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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교육학과

민족애와 인간미를 겸비한 최고실력의 교육전문가 양성

THE DEPARTMENT OF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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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특강공지

  강연제목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108 회
  초청연사 최일도 (목사)
  강연일시 1999년 11월 11일
  강연장소 본부관 학술회의장
  조회수 25032 회
 
좋은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세상입니다'라는 테마를 가지고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좋은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더러 오해하는 분들도 있어요. 요즘 최일도 뜨더니만 좋은 세상 만났나 보구나, 좋겠다! 비아냥거리도 합니다. 제가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하는 건 환경이나 조건이 좋아져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어서도 아닙니다. 솔직히 저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저를 미워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제가 기독교 최초로 무의탁 노인이나 행려자, 노숙자를 위한 무료병원을 세우려고 했을 때, 많은 후원자들이 뜻과 정성을 모아주기도 하셨지만 절대로 병원을 지을 수 없다고 반대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은 저만 보면 침을 뱉거나 손가락질을 합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 건 좋은 일만 벌어져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환경이 좋을 때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닐 때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도 아닙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저는 아름다운 세상을 청량리 시장 뒷골목에서, 사람의 몸이 돈으로 사고 팔리는 인간시장 한복판에서, 야채나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경동시장 뒷골목에서, 그 후미진 구석에서 깨달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구나 하고 말이죠. 저는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찾아보자고,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데모도 열심히 한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가 70년대 초예요. 유신, 5공, 6공 그 암울한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그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넥타이를 멘 회사원들까지 길거리로 나와 돌멩이를 던졌던 시절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요. 저 역시 저의 손에 돌을 쥐고 군부독재 타도와 조국 통일을 외쳤습니다. 그때는 대통령만 바뀌면 희망이 보일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후로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세상은 여전합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대통령 갈아치워서, 헌법 뜯어 고쳐서, 환경 바꿔서 이왕이면 좋은 조건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세상은 밖의 세상이 변한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아름다운 세상은 그렇게 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변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내 눈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학시절에 꿈도 꾸지 못했던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 11개국을 순례하는 것이었는데,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님들이 유럽으로 순례를 가시는데, 그 중 목사님 한 분이 갑작스러운 일로 못 가시게 된 거예요. 이미 경비는 지불되었고, 그래서 제게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첫도착지가 스위스였어요. 제네바 상공을 나는데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차창 밖으로 그림엽서에서나 보던 제네바 레만호수가 한눈에 펼쳐지는데,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더라구요. 마침 숙소도 레만호수 바로 옆이에요. 그때 저와 한 방을 쓰신 분이 제 은사님이신데, 피곤할 테니 어서 자라고 하시고 잠자리에 드셨는데, 딱 5분만에 코를 고시는 거예요. 그분이 그 날처럼 야만인으로 보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호수를 곁에 두고 잠을 잘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저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숙소에서 나와 레만호수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너무 좋아요. 다시 두 바퀴를 도는데 호수 주변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한 바퀴만 더 돌자 하고 절반쯤 돌았는데 날이 새더라구요. 그런데 숙소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학생이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교수님들이 저를 찾느라고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그중 한 분이 같은 호텔에 묵은 헝가리 목사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신다니까 부탁을 했던 모양입니다. 