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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제목 |
언론 무엇이 문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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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
106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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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연사 |
장명수 (한국일보사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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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일시 |
1999년 10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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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장소 |
본부관 학술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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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4351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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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일보사 사장 장명수입니다. 마침 오늘 제가 '한국의 언론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러 온 날, 충격적인 언론 관련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제 얘기가 더욱 실감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신문의 중견기자가 여당의 간부에게 언론공작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고, 한 방송기자가 그 문서를 훔쳐서 야당 의원에게 돈을 받고 넘겼다는 기사를 여러분 모두 읽으셨을 것입니다.
요즘 신문방송들은 정치와 경제의 개혁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언론이야말로 개혁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한평생 언론계에서 일해온 사람으로서 저는 언론이 개혁 대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37년에 걸친 저의 언론계 경험을 토대로 무엇이 언론계의 문제인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고 1963년 11월 한국일보 견습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딛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 언론이 숨도 못 쉬던 시절이었습니다. 1988년 노태우정부가 출범하면서 언론 통제가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제가 기자로 일하던 삼십여년 동안 언론의 자유라는 것은 책에서나 읽었을 뿐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은 한국언론사에서 매우 불행한 시기였습니다.
몇 년 전 소위 '총풍사건'으로 안기부 고문 시비가 일어났을 때, 주필이었던 저는 논설위원들과 함께 그 문제를 사설로 다루기 위해 회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논설위원 열한 명 중 세 명이 군사정부 아래 심하게 고문당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세 사람은 언론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민주화운동을 했던 기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항상 어느 수준까지 써야 붙들려가서 고문당하지 않나, 신문사에 해가 돌아오지 않나 하고 일단짜리 기사 하나를 쓸 때도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고문당한 세 사람 역시 조심조심 기사를 썼지만 그 중에 한 구절이 군사정부의 비위를 거슬렀다거나 단어 하나가 군인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잡혀가서 심한 경우엔 일주일씩이나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던 것입니다. 흉터가 남지 않도록 주로 발바닥을 때린 탓에 풀려난 후 땅을 디딜 수가 없어서 열흘 정도 쉰 다음에야 회사에 나올 수 있었고, 회사에 나와서도 자신이 고문당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기자들은 독자들로부터 군사정부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들었고, 후배 언론인들로부터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우지 않고 군사정부에 영합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1979년 신군부가 들어서고 계엄령이 선포되자 그들은 신문을 사전검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울시청 청사 안에 있던 검열반까지 기자들이 신문대장을 들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제가 당번이 되어 어렵게 검열을 받고 나와보니 학생시위대에 밀려 신문사 자동차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고 마감시간에 조바심을 치면서 신문사까지 달려가야 했습니다. 교통은 막히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데 눈물이 흘러 앞을 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언론의 자유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라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언론의 자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언론의 자유야말로 고도의 훈련, 투철한 직업정신, 높은 도덕심 없이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몇 달 사이 언론인이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데요, 저는 이번 문일현 기자 사건이나 홍석현 사장 구속 사건에 대해 국민회의, 중앙일보, 정형근 의원 측에서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드러난 것 이상의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주 원론적인 말씀밖에 드릴 수 없는데요. 이 사건들이 말해주는 진실 하나는 언론도 권력도 언론공작이라는 과거의 사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15년 동안 중요신문에서 정치부 기자와 특파원으로 일해 온 중견기자가 스스로 언론공작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여당 중진에게 보냈다는 것은 언론과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 관계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권력뿐 아니라 언론까지도 언론을 '공작'의 대상으로 보는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항상 그 유혹 앞에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홍석현 사장 구속에 대해서 '탈세'라고 보는 견해와 '언론 탄압'이라고 보는 견해가 공공연하게 충돌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 군사정부 시절 언론공작의 최대 희생자가 자신이었기 때문에 이 정부 아래 언론공작이나 탄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습니다. 김대통령이 언론공작의 최대 피해자였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김대통령 자신이 언론을 탄압하거나 언론공작을 할 생각이 없다는 말도 믿습니다. 그러나 과거 언론공작의 악습에 익숙한 사람들이 때때로 유혹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통령도 계속 경계심을 가지고 그들을 단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언론인들은 언론사와 언론사 간부들에 대한 '정보자료'가 때때로 악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의심을 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언론은 언론대로 권력은 권력대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채 혼돈상태 속에 있습니다. 언론 내부에는 과거에 어느 선까지 써야 붙들려가지 않나를 저울질하던 습관이 아직 알게 모르게 남아 있습니다. 권력에 대해 비판하거나 고발할 때 일차적으로 기자 자신이 자기 기사를 검열하고 다음은 데스크의 단계, 때로 경영진의 단계에서까지 영향을 미쳐서 비판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언론의 비판으로 궁지에 몰릴 때 정당한 절차를 거쳐 반론권을 행사하거나 법의 판결을 기다리기에 앞서 압력을 가하고 회유하고 약점을 잡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과 권력이 충돌하는 사건이 터지면 진실이 무엇이냐는 논란은 뒤로 밀리고 언론공작이냐 아니냐, 탄압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으로 시끄러워지곤 합니다.
