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한국 애니메이션의 어제, 오늘, 내일

근래에 들어와서야 우리나라는 영상문화, 영상산업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이 분야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일본애니메이션과 우리 애니메이션을 비교할 때 열등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은 일선에서 작업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있다고 통감하면서 앞으로 우리 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전에 있어 실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겠지만 현재 애니메이션이나 전자게임 분야는 일본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습니다. 전체 세계 시장에서 일본애니메이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70%이지요. 이것은 단순한 비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문화의 영향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외화벌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대공세에 한동안 디즈니사가 수세에 몰려 있다가 80년 중반 새로운 회장을 영입하면서 대대적으로 재역습에 들어가 그야말로 애니메이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디즈니가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 일련의 작품을 히트시키면서 미국시장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며 새로운 디즈니신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한편 그러한 디즈니의 아성에 미국의 메이저급 회사들이 다시 디즈니사에 대해 반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이웃나라 일본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좋은 작품을 내는데 저는 느끼는 바가 큽니다. 저는 디즈니를 공략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가까운 일본부터 상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일본이 지닌 장점은 무엇이고 일본을 이길 수 있는 방책은 무엇인가를 제 나름대로 분석하고 연구도 해봅니다만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은 없습니다. 물론 이론상으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적용시키는 부분이 용이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부분을 잘 파악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언젠가 일본을 이길 수 있을 것이고 디즈니 공략도 꿈 같은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최근 기획되고 있는 우리 애니메이션은 거의 70여 작품에 이릅니다. 작은 편수는 아닙니다. 그 중 결과물로 완성되는 작품은 일곱 편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약 90%는 최초 기획과 제작 단계에서 거의 손실되고 그나마 일곱 편 정도가 한 해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전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일본에서는 한 해 70여 작품 시리즈가 제작되어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양적으로 일본에 상당히 열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양적인 열세나 자본의 열세에서 벗어나 우리 나름의 색깔을 가져야 어떤 해답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장편만화영화가 나온 때가 1967년입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는 이 작품을 거의 못 보셨겠지만 신동헌, 신동우 형제가 만든 「소년 홍길동」이 바로 그것이지요. 10대 때 그 작품을 보고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1967년은 일본에서 「아톰」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후지TV를 통해 방영되던 해이기도 합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볼 때 그리 큰 격차는 없었는데 30, 4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변화된 양상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1967년 홍길동이 발표된 이후 국산영화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약 30여년 동안 국산 애니메이션은 100여편 가량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결코 적은 양의 작품이 아니었는데 왜 아직도 우리 애니메이션만은 계속 그때의 수준에서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1999년 일본에서는 소위 「포켓몬스터」가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포켓몬스터」는 비단 일본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나가 보면 그 엄청난 열기가 피부로 느껴집니다. 연관산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도 무시 못하지만 일본문화의 새로운 붐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시장 내에서도 이 애니메이션 부분에 관해서는 굉장히 긴장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유럽 같은 경우는 차라리 미국과는 다르게 일본애니메이션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을까 하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보통 우리 애니메이션은 기획부재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기획이라는 것은 참 단순합니다. 보통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앞서 일차적으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획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부터 암초에 걸리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기 위해 펀드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이 펀드라는 것은 누군가가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작 자체가 하나의 사업입니다. 이 사업을 위해 몇 개의 업체가 모여 자본을 구성하지요. 그리고 여기에 대한 수익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겁니다.