가시다가 동양인을 보면 동료들이 찾으니까 빨리 숙소로 돌아오라고 전해달라고 말이에요. 호수 주위를 걷고 있는데, 웬 헝가리 분이 서울에서 왔냐고 물어요. 유명인도 아닌데 그분이 알아보는 게 신기하잖아요. 맞다고 했더니 그분이 친구들을 걱정시키면서 여기서 뭐하고 있었냐고 다시 물어요. 그래서 너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분도 저도 영어가 짧았는데, 의사소통이 되더라구요. 20년이 지난, 오래 전 일인데도 그때 그분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아직도 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의 감동이 떠나지 않아요. 그분이 그러시더라구요. 이 제네바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레만호수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래요. 이 호수를 매일 바라보고 사는 이 도시의 시민 가운데도 아니꼽고 더러운 세상, 확 뒤집어졌으면 좋을 세상이라고 불평을 하는 사람이 산다고 말입니다. 제네바가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절반이 안된다는 거예요. 또 레만호수에서 열렸던 미술대회 이야기도 해주셨어요. 전세계 지체장애자 어린이를 데려다가 미술대회를 열었는데, 그때 주제가 평화였답니다.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품은 글자 그대로 평화를 담았더래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푸르며,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잔잔한 호수에는 백조가 우아하게 헤엄치고 있고, 꽃동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 놀아요. 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려진 듯 그림에는 글자 그대로 평화가 가득했답니다. 이 작품이 금상이었어요. 반면에 대상을 받은 작품은 금상과는 정반대의 환경을 담았대요. 시커먼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고, 호수는 사납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지체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의 눈에 세상이 얼마나 어렵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그렸겠죠. 이처럼 그림의 배경 어디에서도 평화로운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아이가 호수 저편의 큰 바위 하나를 중앙에다가 그려놓았는데, 그 바위 틈 속에 비에 젖은 새 두 마리가 날개를 접고 한곳을 같이 바라보고 있더랍니다. 이 작품이 대상을 받았어요. 이 그림이 평화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삽니다. IMF만 지나면, 대학만 졸업하면, 출세하기만 하면 평화가 온다고 말입니다. 그 평화는 임시평화예요, 가짜 평화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참 평화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단한 삶의 한복판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만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환경과 관계가 없어요. 제가 찬송가를 갖고 나왔는데, 찬송가에는 평화와 평온, 평안을 노래한 곡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시를 지은 시인들은 하나같이 평화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의 환경은 평화와는 먼 고통뿐이었습니다. 인간의 고뇌와 고통, 도저히 위로의 손길이 닿지 못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은 평화를 노래합니다. 여러분 좋은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환경이 좋아지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까요? 환경이 좋아진다고 해서 모든 이가 더불어 살아가는 좋은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의 나눔이 있고 섬김이 있을 때, 그것이 좋은 세상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함께 사는 사람이 서로를 위할 때, 신뢰하고 존중해 줄 때,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 나누려고 할 때 그 사회가 바로 천국입니다. 아무리 고래등 같은 집에서 살지라도 서로 물어뜯고 더 많이 가지려고 으르렁대고 싸운다면 거기가 지옥 아닙니까? 사랑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은 환경이 바뀌어서 오는 것은 아니에요. 조건이 변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한 건 아름다운 환경에서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병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모여 사는 청량리 뒷골목에서 저는 아름다운 세상을 찾았습니다. 청량리 뒷골목에는 윤락여성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을 둘러싼 기둥서방과 포주들이 있습니다. 또 찍새, 삐끼 등 이상한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과 전과자들도 많이 오갑니다. 알콜중독자도 매일 봅니다. 무의탁 노인들이 누울 방 한 칸이 없어서 길에서 누워 자는 모습도 보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찾았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조건이 달라져서, 환경이 달라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달라지면서, 내 눈이 달라지면서 보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새 세상을 찾았습니다. 처음부터 청량리로 가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저는 독일로 유학 가서 공동체 신학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싶었어요. 