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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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특강공지

  강연제목 정도전, 할 말 있다
  61 회
  초청연사 김흥기 (연기자)
  강연일시 1997년 05월 29일
  강연장소 본부관 학술회의장
  조회수 17996 회
 
안녕하세요? 먼저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학교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오늘 제 얘기 중에 그 동안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선생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일들을 얘기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해 주신 봉화(奉化) 정(鄭)씨 문중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이 자리가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반성해 보고 오늘의 우리를 토대로 해서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제 얘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조선 개국을 놓고 얘기할 때 삼봉 정도전 선생을 빼놓고는 아무 얘기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삼봉 정도전 선생은 그 동안에는 너무나 역사 속에 가려져 있었고 또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방송국에서 삼봉 정도전 역할을 해달라고 했을 때 저는 거절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1982년도〈개국〉때 삼봉 역할을 했었고, 제 개인적으로는 좀 길게 나오는 방원이나 이성계 이런 역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통틀어서 삼봉 선생의 역을 맡아 할 사람은 김흥기밖에 없다는 여론에 밀려 이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삼봉 선생은 정치, 경제, 문학, 군사, 의학, 역학, 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면에 뛰어난 예지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 분의 사상과 그 분의 큰 뜻을 600년 후에 태어난 제가 어떻게 감히 시청자들에게 자신 있는 표현을 하겠는가 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실은 이 역할을 회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요동정벌 문제라든지 삼봉 선생을 제대로 그려 줄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다짐을 받고 배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삼봉 선생은 그 당시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계셨던 정운경 선생의 사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바로 밑 동생인 정도존 또 그 밑에 정도복, 그리고 또 한 분의 누이가 있었습니다. 결과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 사건이 나던 날 밤 이 두 아우는 그 자리에서 참사를 당했고, 정도전 선생의 아들도 삼형제인데 둘은 그 자리에서 참사를 당했고, 조카들은 자결을 했고, 큰아들은 살았습니다. 큰아들은 나중에 나주목 목사가 되었다가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 판윤을 두 차례나 역임했습니다. 삼봉 선생은 우선 성리학을 보급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고려시대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불교와 정치가 야합을 하면서 문란해진 시점에서, 현실 학문인 성리학을 이끌어내어 도덕적인 가치 위에서 민생을 유지해야겠다는 뜻에서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곡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선생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라고 하는 위대한 학문으로 꽃을 피우는 토대를 마련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고려시대 정중부의 난 이후 최충헌과 최우의 4대에 이르기까지 약 60여 년간 무신 정권이 집권하다가 항몽의 기간을 거쳐서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을 하는 동안 부가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제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는 원칙, 즉 경작하는 자가 당연히 땅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공신들과 불교사찰들이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몰수 내지는 환수해서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전제개혁 정치를 폈습니다. 그 다음에 통치 이념과 제도 정비를 들 수 있습니다. 삼봉 선생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민본주의일 겁니다. 왕이라는 것은 백성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왕은 백성을 위해서 모든 일에 전력투구해야 된다는 개념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것이《조선경국전》이라는 조선조의 통치이념적인 서적으로 출판이 되고, 후에《조선경국대전》으로 발전되는 것을 여러분들도 다 아실 겁니다. 그리고 삼봉 선생은 '이신벌군'(以臣伐君)이라는 얘기를 처음 썼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백성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자기 할 도리를 안하면 왕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삼봉 선생은 그 사상을 토대로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조선왕조가 탄생되었다고 봅니다. 