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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교육학과

민족애와 인간미를 겸비한 최고실력의 교육전문가 양성

THE DEPARTMENT OF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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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특강공지

  강연제목 복잡계에서 본, 한국의 현재, 과거, 미래
  112 회
  초청연사 김용운 (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
  강연일시 2000년 03월 09일
  강연장소 본부관 학술회의장
  조회수 26214 회
 
반갑습니다. 이 시간에는 복잡계를 통해 본 한국의 현재와 과거, 미래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왜 복잡계냐? 오늘의 시대는 복잡계의 시대, 한마디로 정보화의 진행에 의한 카오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카오스 시대의 본질을 파악하여 우리의 과거를 재해석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따져보자는 의미입니다. 한 20년 전부터 미래학자들은 카오스가 다가오는 것을 예상하고 단절의 시대, 혹은 불확실성의 시대 등 새로운 용어를 사용했고, 그중 가장 상징적인 것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파도」입니다. 모두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삼분법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분법의 세계라는 것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 시작하는 이원론의 세계로, 마음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이분화 된 세계를 말합니다. 이전의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 등 과학자의 수난은 마음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원론이 발표되면서 종교적인 얘기는 성직자에게 맡기고, 과학자는 오로지 물질의 세계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수학에 있어서의 이분법의 세계는 결정론과 확률론입니다. 수학은 결정론의 세계에 있습니다. 2+1=3이라고 언제나 결정되어 있습니다. 함수를 예로 들면, 함수라는 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변수, 이를테면 에다가 일정한 수를 넣으면 하나의 값이 결정됩니다. 이처럼 결정론적인 세계, 이것이 수학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의 대부분이 결정론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확률론은 무엇일까요? 주사위를 던져 1의 눈이 우연하게 나오는 빈도가 대략 6번에 한 번이라는 것이 확률론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만으로 만족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계는 이분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결정론적으로 전개되다가 어느새 확률론으로 가버리는, 말하자면 확률론도 아니고 결정론도 아닌 세계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러한 세계는 지금까지 수학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달에 로케트를 쏘아 올리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5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종이조각이 어디에 떨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또 확률적으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을 카오스라 이름짓고 이러한 세상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 카오스의 세계입니다. 학문의 세계 또한 지금까지는 이분법의 세계에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이과로 나누어서 문과에 있는 사람은 이과의 세계를 모르고, 이과를 선택한 사람은 문과의 세계를 모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습니다. 이러한 지적 세계에 대해 S.P 스노우는 이미 60년대에 '지금의 체제가 전문 바보들만 만들어 지적인 병신만 대량생산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제3의 지적 세계라는 것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자연과학으로만 생각했던 분야가 사회과학의 분야와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얘기합니다. 가령 지금까지는 어떤 물질을 분석할 때 항상 기본적인 원소의 단위로 분석한 후 그것을 종합하면 된다는 기계론적이고 요소환원주의적인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대상은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론적으로만 해석해 온 것이지요. 하지만 사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처음에 태어나서 언젠가는 소멸하는, 즉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죽어 없어지는 유동적인 것이기에 기계론적인 해석만으로는 그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모든 대상을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어 가는 것, 즉 생명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려는 입장으로 돌아갑니다. 학문의 세계가 기계론적이고 요소 환원주의적인 체계에서 생명론적으로 바뀌어지면, 생물학에서의 자기 증식·자기진화의 과정이 조직이나 기업 등에도 적용될 것이고 수학에서도 그것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흘러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겁니다. 가령 숲을 대상으로 연구할 때 나무만을 보고 나무를 분석해서 어떤 화학적인 요소를 알아낸다고 해도 숲의 상태는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방법으로는 살아 있는 인간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계는 기계론적인 세계에서 생명론적인 세계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변화의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동양사상은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왔습니다. 세상을 음과 양으로 나누고, 다시 네 개의 사상(四象)으로 나눕니다. 거기서 다시 팔괘(八卦)로 나눔으로써 우주의 것이 온전히 팔괘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8×8=64, 이런 식으로 주역(周易)은 세상사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유교와는 상반된 입장에 있는 것이 노장사상입니다. 노자는 일생(一生)이 처음에는 道에서 一, 一에서 二가 나오고. 二에서 三, 三에선 萬物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道에서 一이 생기면 거기서 二가 생기는데 이를 또 三分 한다고 보고, 그 가운데 혼돈, 카오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노장사상은 카오스를 중시합니다. 장자는 이러한 카오스에 대해 상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남쪽 나라 왕과 북쪽 왕이 카오스의 왕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고마워서 이 보답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혼돈이 눈도 코도 아무것도 없어 곤란할 것 같다고 생각하여,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질서를 정해 구멍을 뚫었습니다. 