유럽의 지역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신뢰받는 공동체들을 실제로 경험한 다음에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모샤브에서도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와 교회와 사회에 작으나마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하는 게 저의 꿈이었습니다. 비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도시 빈민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사회정의 구현에 남다른 사명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독일로 유학을 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지금 생각하니, 그때 독일로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박사님들이 열등감이 많을 것 같습니까?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열등감이 많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청량리 뒷골목에서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문맹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열등감이 눈곱만큼도 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박사님들은 열등감이 많아요. 왜냐면 늘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석학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논문이 초라해질 때마다 왜 사는지 모른다고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교의 세계에서는 우월감 아니면 열등감만이 존재합니다. 그런 비교의 세계가 아닌 사실의 세계를 살게 되면서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의 통념구조에 끌려 다니면서 기죽지 마십시오. 여러분, 제가 열등감이 있어 보입니까? 박사는 아니지만 전혀 없습니다. 속으로 '잘났어. 정말!' 하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잘난 것도 없는, 그냥 최일도라는 사람입니다. 물론 열등한 부분이 많고, 열등한 게 사실입니다. 우선 제 시력이 열등합니다. 뒷자리에 앉으신 분들은 도대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뿌옇게 윤곽만 있습니다. 제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분들은 앞줄에서 셋째 줄까지예요. 넷째 줄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시력이 나빠요. 하지만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로 열등감은 없어요. 열등한 게 사실인데 열등감은 없습니다. 초대 민속씨름의 왕자 이만기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하고 저하고 씨름하라고 하면 아마 제가 백전백패일 겁니다. 그런데도 전 이만기씨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과 비교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은 자꾸 비교하라고만 가르칩니다. 그런 광고도 있잖아요. 주부들에게 당신의 경쟁상대는 덴마크 주부입니까? 하는 거 말이에요. 기가 막혀요. 왜 경쟁 속에서 사느냐 말입니다. 끝없는 긴장과 남을 딛고 일어서서 더 높아져야, 더 많이 가져야 된다는 이 사회의 통념구조는 깨져야 됩니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동안 'Big is success'라는 구호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거대한 것이 성공일까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우리 사회에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때문입니다. 저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진리를 체득한 사람입니다. 제가 체험한 이 진리가 여러분들 가슴에 불씨로 떨어졌으면 합니다. 그 불씨로 인해 우리 사회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가 채워져 작은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한 영혼, 한 사람, 한 인격이야말로 소우주라고 하는 사실에 우리 모두가 눈을 떴으면 합니다. 제가 아름다운 세상을 찾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있던 모든 열등감에서 벗어났고, 모든 우월감을 버렸습니다. 나는 나다, 나 이상도 아니고 나 이하도 아니다. 최일도가 최일도면 됐지,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요. 나답게 사는 삶, 나만이 지니고 있는 나의 멋과 나의 맛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의 답을 청량리 뒷골목에서 찾은 겁니다. 유학을 갔다와야만 박사학위를 따야만 출세해야만 이런 조건들이 사라진 겁니다. 오히려 저는 11년 동안 처절한 좌절과 실패를 연속적으로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나름대로 도시 빈민을 섬긴다고 산 11년 동안 여러분들이 짐작도 못하는 그런 일을 많이 겪었어요. 하지만 고생을 하면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가장 큰 기쁨은 가장 큰 고통 뒤에 오는 겁니다. 많은 엄마들이 아기를 안고 너무나 행복해 합니다. 출산의 기쁨은 해산의 고통 뒤에 오는 거예요. 고통과 기쁨은 같은 얼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통만 바라봅니다. 고통 속에 담겨 있는 그 의미, 그 고난의 신비를 깨달으면, 자신에게 고통이 되었던 장애물이 어느 날 디딤돌로 변해버립니다. 제가 청량리에 처음 갔을 때가 1988년입니다. 88년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입니다. 