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일단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업 자체를 재미있게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최초 기획에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그 무엇에 대한 컨셉이 정확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일본식 스타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30년동안 일본애니메이션의 하청일을 해 왔었고, 저예산으로 접근 가능하며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기술이나 단순작업은 나름대로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만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작품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기술, 다시 말해 두뇌에 의한 테크닉은 없습니다. 최근에 개봉된 「건드레스」라는 만화가 있어요. 그 만화는 겉보기엔 한일합작이지만 100% 일본작품입니다. 이것에 우리나라 모영화사가 십몇 억을 투자했어요. 일본과 50 대 50으로 투자를 했는데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똑같이 참패였습니다. 기획이나 독창성은 어려우니까 일본과 합작해서 이익을 나누면 되겠구나 하는 순진한 발상으로 덤볐다가 무참하게 깨진 결과가 그것입니다. 아까 기획이라는 것이 참 단순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 때 제일 먼저 누구에게 보일 것인가 타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타깃을 불분명하게 잡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동용인 것 같은데도 아동용이 아니고, 성인용인 것 같은데도 이야기라든가 대사를 보면 아동용인 그야말로 뒤죽박죽인 것이 이 타깃에 대한 설정이 아직 정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건드레스」가 그렇지만 「헝그리베스트5」도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감독이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로 제작에 참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대학생이나 최소한 청소년을 위한 영화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안가는 것이, 일본을 정복하겠다고 만든 작품이 거의 일본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이 영화는 서울에서 5만이 못드는 정도로 참패를 했습니다. 이것이 「슬램덩크」의 아류다 아니다를 떠나서 대학생을 타깃으로 했다면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어야 했는데 왜 이 영화가 서울에서 5만 미만의 대참패를 했을까요. 이 영화를 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제 딸은 한마디로 스토리가 너무 유치하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봐서 유치한 스토리의 영화를 대학생들에게 보이려고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 어떻게 우리나라 대학생 수준이 초등학교 6학년보다 못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타깃을 잘못 설정한 것도 있지만 우리 대학생들을 너무나 우습게 봤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봐도 유치한 이 시나리오에 거액 25억이 투입되었는데 이것은 낭비예요. 이런 데에 돈을 써서는 안되지요. 적어도 제작자나 기획자는 투자가들에게 깡통을 차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들이 깡통을 차면 그 다음부터는 투자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제 2차, 3차 작품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데 굉장히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리고 이「헝그리베스트5」 앞에 나온 작품이 「돌아온 홍길동」이지요. 1967년에 처음 발표되었고, 약 30년 뒤에 「돌아온 홍길동」이 개봉되었습니다. 물론 관객동원면에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20만이 들어왔으니까요. 그러나 홍길동의 캐릭터는 돌아온 영웅이 아니라 돌아온 졸개였습니다. 이런 식의 영화가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돌꽃컴퍼니의 윤석화 사장이 미래 산업은 애니메이션이라고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꿈을 접었던 계기가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돌아온 홍길동」도 역시 「헝그리베스트5」나 다를 바 없이 일본기술진의 힘을 빌려 제작한 것이라 순수한 국산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얼치기 홍길동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온 것이 「아마겟돈」이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둘리 얼음별 대모험」을 기획하고 있었고 「아마겟돈」 제작자가 같은 만화가 출신이라 서로간에 정보도 교환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아마겟돈」도 사실상 실패한 작품인데 그 원인을 기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20권의 대장편만화지요.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이 20권 분량의 스토리를 80분에 압축시키려고 했던 데서 생겼습니다. 제 판단으론 작품 부분 부분의 중요한 줄거리를 잘 추려서 거기에 기술적인 승부를 걸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 전체적으로 이야기들이 이어지지 않고 자꾸 토막이 난다는 겁니다. 애니메이션도 보통 실사영화와 다를 바가 없어요. 드라마가 중간 중간 맥이 잘리면 드라마적 감동이 단절됩니다. 그 다음, 이 영화의 타깃이 문제였습니다. 원작은 「아이큐 점프」에 연재될 당시 청소년들이 주독자층이었습니다. 그런데 「헝그리베스트5」나 「돌아온 홍길동」이 나온 후 청소년 관객들이 국산애니메이션을 외면하고 있다는데 불안해진 스텝들은 개봉 직전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처음에는 청소년을 타깃으로 시나리오 작업이 이루어졌다가 아동용 영화로 다시 홍보를 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캐릭터가 SF물이니 그 의상이라든가 소품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소품들을 어떻게 디자인했는지 아시나요? 이 옷은 당시 최고의 디자이너가 디자인했습니다. 사실 디자이너는 자기 나름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소품에 대한 디자인은 누가 해야 될까요? 만화가가 해야 된다면 케케묵은, 그야말로 개성 없는 얘기로 치부되겠지요? 그런데 일단 디자인에서 실패를 했습니다. 기획자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펀드를 조성하고 작품을 홍보하는 데는 귀재였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애니메이션의 본류를 무시하고 홍보 쪽으로 너무 치중을 한 거예요. 