눈도 생기고 코도 생기고 모든 구멍이 생겼는데 결국 카오스의 왕은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언가 하면, 혼돈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 담겨 있는데, 거기에 질서를 정해놓으려고 하니까 결국 실체가 사라져 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의 방법론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상을 원자, 분자의 세계로까지 분석해 갔지만 그 대상의 실체는 이미 사라져 버린 겁니다. 따라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카오스 세계에 있는 생명력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두되고 있는 카오스 이론은 이 노장사상의 무위자연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카오스의 생명력을 중시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노장사상처럼 카오스의 생명력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을 가미시켜야 한다는 것이 현대의 카오스 이론입니다. 카오스 이론의 창시자인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혼돈 속에 생명력이 있다고 해서 무위자연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화학자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프리고진은 자기조직은 혼돈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조직은 생명력이 시간의 계열에서 변해 가는 현상입니다. 카오스가 일어나면 그 카오스로 인해 새로운 질서가 생기며, 카오스 없이는 새로운 것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현상은 매우 카오스적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혼란스럽다고 한탄하지만, 이 혼돈 속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는 이 사실을 화학의 세계에서 증명했고, 모든 것은 자기조직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령 마을을 만들라고 명령한 사람은 없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사이에 도시가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이 도시에 어울리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생깁니다. 이러한 자기조직은 진화 과정이나 사회의 성장 과정에서도 나타나고, 지금의 정보화시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카오스라는 것이 무엇이며, 지금까지의 과학과 카오스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은 A이면 B이다, 즉 하나의 원인이 있으면 하나의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율의 세계를 얘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현상에 있어서 A, B, C라는 세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는 그 궤도를 간단히 적기가 어렵습니다. 인간 사회가 복잡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복잡한 것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연구한다면 제대로 현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연구해야 합니다. 카오스의 시대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상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의 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시대라는 겁니다. 이러한 복잡계의 특징 중에 하나가 나비효과인데,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 종로거리에 나비가 한 마리가 날아갔는데, 그 나비가 일으킨 날갯짓 때문에 며칠 후, 혹은 일년 후에 뉴욕에 폭풍우가 올 수 있다는 겁니다. 가령 어떤 정치인이 한 마디의 발언이 일파만파로 영향을 주며 확산되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비효과입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간단한 일이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엉뚱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오스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피드백(feedback)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있는 일어난 일이 다음 상황에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역사의 변천이나 사회현상의 변화에서 과거에 행해진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 현상을 하나로 묶어 카오스 세계에서는 이미 역사성을 과학이론으로 만들어 사회학이나 경제학에서 시스템이론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앨빈 토플러는 이미 20년 전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카오스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전과 같이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가 금방금방 영향을 준다고 겁니다. 그래서 앞서 얘기한대로 새로운 것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시민단체나 제3섹터가 그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정하기도 하고 정부와 시민이 하는 일의 중간을 맡고 있는 하나의 조직이 생긴 겁니다. 또한 그는 카오스시대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나온다고 예견합니다.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가라앉는 타이타닉호의 갑판에 있는 의자를 서로 뺏으려는 꼴과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는데, 타이타닉호는 점차 가라앉아 가는데 거기서 의자를 차지하려고 날뛰고 아옹다옹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세상은 카오스적인 현상을 보이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돌아보고, 이 시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세상이 변하면 반드시 그 변화에 어울리는 영웅이 나옵니다. 옛말에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했습니다. 20세기 산업화사회가 융성할 때는 석유재벌 록펠러나 철강재벌 카네기, 자동차재벌 포드 등 산업화사회에 어울리는 경제영웅이 등장했습니다. 석유, 자동차, 철강 등은 산업사회의 핵심적인 분야이니, 거기에서 영웅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처럼 21세기 정보화사회에도 그에 어울리는 영웅이 나왔습니다. 빌게이츠나 손정의가 그들입니다. 그들은 정보화사회의 특징을 이용해 경제영웅이 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음을 하나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영웅이 나오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영웅이 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 단지 우리 사회는 정보영웅을 만들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한글과 컴퓨터사를 만든 이찬진 같은 사람은 한글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정보의 가치를 인정받았을 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게 만든 소프트웨어를 그냥 공짜로 복사해 사용합니다. 