우리 사회는 국위선양이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그때 전 같은 서울 하늘 아래서 집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며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이었는데, 마침 그 날 수업이 휴강이 됐어요. 춘천이나 가볼까 하고 청량리역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한 다섯 걸음 정도 앞서 가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뒤로 넘어졌어요.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고 입에 거품까지 무시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보고는 그냥 지나가요. 가까이 가보니까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가 돼요. 할아버지 몸에서 냄새가 나는데 창자가 흔들릴 정도예요. 얼굴도 1년 동안 한번도 안 씻은 것 같더라구요. 거지 할아버지가 간질까지 앓다니 참 안됐다 그러고는 저는 제 갈 길로 갔어요. 춘천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 눈앞에서 쓰러지셨던 그 할아버지가 역 중간에, 그 자리 그대로 계신 거예요. 하루종일 사람들이 방치한 겁니다. 깜짝 놀라서 가까이 가보니 눈은 뜨고 계신데 힘이 없어서인지 초점이 없어요. 그 순간 양심에 찔리더라구요. 아침에 파출소에 가서 신고만 했다면 이렇게 하루종일 방치되지는 않았을텐데 하고 말이죠. 그리고 이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요. 경찰관이나 공무원들은 뭐하고 이런 분들을 방치하나 하고 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고 그냥 지나갔어요.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충만해 형제여 자매여 하고 다른 사람을 끌어 앉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여러분도 그냥 지나가지요. 저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저만큼 가는데 뒤통수 쪽에서 가느다란 음성이 들렸어요. 그 음성이 제 인생을 바꿔버렸습니다. 돌아서기 전에 양심에 걸렸던지,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한테 진지 드셨냐고 물었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어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돌아섰어요. 그런데 그때 제 뒤로 들린 소리가 바로 '아니'였습니다. '아니, 먹지 못했어' 그 한마디가 제 인생을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그 한마디가 제 발목을 붙들어 저로 하여금 청량리 사람이 되게 했어요. 그렇게 1년, 2년 하다가 어느덧 11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를 돌아봤는데 입도 벙긋하지 않고 여전히 먼 곳만 보고 계시는 거예요. 누가 아니라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기운을 차리시고 제 뒤로 그 소리를 내신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소리를 잘못 들은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제가 그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건 제 마음에서 떠오른 음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도야 나는 먹지 못했다.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길바닥에 눕혀놓을 생각이냐? 나는 먹지 못했다', 그건 제 마음속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느꼈습니다. 신학생이, 이제 곧 목사가 된다는 사람이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한번도 사랑을 실천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 모습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면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비유가 있더니, 살려달라고 구원의 손길을 내민 그 사람을 보고도 그냥 스쳐 지나가던 제사장이 바로 제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분 곁에 가까이 가서 부축을 해서 번쩍 안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주위를 살펴보니 설렁탕이라는 간판이 보여요. 일단 시장기부터 채워드리자 해서 그 집으로 가서 국물을 떠넘겨 드렸습니다. 절반쯤 국물을 드신 할아버지가 저를 바라보는데, 눈빛에 여전히 힘이 없어요. 부끄러운 마음 때문에 얼굴이 저절로 숙여졌지요. 할아버지한테 집이 어딘지, 어디서 주무시는지 물어봤어요. 집은 없고 지하도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잔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다 그분을 고향에 모셔다 드리면 되겠다 싶어서 고향을 여쭸어요. 그런데 그분 대답이 함경도라는 거예요. 갑자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데, 그 할아버지의 눈빛이 저를 자꾸 끌어당기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그 다음날 역광장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어요. 다음날 학교에 가서 여러 군데 전화를 했는데, 딱 한 군데서 오라고 해요. 용문에 있는 희망의 집이라는 결핵환자를 수용하는 곳에서 말입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결핵을 앓다가 돌아가셨다면서 한 분만 모시고 오래요. 모처럼 좋은 일 한번 한다싶어 청량리역 광장으로 열심히 갔어요. 그때는 한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막상 가보니까 대책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다섯 분의 할아버지가 더 오신 거예요. 그분들도 모두 집이 없으시데요. IMF 전에도 길에서, 역 대합실에서 주무시던 홈리스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1년에 2천 명 이상이 길에서 자다가 죽었어요. 