문제는 오래된 고질병처럼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일대는 2000여 년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어져 왔는데 늘 유태인들과 여러 비유태인 종족 사이에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싸워 왔습니다. 그러다가 7세기 전반에 이슬람 가치를 들고 침공한 아랍 사람이 점령한 뒤에는 아랍이나 터키 계통 이슬람 나라들이 지배하여 왔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인 1917년에 영국이 이곳을 점령하고 오스만터키가 패전함에 따라 1920년에 영국이 통치권한을 국제연맹에서 위임받기까지 한 1300년 동안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통치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거주 인구 구성은 아랍인이 절대다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땅에다 국제연합의 결정을 얻어 1948년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유럽에서 근 600만명의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에 충격을 받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지도자들은 구약성서에 이스라엘 땅이라고 나와있는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나라를 세워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일과 관련해서 역사의 기복을 생각하게 하는 일 중 하나는 이때 소련도 이스라엘 국가창설을 지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200만명 이상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유태인은 약 80만명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양분하여 45%의 땅에 아랍인들의 나라인 팔레스타인을 세우고, 55%에 이스라엘을 세우고, 양측이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예루살렘은 국제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유태인들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고 1948년 5월에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였으나, 아랍 측은 이 결정을 거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서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가 신생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으나 그 이듬해인 1949년 7월까지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이들을 모두 격퇴하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 일이 중동문제의 뿌리이고 시작입니다. 즉, 이스라엘 국가를 지키고자하는 유태사람들과 이 나라를 처 없애고자하는 아랍사람들의 싸움이고, 지난 2000년 이상의 오랜 세월 계속되어온 싸움의 연장이 할 것이고, 이 사실이 또한 중동문제 해결을 지난하게 만드는 한 요소입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주변 아랍국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1956, 1967, 1973, 1982년에 이어서 큰 전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이겼을 뿐만 아니라, 1948-49전쟁에서는 예루살렘의 절반이상을 점령하고 1967년 전쟁에서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하고 유엔이 1947 결정에서 팔레스타인 측에 나누어 준 웨스트 뱅크와 가자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지금은 주변 아랍국가들 중에서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수교했고,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도 제 나름의 사정으로 팔레스타인을 군사적으로 도울 수 없는 처지이니 팔레스타인은 대 이스라엘 투쟁에서 정치와 외교공세와 함께 데로와 인티파다같은 전술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측이 싸워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우선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웨스트 뱅크와 가자를 전부 되찾고, 동부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어지는 예루살렘 일부를 반환받는 일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3년에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가진 협상에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웨스트 뱅크의 일부지역과 가자에서 일정한 자치행정권한을 팔레스타인 쪽에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오슬로 합의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아라파트가 자치지역으로 돌아가고 자치행정기구도 구성하여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집행하기로 한 자치구역 확대작업이 유태인 정착촌 문제 등 중요 과제들에 관한 협상이 천언되어 팔레스타인 측의 불만이 증폭되어 가는 분위기에서, 오슬로 합의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하마스 등 철저한 이스라엘 거부세력의 팔레스타인 일반에 대한 영향력이 꾸준히 증대되어 왔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배경과 전후관계에서 이번 사태가 촉발되었고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얼마 전 미국에서 나온 소식에 의하면 더 이상의 사태악화를 막기 위하여 양쪽이 지금의 폭력사태를 수습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실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언론인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그들도 지금의 사태가 큰 전쟁으로 번져갈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일반적인 관측이고 전망인 듯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수습될 것을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측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정치가들의 통제를 벗어나 더욱 악화될 가능성은 늘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으로만 전개되거나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족적 감정, 군중심리와 그것에 종교적 열망까지 겹쳐지면 이런 사태는 쉽게 이성, 논리, 합리적 해결 가능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북아일랜드에서 몇 백년에 걸쳐서 카톨릭과 개신교가 해마다 수십명을 서로 죽여가면서 싸우고 있듯이, 종교문제가 개재된 이번 중동사태에서 완전한 평화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만 총을 쏘지 않는 소극적 평화 상태가 유지될 뿐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의미의 평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팔레스타인 측이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굴복시킬 수 없고, 이스라엘도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300만이나 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죽이거나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미국이 지배하는 지금의 세계질서, 소위 새로운 국제질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의 안전이 보장되고 그런 속에서 지금과 같은 대결상태가 계속되고 수시로 이번 사태와 같은 긴장된 정세가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비관적 전망이지요. 진정한 중동평화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오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현금의 국제질서와 정세 속에서는 협상을 통한 타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무엇이 큰 걸림돌이고 어떤 문제에 서로 타협이 있어야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는 시간이 없어서 접어 두겠습니다만, 아마, 기국의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슬로 합의가 집행되게 하는 것이 제일 가능하고 또 타당한 평화적 해결 방안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연일시 초청연사   강연제목
134 2001-3-22 박원순   한국의 시민사회와 21세기
133 2000-11-30 한상규   『크리에이티브』는 영혼의 접미사!
132 2000-11-23 조선희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131 2000-11-16 인요한   북한의 의료 실태
130 2000-11-9 이해인   나의 삶과 기도의 시
129 2000-11-2 소병용   중동정세와 한국
128 2000-10-19 김성주   Wake up Korea!
127 2000-10-12 개교 제 54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해공, 성곡 그리고 국민대학교
126 2000-10-5 최의철   남북통일과 4대 강국의 역할
125 2000-9-28 이효인   북한영화를 어떻게 볼것인가
124 2000-9-21 강만길   6·15남북공동선언의 성격과 남북관계의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