유명한 디자이너가 동참한 것도 이 영화에 이러이러한 명망있는 인물들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에 극장에서 불이 꺼지면서 거대한 우주가 나타납니다. 이어서 엄청난 내레이션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내레이션으로 3분 정도가 흘러가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무척 중요합니다. 물론 중간부분도 중요하지만 시작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앉아 있으면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으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100% 실패입니다. 왜 그 내레이터는 관객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읊고 있나요? 그 성우는 누구였을까요? 문제의 성우가 바로 C씨였습니다. 이것도 바로 홍보 효과를 노린 거예요. 홍보와 제작은 별도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C씨가 아마겟돈 제작에 영입되었다는 것이 광고로서 대단한 효과를 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그 사람은 순수하게 만화영화가 좋아서 자금이나 투자했다면 보기가 좋았을텐데 텔레비전 모노에서조차도 알아듣기 힘든 그의 목소리를 극장 돌비시스템에서 목소리를 울리게 하는데 어떻게 이 말을 알아듣나요. 기획자가 음향시스템에 대해 점검을 안했다는 얘기지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음성을 80% 알아들으면 굉장히 많이 알아듣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외국영화들은 어떻게 100% 다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시다시피 외국영화를 영어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자막으로 보는 거죠. 이런 차이를 간과하고, 또 너무 자기도취에 빠져 작업을 하며 홍보에 치중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원작자 L씨가 실질적으로 제작에 참여하면서 무슨 실수를 저질렀냐면 흔히 우리 신문에서 얘기하는 '한국애니메이션 세계 3대 강국'이라는 부분에 너무 도취되었던 겁니다. 우리가 실질적인 우리 것은 못만들고 남의 하청을 받아 판 물량이 세계 3위였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겁니다. 한국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몰랐다는 건, 총감독으로서의 책임을 면키 어렵습니다. 어떠한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태까지 단순작업만 해왔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적인 부분을 연구하거나 습득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L씨는 우리 애니메이션이 생각하고 있는 어떠한 부분도 다 소화가 될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제작 과정에서 이 친구가 토로한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화영화에서는 무수하게 폭발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 연출이 생각처럼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가장 기초적이고 원초적인 문제에 봉착하다보니 그때부터 헤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시나리오는 작업과정에서 상당 부분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실사영화는 중간에 시나리오가 수정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새로 재촬영하면 되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재작업에 막대한 시간과 돈이 낭비됩니다. 애니메이션은 약 300명이 동원되어 각 분야별로 자기가 맡은 부분만 작업을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들은 잘 모릅니다. 영화가 토막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기획 단계에서 적어도 완벽한 시나리오를 써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 70편의 애니메이션이 기획되고 있는데 작품이 잘 나오면 7편, 10%가 나온다고 말씀드렸죠. 나머지 90%가 버려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시나리오에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모방송국에서 「마일로」라는 작품이 방영되었는데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편당 3억이 들었습니다. 통상 국내에서는 TV시리즈용은 편당 1억 미만에서 제작됩니다. 편당 3억이면 메이저급은 안되겠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B급 수준입니다. 이 B급 수준의 제작비 3억을 들였는데도 이 애니메이션은 왜 실패를 했을까요? 바로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제가 애니메이션은 드라마라고 했지요? 드라마 「허준」은 다 아는 얘기고, 허구인데 왜 65%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을까요? 일단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을 소재로 적절하게 끌어들인 점도 좋았습니다. 애니메이션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오겠어요? 시나리오 작가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시나리오작가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작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우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시나리오 부분을 대부분 방송드라마작가가 맡습니다. 또는 동화작가가 시나리오를 씁니다. 한번은 소설가 C씨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가 쓴 시나리오가 왜 실패했냐면 바로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특징, 애니메이션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특유의 기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애니메이션이나 TV드라마를 보면 동작들이 거의 정지되어 있습니다. 입만 나불나불 움직이며 얘기하고 인물들이 평행선상에서 왔다갔다하는 상황입니다. 작가가 말을 너무 많이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캐릭터를 고정시킨 채 입만 나불나불 움직이게 그려대니 그야말로 영화가 동작이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가 나올 때 연출하는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물론 연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쉽게 작업하고 돈 벌기는 좋지만 이런 것이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보는 관객들은 하품을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는 겁니다. 