보건복지부 통계가 2천 명이 넘으니, 통계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부지기수일 겁니다. 1년에 2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길에서 뒹굴다가 애도해 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차디찬 주검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까? 그들의 영혼은 값어치가 없습니까? 청량리의 행려자나 청와대 대통령이나 목숨은 동등합니다. 누구 목숨이 더 귀하고 누구 목숨이 더 천하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저는 바로 그 현장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찾았기에 저는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환경이 좋아져서가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까 그 할아버지를 만나서 제 인생이 바뀌었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해드릴게 뭐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이 할아버지 여섯 분께 설렁탕을 사드렸어요. 그랬더니 일주일치 용돈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아내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저는 아내 덕분에 공부를 한 거예요. 그러니 매번 돈을 달라고 하면 가장인 제 자존심이 상할까봐, 아내는 월급을 그냥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었어요. 거기서 제가 필요한 돈을 빼서 썼습니다. 단 만원 이상 쓸 때는 서로가 영수증 썼어요. 그렇게 지내는데 제가 식대, 식대 이러면서 큰돈을 쓰니까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더구나 식대를 지불한 날은 집에 와서 어김없이 한숨을 쉬더래요. 그 모습을 보고 아내가 다른 여자가 생긴 줄 알고 오해를 한 거예요. 어느 날 학교를 갔다와서 점퍼로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아내가 달려오더니 제 손을 잡고는 사실대로 말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내와 같이 버스를 타고 청량리로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서 588이라는 사창가를 통과해야만 그 설렁탕 집이 나와요. 제가 588 골목으로 접어드니 아내가 덜덜 떨어요. 아내는 홍등가를 처음 보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그때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래서 제가 손을 꼭 잡고 설렁탕집 문을 열었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아홉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미 식사를 마치셨어요. 저는 식대만 지불하면 되는 거예요. 아내를 돌아봤더니 난감한 얼굴이에요.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오늘까지 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말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당신의 몽상가적인 기질은 알지만, 재벌 2세도 아니면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고, 빈민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전 아무 말도 못했어요. 집에 도착하니 옆집에 맡기고 간 아이들이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막 뛰어 내려와요. 그런데 아내가 대뜸 아이들에게 '여기 대책 없는 분 오셨다. 인사드려라' 그러는 겁니다. 그때부터 제 별명이 일명 대책 없음이 됐습니다. 가끔 아들녀석이 왜 대책 없음이냐고 물으면, 아빠는 큰 책 없이 작은 책만 쓰니까 그렇다고 대충 얼버무립니다. 그런데 다음날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니까 아내가 옮겨놓았는지 돈이 한푼도 없어요. 그렇다고 사내자식이 되어서 어디다 뒀냐고 물을 수도 없잖아요. 약속시간은 다가오는데 정말 속이 상하더라구요.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집에 있는 버너와 코펠을 들고 나갔습니다. 청량리역 광장 상점에 가서 물을 달라고 하면 인심이 좋아서 언제든지 줘요. 그렇게 청량리역 광장 임시매표소 앞에 퍼더버리고 앉아서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부었더니, 그게 한 끼 식사가 되더라 이거예요. 다일공동체는 이렇게 컵라면으로 시작됐습니다. 버너 하나, 코펠 두 개로 그분들에게 라면을 끓여드리는데, 그 소식을 듣고 노숙자, 행려자들이 늘어나더니 금방 스무 명이 됐습니다. 그 중에 젊은 알코올중독자가 들어왔는데, 이 친구 술주정이 아주 고약해요. 그 친구한테 3시간 동안 매를 맞은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 날은 두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잤습니다. 처음 청량리로 들어갔을 때 잘했다고 칭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아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별별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잠은 편하게 잤어요. 저 같은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다 매를 맞다니, 이거 영광이다 싶더라구요. 그런데 이 술주정하는 친구는 술만 먹었다 하면 제 귀에다 욕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욕이 많은지, 국어가 욕문화가 발달된 언어라는 걸 처음 느꼈습니다. 근데 사창가로부터 시작된 욕이 많아서인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더럽고 추한 욕을 해대요. 그렇게 욕을 하루종일 듣는 날이면 몸에 욕이 달라붙어 잠이 오지 않아요. 욕을 떼는 데 하루종일 걸려요. 차라리 맞는 게 낫지 욕을 듣기는 싫더라구요. 그 날도 세시간 반쯤 욕을 듣는데, 네시간쯤 되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절 죽여주십시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더 이상은 못듣겠습니다. 