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미술과 작가정신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우선, 얘기할 주제를 미술과 작가정신이라고 했는데 여기 모인 분들이 미술과 관계된 분들보다 전공 분야가 다른 이들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주제에 관한 심오한 뜻풀이보다는 그림과 관계되는 몇 가지 얘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제가 이해될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아트(art)는 기술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만, 단지 기술뿐만이 아니라 지혜로운 눈으로 볼 때 그 형상에서 얻어지는 감격, 감흥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면 사진을 찍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진에 찍혀진 사물과 사람이 본 사물은 같지 않습니다. 물론 사진도 대비를 더 강하게 한다든지 어두운 쪽을 더 어둡게 한다든지 전체를 희미하게 하면서 기술적으로 변화를 줄 수 있겠지만, 사람의 눈빛을 통해서 사물을 볼 때에는 보는 사람의 태도가 그 사물의 해석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시각각으로 자기에게 와 닿는 환경을 체험하며 삽니다. 길을 가다가 무심코 사물을 볼 때도 그 가운데 여러 가지 것들을 하나둘씩 체험하면서 감격하고 감동하며 살게 되지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좋았던 것, 자극적인 것, 황홀했던 것 등 모든 것들이 자기 몸과 부딪치는 가운데서 자기만의 특별한 정서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데, 이에 대한 감응의 정도가 화가가 보는 자연과 화가가 아닌 사람이 보는 자연의 모습이 다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이의 여성이 남성더러 "저 달이 참 밝네요" 했을 때, "보름달이니까 밝지" 그랬다면 그것은 무감동한 지식에 의한 답변일 뿐이지요. 일반인들이 무심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미세한 감동, 감격까지도 놓치지 않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표현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화가의 태도입니다.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아주 낭만적인 움직임과 모양에 대한 것을 극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것을 과연 어떻게 화폭에 재구성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화가의 일입니다. 폴 발레리는 화가가 보는 들판과 농부가 보는 들판, 그리고 지질학자가 보는 들판이 제각기 다르다고 했습니다. 화가는 자기 눈앞에 보여지는 전경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 자기를 흡족하게 하는 감격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면 얼마만큼의 수확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고, 지질학자는 이 땅 속의 구조는 어느 지질에 속하고 어떻게 변천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물 또는 정경을 마치 사진처럼 평면적으로 감지하는 경향이 있으나 화가는 일단 부피로 봅니다. 세잔은 자연을 공과 원뿔과 원기둥 세 가지 요소로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화가는 사물을 덩어리로 보고 그 관계를 살핍니다. 그리고 사물의 부피와 방향, 각도, 원근 관계 등을 파악하면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앞에 있는 것, 그 다음에 있는 것, 우리 눈에 가물거리듯 멀리 있는 것의 단계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질서를 꿰뚫어 감동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인물을 볼 때 이른바 미인형이 어떻고 하는 일반적인 기준에 의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는 모든 인물의 형태를 똑같은 애정을 가지고 봅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이라도 드러나 있건 숨겨져 있건 특별한 미적 요소가 있다는 전제 아래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에 합당하려면 어떤 색감으로 묘사할 것인가, 광선은 어떤 각도에서 비출 때 가장 좋게 보이는가 하는 구체적 아이디어를 동원하게 되지요. 제가 젊었을 때 강원룡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정동 교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설교자가 매우 거룩해 보였어요. 잘 살펴보니 강대상 위의 광선을 밑에서 위로 비추어 보통 위에서 비출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거룩한 느낌을 주었어요. 광선 하나로 교회에서 의도하는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지요. 화가에게서도 광선은 매우 중요한 표현 요소입니다. 따라서 사물이나 군상을 그릴 때 형태 이상으로 광선의 표현에 힘을 쏟게 됩니다. 사실 빛이 없으면 사물을 아예 볼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화가의 작업은 어느 의미에서는 빛을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상파 이전 시대만 하더라도 전부 실내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태양이 내리꽂히는 자연의 싱싱하고 눈부신 그런 황홀한 모습을 그리기는 어려웠지요.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은 캔버스를 둘러메고 교외로 나갔던 것입니다. 