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분수를 지키고 분수를 키우자

반갑습니다. 국민대학교의 목요특강 시리즈가 굉장히 유명한 강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강연 나온다는 게 많은 일간지와 경제신문에도 나왔더라구요. 그런데 그 기사를 보고 여러 분들이 전화를 주셨는데 그 중 모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님이 전화를 하셔서 원래 건축일을 하는 사람이 왜 '분수를 지키고 키우자'는 주제로 강의를 하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축가도 사람이고 시민이고 국민인데 건축가가 굳이 건축 이야기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결국 그 분이 원했던 것도 제 전공인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련된 인터뷰였던 모양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먼저 꺼낸 것은 건축가는 건축을 통해서 먹고살아가야 되지만 좀더 근사하게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해야겠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즐겨 쓰는 말 중에 '프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프로가 되자는 말을 곧잘 쓰는데 그것과 아울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 사회인이 되는 겁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프로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를 어느 만큼 프로 사회로 만드느냐, 그런 사회가 되도록 얼마만큼 기여하는가도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또 '프로'라는 말과 함께 많이 사용하는 것이 '분수'입니다. 분수를 지키고 분수를 키우자는 짧은 말 속에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꿈이 담겨질 수 있는 겁니다. 건축분야는 IMF 이전인 재작년부터 이미 불황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IMF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회 각 분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이미 불황이 시작된 건축계는 더욱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일을 만들려고 해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회가 돌아가지 않으니 일거리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조금 지위가 있고 인정받는 건축가인 저도 이 난국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감이 안 잡힐 정도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일감이 없어 작년(1997년) 11월부터 한 백여 일 동안 그저 쉬면서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오히려 그때가 즐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좀더 발전되게 살아남을까 고민했지만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이런 고민의 과정 속에 우리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사회를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고민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위기라는 큰 난국이 우리들을 좀더 올바른 사회인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1세기는 이른바 경쟁과 풍요의 사회로 일컬어집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일 잘하고 돈 잘 버는 사람은 엄청나게 돈을 잘 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훨씬 많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빨리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기술을 제대로 습득해야 합니다. 저는 제 딸들에게 일을 열심히 할 줄 아는 만큼 제대로 놀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일과 놀이의 구분이 상당히 모호하긴 하지만 일 이외의 부분을 놀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부분에 지치지 않고 싫증내지 않고 살 수 있는 게 바로 열심히 즐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열심히 논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다른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푼다는 말이 됩니다. 고스톱을 잘 치든지 춤을 잘 추든지 술을 잘 마시든지 하는 것들도 일종의 다른 일의 스트레스를 푸는 과정이겠지만, 또 격식을 갖추고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놀이란 새로운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일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격식을 가지고 제대로 놀 때 가능합니다. 저마다 놀이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저는 주로 사람들하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하고 술 마시고 춤추는 것보다는 그들과 어울려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것을 저는 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놀이를 통해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저마다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제 나름의 놀이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물론 이런 놀이 말고 여행을 다니는 것을 놀이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자신만의 놀이방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일수록 자신의 놀이문화를 갖고 있는데 특히 유럽사람들의 놀이문화는 우리가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그들은 어느 영역에 대해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으면 끝까지 파헤칩니다. 굉장히 섬세하고 깊게 파헤쳐서 반 전문가가 될 정도로 열심인데 이런 것이 지적이나 감성적으로 자신을 자극시켜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몇 권의 책을 썼는데 이른바 프로 전문인으로서의 생각을 담은《나의 테마는 사람, 나의 프로젝트는 세계》라는 책 말고도 프로 사회인을 강조한 에세이들도 많이 썼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볼 7가지 정도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시스템'입니다. 일하는 시스템, 사회 돌아가는 시스템, 또 원칙적인 시스템 등인데 우리 사회는 이런 시스템보다는 항상 개인주의적인 풍토, 즉 치고 빠지기, 한탕하기, 스타 만들기, 영웅 만들기 등이 더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올바른 기본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변형과 편법이 존재할 뿐 원칙적인 기본은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뛰어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있어도 사회에서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전체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느냐 하는 시스템이 사실 뛰어난 개인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회 인프라인데, 그런 시스템을 갖추는 데 우리 힘을 써야 합니다. 둘째, 또 저는 '기술 마인드'를 높게 평가합니다. 제가《여성과 테크놀러지》라는 책을 아주 감명깊게 읽었는데 기술을 이해해야 진짜 파워가 생긴다는 내용을 담은 페미니스트 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술주의와는 다소 다릅니다. 우리가 말하는 기술주의는 도구주의적인 면에 치우쳐 기술의 핵심과 운영, 그리고 실생활과의 접목 등에 대해서는 경직돼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우리 사회의 관념성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여자도 군대를 보내든가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 대신에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다소 황당해 보이는 발언들을 저는 하곤 합니다. 즉 기술이라는 것을 생활주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성과주의, 책임주의'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일을 하고 그 성과에 대해서 내가 과실을 갖게 된다는 원칙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나 전체주의, 봉건주의와 왕권주의에서 갖추지 못한 것이 성과와 책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네번째로 저는 '차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평등주의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라기보다는 평준주의라고 생각됩니다. 