애니메이션은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애니메이션은 그림이 움직이면서 그 움직임에 따라 이해가 되야 합니다. 동작에서 이해가 되고 그에 따른 최소한의 언어는 그림에 대한 보조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B씨의 「오돌또기」가 아직 작업에 착수를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못했어요. 이 시나리오를 제가 두 번에 걸쳐 봤는데 첫 번째는 언어의 유희가 너무 남발되었고, 두 번째 시나리오는 문학적으로 굉장히 잘 되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B씨에게,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어떻게 영상으로 만들건가, 제주도 토속방언들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데 이것을 자막 처리할 것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제주도 방언으로 된 글을 읽을 때는 재미있고 맛깔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더빙되어 우리 귀에 들렸을 때, 알아듣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B씨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사람입니다. 만일 무모했다면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작업에 들어갔을지 모르겠지요. 그런데 B씨는 자기가 봐도 답이 없거든요. 그래서 다시 재작업으로 들어갔는데 아직까지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B씨는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안다는 거예요. 보통 다른 나라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작가로서 대우를 받습니다. 그만큼 창조적인 일을 하니까 대우를 해주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감독들은 단순작업 방식에 숙달이 되다 보니 작가적 마인드가 부족합니다. 작가적 감성도 굉장히 떨어집니다. 단지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부분만 익혀서 감독으로 활동하는 식이다 보니 시나리오나 전체적인 기획에서 무능함을 나타낸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본애니메이션을 볼 때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는 작가적 역량을 같이 봅니다. 그러나 우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작가가 없지요. 진정한 작가가 되려면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 문제가 캐릭터입니다. 우리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보면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많은 부분 일본식을 차용했는데 이왕 차용할 것 같으면 현재 일본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스타일을 쓰지 왜 30, 40년 전의 스타일을 가지고 오느냐 하는 겁니다. 작품이 잘 됐다, 못됐다를 떠나서 이 캐릭터들은 하등 쓸모가 없습니다. 그 캐릭터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라든가 그 캐릭터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특정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관객들은 속지 않아요. 관객들을 속이려 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나라 기획자들은 늘 자기 어릴 때를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기 만족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현재 내가 이러한 대상을 잡았다면 이것들의 현주소가 어딘지를 파악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개인적인 재미에 빠져 있다면 현재 급변하는 아이들의 감성을 쫓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캐릭터도 이왕이면 우리의 독창적인 캐릭터를 만들면 좋겠지만 그것이 안 될 경우에는 차라리 가장 신세대적인, 미래적인 캐릭터를 차용하는 게 더 낫겠지요. 캐릭터에 관련된 칼라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병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30년 전 작품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경우 색깔을 굉장히 잘 쓰는데, 미야자키가 SF물을 할 때 주로 갈색톤을 썼습니다. 이 갈색톤은 전체 미야자키작품의 컬러에서 배치가 잘 되죠.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애니메이터들은 미야자키의 갈색을 흉내낸다는 겁니다. 미야자키가 쓰는 갈색은 황금색으로 표현되지만 우리나라 작가들이 쓰는 갈색은 똥색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똑같은 색인데도 색감에서 차이가 나요. 이것은 색의 배치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문제들 때문에 한국애니메이션에 투자가 안되고 악순환만 계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대책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물론 캐릭터도 잘 만들고 시나리오도 잘 쓰고 기획도 잘해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러면 어떻게 잘 할 것인가? 지금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일본 유수의 애니메이션들의 근간이 어디입니까? 그 소스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대체로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출판만화에서 출발합니다. 출판만화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독자들에게 검증되었다는 겁니다. 어쨌든 히트한 작품은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고 조금 잘 못만들더라도 이 팬들은 극장을 찾을 겁니다. 또 여기에서는 캐릭터가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캐릭터 자체도 이미 검증되었고 애니메이션에 맞는 캐릭터로 2차 가공만 하면 되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시나리오와 캐릭터의 모든 소도구라든가 배경까지 책에서 얻다보니 초기 기획단계에서 투입되는 자본을 대폭 줄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일본사람들이 30년동안 이것을 기초로 세계시장을 제패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가요? 한 마디로 우리는 알량한 자존심만 너무 세요. 그래서 기획과정에서부터 출판만화를 상당히 배척합니다. 왜일까요? 