국민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복사를 했는데, 정부가 복사품을 진품으로 바꾼다면 400억을 지출해야 한답니다. 그러니 그는 실제로 수천 억을 도둑질 당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경제영웅이 나오겠습니까? 빌게이츠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경제영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게이츠는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자기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절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정보화사회를 만들 만한 의식이 없습니다. 아니 정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는 농경민의 전통적인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경민은 한곳에 정착해서 일을 합니다. 해마다 같은 일을 하므로, 옆에서 농사를 지으면 그 농사법 그대로 따라서 짓습니다. 그 사람의 농사법을 그대로 배워 짓는 것은 죄가 아니고,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따라서 정보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정보를 베끼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니 정부에서도 복사된 소프트웨어를 쓰는 겁니다. 자! 얼마나 우리의 의식이 뒤떨어져 있는가 한번 봅시다. 카오스라는 것은 그 구성원이 무작위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는데, 이 현상을 자세히 검토하면 그 구성원이 움직이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컴퓨터를 통해 까마귀 떼가 이동하는 과정을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그 결과 세 가지 원칙을 발견했습니다. 우선 속도를 맞추어 가는데, 빠른 놈이 나오면 다른 까마귀들도 빠른 놈에 맞추는 겁니다. 둘째는 무리를 이끄는 놈에 붙어서 갑니다. 셋째 장애물이 오면 흩어집니다. 새떼의 이동에는 이 세 가지 원칙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새떼 같은 행동을 하는 집단을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정치가 카오스 상태입니다. 제 생각에는 철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치인의 행동강령 역시 세 가지로 첫째는 지역차별을 할 것, 둘째는 색깔논쟁을 할 것, 셋째는 오기를 부릴 것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정치인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카오스를 이해하기 위한 겁니다. 이러한 정치현실은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닙니다. 이미 수백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해 온 행동입니다. 지금의 정치현실이 조선시대의 사색당파와 무엇이 다릅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근거를 가져도 궤변을 늘어놓고 오기를 부리는 것이 조선시대의 당파싸움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원임을 자랑하고 세습체제를 유지할 뿐입니다. 양쪽이 다 쇄국을 하고 당쟁싸움을 하니까 눈앞의 것밖에 보지 못하고 나라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었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었고 IMF를 겪었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언제나 차별입니다. 임진왜란은 대책은 세우지 않고 시비를 논하는 당파싸움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제 식민통치도 세도정치와 왕실의 차별에서 일어났고, IMF 또한 한보라는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지만 결국 지역차별 때문에 생긴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리의 행동강령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행동이 바뀌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서 다시 한번 카오스 이론이 나옵니다. 정보화시대에서 손정의나 빌 게이츠가 왜 그렇게 큰돈을 벌었느냐? 그것은 그들이 정보화시대에 어울리는 경제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며, 그건 다름 아닌 록인(lock in)입니다. 컴퓨터의 자판을 보면 자판의 제1열의 순서가 q, w, e, r, t, y입니다. 이는 100년 전 시대와 동일합니다. 지금 보면 그다지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미 표준화가 되어 고정되었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좌측 통행을 하고 미국이나 영국이 우측 통행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빌게이츠는 역시 윈도우즈를 만들면서 그것을 표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w, e, r, t, y라는 것을, 그 소프트를 사용하게끔 록인(lock in) 열쇠로 잠가 버렸습니다. 이는 손정의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플랫폼이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인터넷으로 가는 데는 반드시 각 단계마다 입구가 있으니, 그 입구에 플랫폼을 만들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멈춘다는 말이에요. 그는 그 자리에 미리 플랫폼을 정해놓고 거금을 걸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지금까지 역사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고 똑같은 결과를 얻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사회적인 행동이 록인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민족의 원형이 생기는가? 지금껏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동양사상 중 유교였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식, 즉 한국식 유교사상입니다. 최근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일본이 명치유신 때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이 조선 주자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처음 일으킬 때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찌는 논어 정신으로서 일본자본주의를 일으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나 자본주의는 모두 유교, 구체적으로는 조선 주자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주자학인데, 본고장인 우리는 왜 실패한 것인가? 그건 같은 동양의 유교라도 각 나라의 원형에 여과되어 버려 한국적인 것, 일본적인 것으로 변하여 그 사회의 발전, 또는 역기능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원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중국의 역사를 보면 순임금이 강을 다스렸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황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인민을 동원을 해야 했고, 공사를 관리하는 관료체제가 있어야 하기에 중국의 백성들은 강을 다스리기 위해서 임금의 존재를 필요로 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무사정권은 귀족들이 강을 다스렸고, 실패를 하면 그것에 책임을 지고 할복을 했습니다. 