저에게 "삼봉 선생은 혹 사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 아니냐?" "평양에 기자단을 설치한 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자단이라 하면 기자조선의 그 기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왜 그것만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요동을 정벌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쪽 지역 정서를 맞추기 위해서 기자단을 설치했고, 그 이듬해 바로 우리의 시조인 단군을 함께 합배를 시켰습니다" 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 다음 삼봉 선생은 기록에도 나오다시피 한양 천도를 상당히 반대했습니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도 지나친 역사(役事)를 일으킴으로써 국고가 고갈되어서 결국은 2대도 못 가서 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민생고를 생각해서 천도 불가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도당에서 천도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계룡산이나 또 같은 서울입니다만 신촌 일대(모악)를 대궐터로 잡았었는데, 삼봉 선생은 단연코 경복궁이 바로 오늘의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설사 음양설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왕의 터는 제왕다운 면모가 있어야 된다고 해서 오늘날의 터를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학대사는 동쪽으로 문을 내야만 장자가 승계를 계속해서 왕조가 이어갈 것이라고 하였으나 삼봉 선생이 제왕은 반드시 남면이어야 한다는 설을 주장해서 지금의 경복궁이 탄생된 겁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경복궁을 건설하고 모든 문루, 제각의 명칭을 삼봉 선생이 왕명에 의해서 지은 것인데, 일설에는 그 이름들을 하룻밤 동안에 다 지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좀 과장이 되었다손 치더라도 이 분의 예지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삼봉 선생은 도덕적인 정치를 펴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모든 문루의 이름도 성리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인의예지선덕홍화(仁義禮智善德洪化)를 많이 썼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남대문이 숭례문이고, 동대문이 흥인문이고, 그리고 창의문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전각 이름이나 각 문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삼봉 선생은 조선조 500년 동안 복권이 안 되다가 고종 2년 때에야 비로소 복권이 되었습니다. 종친회에 그 부분에 대해 문의했더니 대원군이 경복궁을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삼봉 정도전 선생의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때에 와서 비로소 복권이 되었고, 그 동안에는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재상 중심주의를 주창하신 분이기 때문에 경복궁 중건이 아니었으면 언제 복권이 이루어졌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봉 선생의 뛰어난 부분은 요동 정벌의 꿈을 가지고 그것을 구체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하고 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많이 빚어졌기 때문에 그때의 군대는 사병(私兵) 중심으로 편성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삼봉 선생은 군이라는 것은 왕의 명만을 따라야 통솔이 일사불란하게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사병 혁파를 주장하다가 결국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어받아서 완성시킨 것이 태종 이방원입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행적을 보면 삼봉 선생이 수립해 놓은 개혁정치를 그대로 답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는 이〈용의 눈물〉에 출연하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는 것이 학교에서 배울 때는 정도전이 반역자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삼봉 정도전 선생이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는 "삼봉 정도전은 난세의 영웅이요, 난세를 극복한 영웅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 사람이며, 참된 선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것을 600년 후의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 대선각자이며 마키아벨리보다도 뛰어난 선각자다" 라고 평합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잘못된 역사를 배웠습니까?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식민사관을 탈피해야 하고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패배주의나 열등감 같은 것을 떨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반역자였을까요?《조선왕조실록》(太祖實錄)을 보더라도 반역이라는 단어는 한 군데도 안 나옵니다. 오죽 궁했으면 종친을 죽이려 했다는 미명하에 삼봉 선생을 죽이지 않습니까. 삼봉 선생이 사리사욕을 전혀 차리지 않은, 그야말로 국가의 천년 대계와 백성을 위해서 산 선각자였던 것은 그날 죽고 나서 죄를 씌우려고 집을 뒤졌던 사람이 이방원에게 아무리 뒤져도 금붙이 하나 없고 먼지만 나오더라고 보고했다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민속촌에서 촬영을 하는 과정에 시조를 읊은 것이 있습니다. "양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에 담긴 성현의 뜻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30년 긴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이룩한 이내 사업, (송현방) 벗님네에서 한 잔술 나누는 사이 모두 다 허사가 되었구나." 이것을 자조라고 표현 할 수도 있겠고,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지 않았느냐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칼맞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그 장면을 지켜보던 관광객들도 모두 숙연해지고 또 우리 스태프와 연기자 몇 명은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 다음에 과연 삼봉 선생이 그 당시에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면 요동을 정벌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저는 요동을 정벌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고, 또 믿고 싶습니다. 삼봉 선생의 저서 중에 군사에 대한 저서가 유난히 많습니다. 