성과주의와 책임주의를 앞세운 평등이 아니라 그저 같은 수준이 유효한 평준주의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교육이라든가 이른바 지역 이기주의, 부처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들도 모두 평등주의에서 기인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차등의 결과에 대해서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분위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차등이 결국 사회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여자로서 엄청나게 많은 차별과 차등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차등을 주장하는 것은 기회는 평등해야겠지만 그 결과에서의 차등은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차등, 결과에 대한 차등이 올바르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될 때 경제위기, 사회위기를 돌파하기도 훨씬 수월할 것으로 봅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는다고 할 때 싸게 짓는 집도 있어야겠지만 엄청나게 비싼 집도 필요한 법입니다. 똑같은 공공건물이라고 할지라도 파격적이고 독특한 건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건물이 생겨날 수 있는 법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대해 잠깐 얘기해 볼까요? 흔히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로비도 하고 끈끈하게 술도 마셔야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남자들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아는 여성분 중에 이런 일을 아주 즐기시는 분이 계십니다. 남자들이 말하는 끈끈한 정도 이해하는 그런 분입니다. 물론 로비도 잘하지요. 저는 이런 부분을 성별에 따른 차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기준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교육이나 유전적 요인에 의해 남성들이 그런 부분을 좀더 감당할 수 있을 뿐 여성이라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차별보다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섯번째로는 '현장주의' 입니다. 제가 지금도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있고 박사학위까지 받고 3년여 기간동안 공공연구기관에 있었지만 민간부문으로 뛰쳐나왔던 것은 바로 현장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시스템이나 기술주의, 성과주의와 차등주의가 대형 공공기관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현장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로 발생하는 비효율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상아탑이라는 이데올로기, 지식주의의 이데올로기가 현장주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대학뿐이 아니라 국회도 마찬가지이고 정치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법과 제도가 완벽하다 하더라도 현장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 허다합니다. 현장주의를 도시에 비교해 보지요. 저는 외국의 어떤 도시의 모델을 서울에 적용시킨다면 어디가 좋겠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서울은 서울이다'라고 답합니다. 서울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서울일 뿐이라는 겁니다. 조금 넓게 생각해 보면 서울의 문제는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울의 시각으로 봐야지 다른 세상의 다른 시선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개 기업의 문제도 그 기업의 눈에서 살펴봐야지 다른 기업과 같은 잣대로만 볼 수 없을 것이고 개인의 문제를 모든 사람들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바로 이런 부분을 극복할 수 있는 게 현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바닥에서, 그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현장주의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좀더 길게 보자'를 강조해봅니다. 우리 사회는 전쟁을 겪어서인지 일종의 대리전쟁 신드롬이라는 게 있어서 지금 당장만 넘기면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4 반세기를 살아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만 앞을 보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데 지금에 급급해서, 당장의 이익과 문제를 끄기 위해서 일하다 보니 조금 더 긴 결과에 대해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곱째, '세계를 좀더 넓게 보자'도 강조해 봅니다. 또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지엽적으로만 보다 보니 큰 일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IMF 이전에 생각했던 세계화의 개념은 세계의 구조적인 변화를 직시하기보다는 그에따른 문화적, 사회적인 현상에만 매몰돼 소비적인 모습만 보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세상을 넓게 보고 좀더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폐적인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는 면도 보입니다. 진취적이라기보다는 다소 방어적인 민족미학도 존재합니다. 이제는 좀더 넓게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런 7가지의 각론에 앞선 전제는 바로 '분수를 지키고 분수를 키우자'는 말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원칙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이런 논리에 대비시킵니다. 건축 이야기나 도시 이야기, 사회문제, 정치문제를 말할 때도 앞의 원칙대로 대비해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해답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건축분야에서 전문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사회에 대한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제 자신이 한 명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의 분야 이외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대응할 수 있을 때 좀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화의 덫》이라는 탁월한 책에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20:80의 비율로 나누어 일을 하는 사람 20, 그렇지 못한 사람이 80의 비율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곧 도래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시사합니다. 건축을 예로 들면 예전에는 약 40, 50명이 해야 할 일은 지금은 10여 명으로도 아무렇지 않게 해 낼 수 있습니다. 아마 10여 명이 일하는 것도 인허가나 고객상대 등 대외적인 일 때문에 그렇지 실제 전문프로들끼리 생산적으로 일한다면 훨씬 적은 인원으로도 가능할 겁니다. 그만큼 앞으로의 사회에서 일자리들이 줄어들게 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20:80의 비율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또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계신 여러분 가운데도 80에 포함될 확률이 많은 사람들이 20보다 훨씬 많을지 모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요즘은 사라졌다고 하는데 앞으로의 추세가 바로 그렇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요즘 경기불황으로 국내의 일자리가 부족하자 외국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말들도 나오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일생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적은 것이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대답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여러분들 세대란 아마도 지금의 기준으로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것만을 추구하다 보면 삶에서 실패할 수 있는 개연성이 훨씬 더 높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훨씬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할 텐데, 일에 대한 개념, 놀이에 대한 개념, 삶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야 할겁니다. 누가 만들어 놓은 가치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한 가지 격려라면, 분명 힘들지만 흥미롭기도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만큼 도전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