그런데 그 술주정뱅이가 라면을 먹다말고 갑자기 '삶은 무엇이냐?'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계속 삶은 뭐냐고 묻는 거예요. 대꾸를 안하면 제풀에 지치겠지 싶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라면을 드시던 할아버지가 견디기 힘드셨는지, 그 친구 뒤통수를 딱 때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삶은 라면이야. 이 자식아. 이 자식은 먹고도 물어보네. 삶은 라면이지. 마저 먹어!' 그러시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나오고 울음도 안나왔어요. 그 날 잠을 못잤습니다. 자려고 노력해도 자꾸 귓전에 삶은 라면이라던 소리가 들려요. 삶은 라면이라던 그 말이 떠나지 않더라구요. 그 당시 저희 다일공동체를 후원해준 사람은 모교인 신학대학 교수님과 친구들밖에 없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독일로 유학은 안 가고 청량리에서 사창가를 청소하고 거지들에게 라면을 끓여준다는 얘기를 듣고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될 일인데, 얼마나 할지는 모르지만 도와주자고 해서 시작된 겁니다. 도움이라는 게 그저 월급 타면 라면 몇 박스 갖다놓는 정도예요. 저는 11년이 되도록 제 스스로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 일이 정말 하늘의 뜻이고,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는 일이라면 도와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한번은 전대통령 아들이라는 사람이 5억을 갖다놨어요. 아마 저한테 얘기했으면 거절했을 텐데 다른 사람이 받은 거예요. 그런데 갖다놓고 30분만에 다일복지재단의 최일도 목사님이 5억을 받았다고 뉴스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돈을 돌려주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 사람이 죄인이라서가 아닙니다. 그 돈은 출처를 모르는 선거자금이에요. 불법자금이니까 받을 수가 없는 건데 사람들은 제 마음을 몰라주더라구요. 저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윤락여성들이 모아준 47만 6천원을 더 기쁘게 받은 사람입니다. 무료병원 설립을 위해 최초로 받은 기금이 윤락여성들이 모은 돈이었어요. 저는 그 돈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몸판 여자들의 아픔과 후회가, 인간에 대한 연민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겨 있어요. 그런데 죄인이라서 안받았다니, 그건 아닙니다. 좌우지간 11년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이 8천 명이 넘습니다. 그분들도 스스로 참여하시는 거지, 제가 부탁한 것은 아니에요. 아주 작은 것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저희를 도와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게 라면을 먹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거기가 청량리역 근처에서 거지들하고 라면 먹는 라면교회가 맞습니까? 아니라고 끊었습니다. 무슨 교회이름에 라면교회가 다 있어요, 저희 교회는 다일공동체교회잖아요. 조금 있다가 또 전화가 왔는데 저를 찾아요. 제가 맞다고 하니까 거지하고 라면 먹는 교회 아닙니까? 해요. 아니라고, 자꾸 거지 거지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거리의 천사들하고 라면을 먹긴 한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라면을 좀 갖다드려도 되겠냐는 거예요. 저는 달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주겠다면 거절은 안합니다. 그래서 청량리역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끊었습니다. 다른 분들처럼 한 두어 박스 예상하고 나갔는데 약속시간이 되어서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 두 대가 서있어요. 다일공동체 무료식당 겸 무료예배당 겸 무료 진료소로 썼던 다일공동체 집이 그 트럭의 절반보다도 작았을 때입니다. 라면을 어디다 내려놓을 데가 없어요. 한 트럭을 채 내리기도 전인데 금방 천장에 닿고, 지붕에 올려놓으니까 지붕이 무너지게 생겼어요. 그래서 그분한테 한 트럭은 꽃동네나 다른 사회복지시설에 갖다주라고 부탁했어요. 우리 사회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복지시설이 많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안된다는 거예요. 자기는 심부름하는 사람인데, 꼭 저한테 두 트럭을 모두 내려놓으라고 부탁 받았다면서 막무가내예요. 보시다시피 내려놓을 데가 없다고 하니까, 588 포주 아주머니들한테 부탁을 해보라고 합니다.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잘못하면 소금 맞고 매맞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한두 박스씩만 보관해달라고 해보라면서 안 가는 거예요. 그래서 미친 척하고 부탁을 했는데, 열 집 중에서 일곱 집이 라면을 받아줬습니다. 밥 한 끼도 못먹고 라면으로 배를 채우는 사람을 위해서 이 정도는 도와야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말이에요. 길바닥에 앉아서 라면을 먹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은 거예요. 기적이 이루어진 겁니다. 그래서 어제까지만 해도 눈치를 보면서 다녔는데, 이제는 라면 찾으러 왔다면서 아무 때나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그러면 라면만 주는 게 아니라 단무지나 김치도 줘요. 어떻게 라면만 먹냐면서 말입니다. 그때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질리도록 라면만 먹다보니 라면중독증 환자가 됐는지 하루에 9봉지까지 먹어봤어요. 한번에 3, 4봉지씩 먹은 게 아니에요. 저는 위가 작아서 소식밖에 못해서, 한번에 한 봉지씩 9번에 걸쳐 새벽부터 밤까지 라면을 먹었어요. 원래 제 머리카락도 직모였는데, 그때부터 라면처럼 꼬불꼬불해진 거예요. 하여튼 미련한 인간은 가끔 쓸데없는 기록을 세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루는 라면 10봉지를 채워서 신기록을 세우려고 하다가 몸살이 났어요. 