인상파 화가 중 모네는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모습을 약 2시간 간격으로 여러 장 그렸는데,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물의 어떤 감격스러움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고 한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대상이라도 화가의 눈을 통해 사물의 관계와 질서가 형성되고 특별한 느낌이 설정되어 그것이 화가의 표현 능력에 의해 보편적 사물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나라의 조형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조형 활동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오래된 것을 찾는다면 언양 인터체인지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반구대라고 하는 선사시대의 우리 선조가 새긴 암반조각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일종의 끌로 긁어서 흔적을 낸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민족도 꽤 오랜 조형예술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최근에 영국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 우리의 항아리나 접시와 같은 고미술품, 고려시대의 불화, 그리고 작고한 화가들의 그림과 생존해 있는 화가들의 그림이 매매되었다는 보도가 있었고, 경매 가격이 비싸게 형성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미술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손색이 없을 뿐더러 나름대로 세계성을 지닌 예술적 가치를 생산해 냈고 또 해내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우리나라 미술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질적으로 매우 발전되었고, 또 우선 젊은이들의 미술 지망이 매우 많아졌습니다. 제가 미술을 선택할 때만 하더라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허깨비 같은 짓이라고 하여 환을 친다고 하며 멸시했는데, 요즘은 미술 인구가 한 해에 초급대학까지 포함하면 약 2만 명이 쏟아져 나오고 프랑스, 미국, 호주 등지로 유학간 화학도(畵學徒)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결국 사람은 사람다운 멋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겠지요. 여러분들 중에 혹시 작년에 동아갤러리에서 열렸던 러시아의 대표적인 화가 일리아 레핀 전시회를 본 사람 있습니까? 제정 러시아 때의 화가인데, 그 사람이 그린 대표작 중의 하나로〈볼가강의 배 끄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배 끄는 선원들이 무거운 배를 여럿이 한 줄로 늘어서서 끄는 모습인데 저렇게까지 인간의 표정과 동작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화가의〈코사크 기병대의 축제〉라는 그림도 술 취한 모습, 웃고 좋아하는 모습 등 여러 가지 장면들을 묘사했는데, 화가의 능력이 저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또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젊었을 때부터 노숙해진 모습까지 수없이 많이 그렸는데, 그 자화상을 보면 인성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동자를 통해서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고 빠져들게 되는 그런 극치의 작업을 했어요. 바티칸궁에는 벽화와 천정화에 천사들이 승천하는 것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당시 화가들의 묘사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 중에서 특출하게 하이라이트를 받은 사람이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입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여자의 선을 부드럽게 그린 것만이 아니라 손마디까지도 생생하고 힘을 느끼도록 묘사한 것이 특색입니다. 또 피렌체의 성십자가 성당에 있는 라파엘로의〈소녀상〉 은 그 이상 더 잘 그릴 수 없을 정도로 표정과 재질감을 섬세하면서도 온화하게 환상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나라 화가들은 그런 재능을 못 가졌을까요? 수묵 산수 위주로 봤을 때 우리의 단원 김홍도 같은 분은 중국의 어떤 화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최상의 화품을 지녔습니다. 우리나라 화가 중에 윤두서라는 사람이 그린 자화상을 보면 그 사람의 선 또한 다빈치의 선에 못지 않지요. 그리고 몇 달 전에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수정으로 된 목걸이가 발견되었는데, 비슷하면서도 같지 않은 적절한 형태들로 만든 그 수정 목걸이를 보고 역시 우리 선인들의 슬기는 대단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훌륭한 예술 조형 솜씨에 대한 유전 형질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제가 즐겨서 사용하는 한자 중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사현정이라는 것은 사악한 것을 깨뜨려 바른 것을 나타나게 한다는 뜻으로, 잘못된 것을 자꾸 골라내서 좋은 것만 남겨 놓는다는 얘기지요. 그림이든 조각이든 어떤 창작활동의 경우에도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필요 없는 것들을 용감하게 자꾸 깨뜨려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자꾸 제거해서 필요 있는 것만 남기면 바로 그 사람이 바라던 결과가 나온다는 거지요. 그래서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고양시켜 주고 보다 나은 것, 즉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참된 것을 갈구하면서 그것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