출판만화가 괜찮다 싶어서 가지고 오면 작가가 말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이래라, 저래라 요구를 하고 거기다 원작료를 주는 것도 아깝다는 겁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부분이, 최초 기획에 들어가는 투자 대비 원작료를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오는데 왜 이런 생각을 안하고 원작료만 아깝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동안 상업적 성공을 이룬 출판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한 예를 들어서 어떤 기획사에서 출판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2차 디자인으로 가공되는 과정에서 모든 부분이 180도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행하게도 애니메이터들과 만화가들간에 알게 모르게 어떤 불신을 가지고 있어요. 원작이 애니메이션 제작자의 손으로 넘어오는 순간 애니메이터들은 출판만화의 캐릭터를 바꿔버리려고 합니다. 캐릭터를 완전히 바꿔버리고 내용을 완전히 바꿔버릴 것 같으면 원작을 따올 이유가 전혀 없지요. 그들은 출판만화가 대히트를 쳤어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안된다고 자기 식으로 합리화를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부에서는 앞으로의 미래산업은 영상매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제가 지금 출판만화와 애니메이션 양쪽 일을 하고 있지만 애니메이션 쪽은 적건 많건 간에 상당부분 지원이 따릅니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면 저리 융자를 지원받고 때에 따라 달러를 벌면 그야말로 무상지원도 됩니다. 그런데 지금 출판만화의 현황은 어떤가요? 제작사들도 출판만화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보지 않을뿐더러 정부도 역시 홀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출판만화는 문화관광부 신문출판진흥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신문출판진흥과의 한 해 만화 관련 예산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3억이 안 됩니다. 1998년에 게임산업에 투입된 2천억에 비해 출판만화의 3억이라는 것은 납득이 안가는 부분입니다. 정부는 집을 지으면서 지붕이 올라가는 것만을 바라지, 어떻게 기둥을 세우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 애니메이션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데 상당한 애로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 한 기업이 있는데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영화를 만드는 일본 굴지의 기업입니다. 여기서 「세일러문」도 나오고 「드레곤볼」도 나와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 기업은 주로 작업할 때 출판만화에서 소스를 가지고 오죠. 별로 욕심을 안부립니다. 3번 중에 1번 성공하면 대성공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출판만화가 애니메이션산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많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시나리오 문제가 그렇습니다. 출판만화에서 검증된 것을 재구성, 재각색해서 좀더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많은데도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저로서는 답답할 뿐입니다. 앞으로 한국애니메이션이 나아갈 방향은 간단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제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미국에는 대규모 애니메이션마켓이 있습니다. 그 마켓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했는데, 이구동성으로 유럽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하는 얘기가 앞으로 무엇보다 세계시장에서 먹힐 수 있는 것은 가족용 환타지아이고 실제로 이것에는 유럽 펀드들이 언제든 투자할 용의가 있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그 때 한국의 애니메이션 관계자들도 30여명이 참석하여 누구나 그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돌아왔는데, 와서 기획하는 것들은 전부 로봇 소재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SF물을 하더라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엄청난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SF물을 잘 만들어도 일본에 수출할 것입니까? 일본이 아닌 제3국, 나아가서는 미주시장을 겨냥한 전략까지도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기획자들은 SF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나요? 지난 30년동안 익힌 것으로는 새롭게 뭔가를 추구하기에 역부족이고, 또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기존 애니메이터들이 이 작업을 할 게 아니라 정말 참신한 기획자가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학과가 약 44개 대학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신진들을 규합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도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이들을 영입하는데 굉장히 꺼려하거나 인색하죠. 자기들이 배워왔던 세계와 지금 신세대들이 배워온 세계가 다르다는 겁니다. 지금 아이들이 컴퓨터를 통한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지만 기존 제작자들은 수작업 위주로 해오다 보니 이것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대학생들은 소그룹을 결성해 단편작품을 만듭니다. 그 작품들이 다행스럽게도 서울국제애니메이션대회나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같은 데에서 당선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선된 그 날부터 이 작가는 스스로 대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실험적인 작품에서 시작해서 더 큰 세계로 가야될 사람이 일찍 대가로 부상이 되다 보니 그 다음에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작업하기가 굉장히 어렵게 되어버립니다. 어쨌거나 모든 부분에서 자기 스스로 겸손해야 하고, 또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울타리도 넘나들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절망적인 내용만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꼭 그렇게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나름대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갈 노력을 한다면 결코 못넘을 벽은 없다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