아내가 해주는 밥이 너무 그리워서 집에 전화를 걸었어요. 당신이 차려준 밥이 너무 먹고 싶다고 말입니다. 전화를 끊고 집에 갔더니 아내가 현관에 밥상을 차려놨어요. 제가 행려자들하고 같이 지내다 보니까 냄새가 베어서인지, 밥상을 방안에 차리면 옷을 벗고 샤워를 해야 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그래서 현관에 상을 차린 거예요. 오랜만에 집사람하고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밥맛이 너무 황홀해요. 다음날도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웬일인지 중간에 딱 걸려서 내려가지를 않아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서 먹은 음식을 다 토했습니다. 그러니까 속이 좀 시원해요. 한참 있다가 아랫배에서 욱하고 무언가가 올라오는데, 순간 스치는 생각이 내가 혹시 피를 토하는 게 아닐까 겁이 나는 거예요. 며칠 전 라면을 끓여주는데 기침을 심하게 하는 분이 있어서 닦아주려고 하는데 제 얼굴에다 대고 기침을 하는 바람에 피가 저한테 다 튀었어요. 알고 보니까 결핵 말기 환자였습니다. 그 생각이 스치면서 균이 몸속으로 들어와서 나도 피를 토하나 보다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막상 뱉어보니 피가 아니었습니다. 울음이 나와서,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30분을 울었어요. 제가 왜 우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30분을 서럽게 울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요. 나와 보니까 상도 다 치워졌고 아내도 보이지 않아요. 어디 갔나 찾았더니 보일러실에 숨어서 혼자 울고 있습니다. 미안해서 아내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니까,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봤어요. 아내는 울면서 이제는 그만 하라는 거예요. 아내는 제가 눈물을 흘린 이유를 알았던 겁니다. 제 자신조차 몰랐던 그 이유를 알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제가 미안해서 우는 거래요. 그 청량리역 광장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라면을 끓여주고 제 자신은 집에 와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게 미안해서 우는 거랍니다. 그들은 집도 자식도 없어 의지할 곳이 없는데, 저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과 함께 뒹굴려고 애써도 그들과 똑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그런다고 말이죠. 아무 말도 못하고 아내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고 잠자리에 드는데 아내가 저금통장을 하나 꺼내서 줍니다. 뭐냐고 그러니까 전재산이래요. 안을 살펴봤더니 79만원이 들어 있어요. 아내 말이 그 돈으로 행려자 아저씨들한테 밥이나 한번 해주라는 거예요. 당신 소원대로 그분들께 밥 한 끼 해드리라면서,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겁니다. 그게 전재산인데, 어떻게 그걸 들고 나오겠습니까? 그래도 아내의 소원이고 제 바램이기도 해서 그걸로 그분들 밥이나 한번 해드리기로 했어요. 그 날이 90년 4월 부활절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부터 지금까지 밥이 끊어진 날이 없어요.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그 날의 기적은 저로 하여금 이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사실에 눈뜨게 했어요. 밥 먹을 때가 없어서 청량리 야채시장 쓰레기 더미 위에 올라가서 먹었어요. 그곳에 할아버지들이 모여 앉아서 밥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는 목놓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이 한 모금의 물에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음을, 이 한 톨의 쌀알에도 만민의 땀이 담겨 있음을 이제야 제가 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저도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소외된 이웃을 살리는 삶의 길을 다짐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들이 다 울면서 통곡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눈물 속에서 밥을 푸고 국을 푸는데 그 모습을 본 청량리 야채시장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요. 제가 부탁한 적이 없는데도, 야채장사 아주머니는 팔다 남은 무라며 저분들께 무국이라도 해주라면서 무를 줍니다. 생선 파는 아저씨도 반찬 하라고 생선을 내놔요. 그러면서 밥은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겁니다. 햇빛과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주시는 건 밥을 나누어먹으라는 거지 나 혼자 먹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시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내일도 밥을 지어달라는 뜻에서 쌀을 갖다놨어요. 그게 최초로 청량리에서 경험한 기적이에요. 청량리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누가 부탁하거나 시킨 일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쌀을 내놓고 무, 배추, 생선을 내놓은 겁니다. 다음날도 그렇게 그분들이 움직이기 시작해 10년이 된 지금까지 밥상공동체를 단 하루도 거른 일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다니려고 이 산, 저 산 다닙니다. 