여러 가지 군사학에 대한 것을 전부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진법, 우리나라 지형지물에 맞는 군사학을 저술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진법 훈련을 하고 국경을 시찰하면서 유비고라는 창고를 세워서 군량미를 비축한 것으로 미루어봐서도 요동 공략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을 해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삼봉 선생은 도결이라는 침구법, 침 놓는 자리를 도표로 해서 만들어 놨거든요. 물론 민생에도 필요했겠지만 한편으로 보면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부상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국경을 순찰할 때 퉁두란( 豆蘭)을 대동하게 되는데, 퉁두란은 조선국에 귀화한 여진족의 족장으로 그와 같이 여진족을 회유해서 태조 이성계의 친위군대로 만듭니다. 그래서 압록강을 건너가서 명나라를 치면 명나라가 이쪽이 주력부대라고 여기겠지만 사실 주력부대는 여진족으로 되어 있었고, 두만강을 넘어 우회를 해서 뒤를 치겠다고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는 겁니다. 저도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쟁결과 승패도 중요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명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등거리 외교관계를 갖고자 한 그것이 얼마나 큰 자긍심을 줄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거지요. 세 번째로 많이 얘기되는 것이 신권주의입니다. 지금부터 600년 전이면 전세계가 거의 다 절대왕권하에서 살았는데 왜 삼봉 선생은 재상 중심주의를 부르짖었느냐? 이것은 고려시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삼봉 선생이 태어난 것이 1342년 고려 충혜왕 복위 3년 때인데 충혜왕은 충숙왕의 세자이면서 부자간의 왕위찬탈이 일어나서 왕을 두 번 한 사람입니다. 삼봉 선생은 그때로부터 태조에 이르기까지 대충 세어봐도 적어도 아홉 명의 왕을 받들어 모신 분입니다. 한 임금의 임기가 평균 잡아 6년 정도입니다. 왕권이 문란하면 결국 고통받는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성들일진대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재상 중심주의를 주창하게 된 것이지요. 네 번째로 왜 오늘날〈용의 눈물〉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술자리에서도〈용의 눈물〉얘기가 많이 나오는가 하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상당히 많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현재의 시국과 무관하지 않은 데서 온다고 봅니다. 요즘에 신문지상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내가 용이로다 하는 대선주자들의 게임을 보면서, 또는 일부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부패와 비굴한 모습을 보면서, 또는 일부 기업가의 몰지각한 행위로 인해서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국정과 무관한 사람이 국정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행태를 보면서 이 시대에는 과연 삼봉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인가,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드라마에서 암시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이번에 삼봉 선생 역할을 하면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배웠고, 울분을 느꼈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선각자가 권력에 욕심을 내는 사람에 의해서 비명에 갈 때, 저는 뒤에서 칼을 내리치는 순간에 일부러 눈을 감았습니다. 왜 그렇게 가슴이 답답한지 죽어서 쓰러지면서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때는 저 개인 김흥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보니까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죽는 날까지 이렇게 비가 내리는구나! 맑은 하늘 한 번 못 보고 죽는구나! 이러한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삼봉 선생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서, 아니 6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그 분을 오늘날에 다시 모셔 오기 위해서 많은 공부를 했고, 삼봉 선생과 정말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녹화 날 아침은 목욕재개를 하고 '삼봉 선생님, 정말로 저를 도와주십시오. 김흥기를 통해서 선생님은 다시 600년 후에 오늘날의 후손들과 만나는 겁니다. 제가 진솔한 마음으로 떳떳한 마음으로 아무런 욕심 없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국민에게는 삼봉 선생이 요동 정벌을 꿈꾸었듯 대륙 진출의 꿈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잠재의식 속에 면면히 지금의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요동 정벌은 기업,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얼빈 어디엔가에 우리 공장이 있고, 남미 어느 곳에 우리의 문화사절단이 가서 우리의 한국 정서를 잘 알리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 저는 감히 이 자리에 참석한 젊은 학생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통일 조국이 가시권에 들어온 지금 이 순간, 꿈은 클수록 좋은 것이니까 큰 꿈을 가져라! 우리 배달민족의 말발굽이 전세계를 밟을 수 있도록 큰 꿈을 가져라!" 21세기는 우리 민족이 다시 한 번 웅비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세기라는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안중근 의사의 웅지에 넘치는 시를 한 수 읊는 것으로 오늘의 제 얘기를 마칠까 합니다.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두만강수(水)에 먹을 갈아 창공을 백지 삼아 일필휘지하리라.' 우리 젊은이들이여! 새로운 미래를 힘차게 건설합시다. 감사합니다.
강연일시 초청연사   강연제목
66 1997-10-30 진대제   반도체 산업의 전망에 대하여
65 1997-10-16 김천주   시장개방과 소비자의 자세
64 1997-10-9 오태석   볼거리 만들기
63 1997-9-25 오명   정보사회의 국가 경쟁력
62 1997-9-11 배순훈   한국기업의 경쟁력
61 1997-5-29 김흥기   정도전, 할 말 있다
60 1997-5-22 김영동   우리 삶의 축척, 우리 음악
59 1997-5-15 진태옥   패션디자인과 삶
58 1997-5-8 김서봉   미술과 작가정신
57 1997-5-1 배한성   요즘 사람들의 언어형태
56 1997-4-17 이대용   운명에의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