다음에는 언론의 지나친 경쟁과 선정주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언론사들은 기업적인 측면에서 오랫동안 군사독재의 우산 아래 성장해 왔습니다. 신문지면을 몇 페이지로 하느냐는 것까지 정부가 통제했기 때문에 언론사들은 지나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고, 광고 걱정을 크게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정부의 절대적인 통제 아래 언론사들은 나름대로 기업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언론이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언론은 질적인 발전에 앞서 지나친 상업주의 경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언론의 정신이 성장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증면 경쟁, 부수 늘리기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한 시간 안에 백만 부 이상을 찍어내야 하는 고속 윤전기를 가져야 하고 또 몇 페이지를 칼라로 인쇄하고 몇 페이지를 합쇄할 수 있느냐는 경쟁이 벌어지면서 고가의 인쇄 장비를 들여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옛날처럼 본사에 윤전기 시설을 하나 갖추고 신문을 찍어내는 시대가 아닙니다. 한국일보만 해도 전국 네 곳에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사에서 만든 신문판을 전송하여 분공장에서 동시에 인쇄하고, 인근 지방에 신속하게 신문을 배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윤전기로 바꾸려면 네 곳에 있는 윤전기를 바꿔야 하고 천억원대의 시설비가 들어가게 됩니다. 재벌이 배후에 있는 신문사가 그런 물량경쟁을 주도하면서 재정적으로 취약한 신문사들도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IMF사태가 왔고 대부분의 언론사가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은행이자는 두 배나 올라가고 광고 수입은 곤두박질쳤습니다. 많은 언론사들이 재정난으로 허덕이게 되자 권력, 채권은행, 광고주 등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언론이 자초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선정주의가 심각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신문을 읽으면서 늘 불만스러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한 아버지가 보험금을 노려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범인이 아버지라는 것이 밝혀지자 신문방송들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일제히 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 어린 아들이 "나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아빠는 우리가 너무 가난해서 먹고살기 위해 내 손가락을 잘랐다. 나는 아빠를 용서한다"고 말했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감옥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신문방송들은 어제까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개탄하던 사건을 갑자기 미담으로 둔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건이 미담으로 다뤄지자 각계각층에서 성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돈이 많이 들어오자 몇 년 전에 도망갔던 그 아이 엄마까지 나타나게 되었고, 그 돈을 놓고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신문방송들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경쟁적으로 말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아버지는 보석으로 풀려났고 부자가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사진을 보면서 독자들도 눈시울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지나간 다음 우리 기자들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깊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터진 고급옷 로비 의혹 사건이나 김희로 사건에서도 언론은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옷 로비 의혹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터지는 부패 사건들과 비교할 때 그렇게 크고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직자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못참겠는데 그 부인들까지 한몫 거드는 것은 정말 못참겠다는 국민 정서가 있기 때문에, 그 정서에 영합하는 보도가 춤추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이 국회 청문회로 간들 시원하게 밝혀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두 짐작하고 있었지만 신문방송들은 국정조사와 특검제를 무조건 다 해야 된다는 정치권의 주장을 편들었습니다. 결국 청문회가 열렸는데, 고위공직자와 재벌의 부인들이 증인석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옷을 입고 나왔으며 누가 제일 거짓말을 많이 한 것 같다는 등 시시콜콜 흥미 위주의 기사로 신문마다 몇 페이지씩 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신문들은 저마다 자기가 권위지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보도 자세를 보면 어느 한 신문도 권위지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곧 이어서 김희로씨가 일본에서 석방되어 귀국하였습니다. 사실 김희로씨는 일본에서 민족차별속에 불우하게 자랐고, 사람을 죽이게 된 직접적인 원인도 민족 감정을 자극 받았기 때문이며,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들만큼 긴 감옥생활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석방되어 여생을 고국에서 보내겠다고 귀국한 것 자체는 중요한 기사로 다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기사 역시 경쟁적으로 다루다보니 어느덧 김희로씨가 안중근 의사에 버금가는 민족투사나 되는 것처럼 그려지고, 그가 검정고무신을 신었느니, 두루마기를 입었느니 시시콜콜한 얘기가 다 나오면서 영웅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보도가 계속되자 재일교포들이 놀라서 왜들 이러느냐, 그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살인범이다 라는 항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김희로 사건 역시 손가락 절단 사건과 마찬가지로 선정주의의 함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문의 논조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국의 신문들은 억압에서 풀려나면서 나름대로 색깔을 갖게 되었는데요, 어떤 신문은 보수적인 노선을 택하였고, 어떤 신문은 진보적인 노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기자들 입장에서는 신문이 표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한가, 또는 진실 자체가 중요한가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대북 관련 논조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북한이라는 매우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와 대화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햇볕정책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 온 것이 한국일보이고 저도 칼럼에서 그런 논조를 펴왔습니다. 