이 거리, 저 거리를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지금부터 아름다운 세상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아름다운 세상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죽어서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도 아름다운 세상을 삽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서울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부산, 광주에 가서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 속에서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5년 전입니다. 저는 5년 전에 그곳이 너무 지겨워서 청량리를 도망쳤습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까 흰머리가 났어요. 제 청춘이 청량리에서 다 가버린 거예요. 요즘에는 좋은 일 한다고 칭찬하시는 분도 많지만, 초창기에는 매일 욕먹고 시달리고, 그렇게 5년쯤 하니까 지겹더라구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서 말입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퍼줄려고 바가지를 긁다보면 벅벅 소리가 들려요. 피고름이 잡히는 것 같아서, 청량리를 떠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후회 없이 그곳을 떠나기 위해서 제가 자주 가던 곳을 한 바퀴 돌았어요. 그런데 그 거리의 모든 사물이 병든 것처럼 처져 보이고 지쳐 보이는 거예요. 싫다는 마음만 들었습니다. 다시는 청량리에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기차를 탔는데, 경춘선을 탄다는 게 잘못해서 양평 가는 것을 탔어요. 돈도 한푼 없이 말이죠. 용문에서 내렸습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계곡으로 해서 중간쯤 올라갔더니 큰 바위가 하나 있어요. 거기에 엎어져서 사흘 밤낮을 울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살아래서, 밤에는 이슬 맞으며 통곡했어요. 그렇게 사흘을 울고 났더니 배가 고파서 오직 밥밖에 생각이 안나요. 돈이 없으니 어떡해요, 무턱대고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어요. 군불로 밥을 짓는데 그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저도 모르게 그 집까지 간 거예요. 할아버지하고 할머니 두 내외분이 사시는데, 마침 할머니는 어디 가시고 할아버지 혼자 식사를 하시려던 중이였어요. 그분이 제게 밥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청량리의 최일도라는 사람을 찾아가라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 가면 밥도 주고, 말만 잘하면 직장도 구해준다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청량리로 돌아왔습니다. 역 광장에 누워 있고 앉아 계신 할아버지들이 너무 아름답고 정겨워 보이는 겁니다. 저도 모르게 그분들을 끌어안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하고 소리쳤어요. 반가운 얼굴들이, 여기저기서 며칠동안 청량리 다일공동체 문이 열리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는 겁니다. 청량리 거리를 보니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들이 춤을 줘요. 고호의 그림 가운데 춤추는 나무 본 적 있습니까? 제 눈에는 나무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생명의 주인을 향하여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생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생명이란 생을 명하신 분이 있어서 생명인 겁니다. 모두들 그 생명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저를 보낸 이유를 알았습니다. 제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저는 삶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좋은 세상이란 바로 지금 여기였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청량리 가로수도 그대로입니다. 그 낡은 건물, 무의탁노인들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변한 게 무엇입니까?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변하고 제 눈이 변하면서부터 어딜 가나 누굴 만나나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여러분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부터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 열등감이 없는 삶으로 만들어가기 바랍니다. 참 사랑의 나눔과 섬김으로 나부터, 지금부터, 여기부터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나중이라고 미루지 마십시오. 먼 훗날의 기약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지난 과거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지난 과거의 어떤 성공이 자랑거리가 된다 해도 공적에 매달리지 말고, 지난 허물과 과실에 매달리지 말고 또 아직 없는 미래에 목숨 걸지 말고 지금 현재를 사십시오.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강연일시 초청연사   강연제목
113 2000-3-16 전여옥   21세기 남녀관계 (사랑과 결혼·일을 중심으로)
112 2000-3-9 김용운   복잡계에서 본, 한국의 현재, 과거, 미래
111 1999-12-2 윤형섭   문화와 정치발전
110 1999-11-25 김석우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보환경
109 1999-11-18 박종서   형태와 색은 어디로부터 와야 하는가
108 1999-11-11 최일도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107 1999-11-4 차범석   사라지는 것의 미학 - 나의 인생, 나의 연극
106 1999-10-28 장명수   언론 무엇이 문제인가
105 1999-10-21 주철환   인생은 연출이다
104 1999-9-30 명계남   명계남의 영화이야기
103 1999-9-16 이나미   진취적 창조성, 마음의 어디에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