이처럼 일본 사람들에게는 귀족이나 지배자들이 아주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강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없었고, 권력자들은 농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속담처럼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 역할을 하듯이, 농민들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이나 강점기의 3·1운동, IMF 때 금모으기운동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계에서 유래 없는 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강 구조와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원형이라는 것은 마을에서 생겼습니다. 한국의 마을은 어떻게 생겼느냐? 권력자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이 스스로를 방어하려다 보니, 자연히 자기의 마을을 중심으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을 밖의 모든 것은 적이었던 겁니다. 조선시대가 518년간이나 지속했던 이유는 조선 왕조가 정치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조선 왕조 말기에는 8만 개나 마을이 있었습니다. 작은 단위의 마을들이 스스로를 지켜나간 겁니다. 이러한 마을들의 자기 방어는 오히려 서로의 팔을 안으로만 굽히면서 에너지를 분산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더불어 조선 왕조의 불행 중 하나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입니다. 명나라의 태조는 나라를 건국한 이후 제일 먼저 자기의 왕권 확보를 위해 측근의 사람을 모두 죽였습니다. 자신의 친척을 포함해 힘있고 똑똑한 사람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리고는 농민들끼리, 마을끼리 싸움을 붙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니까 청나라가 망할 무렵에 영국이 와서 중국을 위협해도 중국사람들은 외세보다는 옆마을을 두려워해 거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의 경우 명나라를 사대함으로써 그것과 비슷한 체제가 들어왔습니다. 바로 조선 왕조 이방원의 '용의 눈물'입니다. 자기와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제거했을 뿐 아니라 마을끼리 서로 반목시키고 싸움을 시키는 체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 정보화시대의 경제영웅들이 나오지 못하는가? 정보화시대에 어울리는 의식을 우리 스스로가 갖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 성공한 사람은 우리 사회를 떠나 이민을 가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조선시대나 다름없는 의식을 가지고서는 정보화시대에 발맞출 수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인간의 가치관을 바꾼 세 가지 혁명이 있습니다. 우선 농업혁명이 있었고, 그 다음이 산업혁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하나는 지금 우리가 겪는 정보화혁명입니다. 이중에서도 정보화혁명이 인류에게 가장 큰 혁명이 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겁니다. 즉 산업사회가 이루어지고 나서는 다시 농업사회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산업사회에서 얻은 모든 물질적인 이득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단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면 우리는 결코 산업사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보화사회의 특성을 살펴서,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보화시대에서는 농민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적응할 수 없습니다. 농민들은 땅, 부동산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정보화사회의 전통은 유목민들에게 있습니다. 유목민들은 사막을 뚫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실크로드를 개척한 아라비아상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아실 겁니다. 그들에게 땅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정보가 목숨처럼 소중합니다. 사막을 뚫고 목적지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정보가 잘못되면 목숨마저 위험합니다. 그러기에 정보가 생명인 겁니다. 지금 세계적인 넓은 시야에서 볼 때, 일본이나 동양의 경제가 침체되고 미국의 경제가 역사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는 것도 정보화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보화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은 경제의 투명성입니다. 아버지 돈이 아들 주머니에 들어가고, 아들 돈이 손자 돈이 되어버리는 사회는 안됩니다. 경제가 투명할 때 투자를 하는 것이지, 그것이 불투명하다면 투자는 없습니다. 경영과 소유는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교육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가족이 잘살기 위해서 공부해 왔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교육목표는 모두 이도령이 되는 겁니다. 이 도령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해서 15세에 급제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는 지역편중입니다. 이어서 제일 먼저 마누라부터 구하고 친인척부터 보호를 하며 정적 변사또를 싹쓸이합니다. 어렵게 공부해서 권력을 얻어 자기의 지역에 뭘 해준다는 게 지금까지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여자는 어떻습니까? 춘향처럼 잘생긴 남자 잘 꼬셔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시대나 어울리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공부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인내심과 기억력 테스트였습니다. 재미없는 공부를 하면서 인내심으로 참는 겁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모두 한석봉 어머니처럼 자식들에게 무조건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하라고 합니다. 나도 인내심을 가지고 떡을 썰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수학을 풀어라 이겁니다. 그러니 수학시간이 끝나면 머리가 아픕니다. 몰라도 아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해야 하니까 말이죠. 이런 교육방법은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창의력을 가지고 세계 시장에 나갈 수 있는 교육을 해야합니다. 정보화시대에서 동양의 농업민적인 사고방식은 서양의 유목민적인 사고방식에 뒤쳐져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제2차대전이 끝난 후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졌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꿈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다. 동물은 꿈이 없을 것이고 이상이 없을 것이다. 물론 중국인이나 우리도 서양인들처럼 꿈을 가집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거나 바다 속을 가고 싶고 멀리 있는 사람과 얘기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의 대부분이 실현된 것은 서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동양사람들은 그 꿈을 성취하지 못하는가? 