그러나 햇볕정책,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 금강산 관광 등 북한과 관련된 여러 사안에 대한 각 신문들의 논조를 보면 많은 독자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문 사설을 보면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죄를 폐지할 경우 광화문 네 거리에서 누가 인공기를 흔들며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쳐도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노선을 취하는 신문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가 인권국가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빨리 대폭적으로 이 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독자들이 이처럼 다른 주장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이 법을 고치면 정말로 누가 광화문 네 거리에 나와 인공기를 흔드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북한에 관한 칼럼을 쓴 후 한 독자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요. 자신이 볼 때 북한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데 우리만 유화정책을 쓴다고 해서 무슨 진전이 있겠는가 하는 불만을 품어 왔답니다. 그런데 막상 금강산 관광을 가서 북한교예단 공연을 보면서 북한도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북한이 금강산을 열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이 변한 것이다, 그러니 햇볕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 북한의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주는 돈으로 무기를 사서 적화통일을 하려는 북한을 계속 지원해야 하느냐고 반대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처럼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로서는 신문사의 노선과 자기 자신의 판단이 다를 경우 갈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기자에게 이데올로기가 중요하냐, 진실이 중요하냐는 딜레마는 그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언론에게 진실이라는 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진실과 맞서 갈등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요. 군사정부 아래서 겨우 언론이 생존하고 있을 때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세계에 알려서 용기를 준 것은 외국의 언론이었습니다. 그 때 만일 외신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많은 사람들과 인권 억압 사태들이 어둠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국내 언론은 침묵하는데 외신기자들이 민주화운동을 계속 보도하니 군사정부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외신기자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추방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신기자들이 계속 자기 직업에 충실했기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사건도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계엄사령관이 외신기자들과 회견하면서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가?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인권이니 민주화니 자꾸 떠들어서 분란을 일으키는가?"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때 로이터통신의 앨런 에디트라는 기자가 손을 들고 일어나더니 그 우문에 대해 현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자들이다. 인종, 이데올로기, 종교의 벽을 넘어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도하는 사람이 기자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왔다." 언론 탄압으로 고통을 겪던 우리 국내 기자들에게 그 짧은 한 마디는 비수처럼 가슴에 와서 꽂혔습니다.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 우리 직업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문이 내세운 노선과 진실이 서로 배치될 때 진실 자체가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일하는 한국일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국일보처럼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문에 대해 독자들은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주장이 분명하지 않다, 색깔이 없다, 양비론·양시론에 흐른다는 등의 비난을 많이 합니다. 그 비난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저희들이 감수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우리 신문의 색깔은 이것이니 그 노선에 맞춰 비판하고 지지하겠다는 입장이 있으면 보도의 방향을 좀더 쉽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제오늘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줄기를 접어둔 채 오늘 일어난 하나의 사건만으로 명확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늘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도라든가 불편부당이라든가 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 비판 기능을 날카롭게 수행하지 못하고 그것을 유보하거나 타성에 빠질 위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우리가 분명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이면에는 정말 우리가 이런 때 어느 한편을 지지하기는 어렵겠다는 고민의 흔적이 양비론, 애매한 태도, 색깔을 지운 보도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신문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대부분 언론인 자신이 극복해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도 압력 단체로서 어떤 신문의 이런 논조는 틀렸고 다른 더 나은 의견이 있다는 것을 계속 신문사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각 신문들이 독자의 소리를 반영하는 지면을 가지고 있지만 기대했던 만큼 다양한 독자들의 소리가 들어오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다른 나라의 권위 있는 신문들은 수준 높은 투고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 투고의 수준에서 그 신문의 격과 수준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 독자들이 활발하게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언론의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언론이 제 의 개혁대상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부끄럽게 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군사정부 아래서 입을 다물고 생존해야 했던 그 때 못지 않게 부끄럽습니다. 총칼 앞에서 권력에 협조했던 그 시절도 슬픈데, 이제는 자진해서 권력에 협조하고 언론공작보고서를 만드는 기자가 등장했으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언론이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채찍질해 주시고 격려도 주십시오. 부족한대로 제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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