이에 프랑스의 주지주의자 발레리(P. Valery)는 서양에만 있고 동양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답이 유클리드 기하학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문제냐? 유클리드 기하학은 '삼각형의 두 개의 변의 합은 다른 한 변보다도 크다'는 것까지도 일일이 증명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가설, 정변, 증명 세 단계로서 어마어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들 모두 경험했을 겁니다. 저는 중학교 때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그렇게 어렵게 가르치는지 이해가 안됐습니다. 개도 쫓겨 도망갈 때는 직선으로 도망가지 지그재그로 가지 않습니다. 개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게 배워왔던 것이죠. 그런데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중요한 것은 가설입니다. 즉 지금 현재의 조건이 있고 증명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를 어기지 않고 차곡차곡 가라는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처럼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반드시 방법이 있고 계획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양사람들이 꿈을 성취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로 서양의 대결정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노인이 하룻밤 동안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얘깁니다. 나는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무척 실망했습니다. 왜냐면 세상에 고기 한 마리 잡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 되나 싶고, 이런 것이 노벨상을 받은 작품인가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단편을 읽고 무척 감동 받았습니다. 그 소설은 '킬리만자로 높이 19800피트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 그 서쪽 봉우리 위에는 말라 얼어붙어 있는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아무도 왜 거기까지 그 표범이 왔는가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만약 검은 표범이 먹이를 얻으려고 한다면 굳이 그 높이까지 오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그 표범은 왜 올라갔는가? 그것은 알피니스의 말대로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는 말과 통하는 겁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결정신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때야 비로소 「노인과 바다」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를 낚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 대결정신을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시인이 있습니다. 가령 한용운 선생은 평생 동안 지조를 지키면서 일본에 대항해 훌륭한 작품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작품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의 시 「해당화」에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 어서 오기를 바랬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는가 두렵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헤밍웨이의 대결정신은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기다림만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오랜 세월 봄을 기다려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해방의 봄을 기다렸고, 독재 체제에서는 민주화의 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매번 꽃을 피우지 못하고 좌절당했습니다. 단지 기다리기만 해서는 봄을 맞을 수가 없습니다. 꽃을 피우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현대적인 고통은 무엇이냐? 조선시대 마을에서 형성되었던 팔을 안으로 굽히는 마음을 청산하지 못한 채 그저 앉아서 봄을 기다리는 겁니다. 한국에 진정한 봄이 찾아오고 좋은 나라가 되려면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이나 권력을 영원히 장악하려는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유클리드 기하학'입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학문을 닦은 지성인입니다. 지성인은 개혁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세계적인 사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벤처산업은 유럽, 미국을 이어 세계 2위이며, 세계 게임시장에서 1등부터 6등까지가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우리의 성장속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똑똑한 임금을 가지지 못하고 건전한 지도자가 없는 불행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했습니다. 일반 대중의 삶에 있어서의 상향심은 세계에서 우리가 최고임은 틀림없습니다. 순간 순간 움직일 수 있는 생명력은 카오스시대에 가장 중요한 질서입니다. 우리는 큰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21세기 정보화시대에는 고루한 조선시대의 올가미 속에서 벗어나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지역차별을 없애야 합니다. 그릇된 원형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지닌 지혜, 생명력, 카오스적인 변화의 양상들은 농업으로 길러진 심성과 완전히 조화로운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목표로 하는 것은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민족이 하나가 되어서 좌절의 역사를 뒤집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겁니다. 우리가 의식을 자각할 때 이 정보화시대라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연일시 초청연사   강연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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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2000-4-6 배금자   언론과 명예 훼손, 프라이버시 침해
115 2000-3-30 정채봉   성인이 왜 동화를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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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999-12-2 윤형섭   문화와 정치발전
110 1999-11-25 김석우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보환경
109 1999-11-18 박종서   형태와 색은 어디로부터 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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