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교육학과- - 특강 및 행사안내 > 목요특강 공지 : 나팔꽃이 피어 있는 곳에서는 나팔꽃이 피어난다

정말 반갑습니다. 오늘 강연 제목은 ‘나팔꽃이 피어있는 곳에서는 나팔꽃이 피어난다’입니다. 거창해 보일지 모르는 긴 제목이지만 내용은 별거 없습니다. 저희 집 근처에 굉장히 흉물스러운 식물이 있습니다. 철망을 기어 올라가다가 말라 비틀어져서 꺾이거나 부러져 있는데 겨울을 보낸 식물의 시체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흉물스러운 줄기에서 다시 나팔꽃이 피어나더군요.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나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사람들이 제 가슴 속에 어떤 사랑으로 들어와 제가 늘 그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쓰게 된다고. 그처럼 사랑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닮은 다른 사랑으로 태어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제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영등포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는데 거기에서의 첫 느낌은 어찌 보면 그 곳 분위기가 바깥 세상보다 더 자유로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먼저 수감자 명단을 받았습니다. 명단에 수감자들의 이름, 형량, 죄명이 다 적혀 있었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 등이 적힌 200여 명 정도의 명단을 쭉 보면서 과연 이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갈 때는 모든 소지품을 다 두고 가야 했습니다. 문을 열고 제가 들어갔을 때 20대부터 60대까지 섞여 있던 그 분들이 너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굉장히 경직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참 의외였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강연을 하는 동안 제가 다녔던 어느 곳보다 굉장히 진지하게 강연을 들어주어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 중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머리를 빡빡 깍은 두 분이 앞에 앉아 있었는데 처음엔 좀 무서웠습니다. 강연이 다 끝나고 저는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가슴 속엔 어쩌면 어느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하나쯤은 다 있겠지요. 그런데 어쩌면 그 아픔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소중한 것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처럼 선량한 눈빛을 여기 두고 저만 혼자 사회로 나가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말을 마치고 세 개의 문을 거쳐 나오는데 그냥 눈물이 나오더군요. 그 분들의 눈빛 하나 하나가 생각나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그 때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귀한 곳에 저를 세워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아픔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제 삶을 통해서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연탄길’을 새벽 늦게까지 집필했었는데 어느 날 오른쪽 귀에서 왱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매미소리 같았어요. 그런데 한 3일 지나니까 왼쪽에서까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기계소리처럼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이명이라고 하지요. 3년째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 고통이 얼만큼 큰 것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를 겁니다. 병원을 여섯 군데나 다녔는데 수술도 안 되더군요. 이 병은 현대인에게 불치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저처럼 과로 때문에 생길 수도 있지만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크게 듣는 사람에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방안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있을 때 주위에서는 저를 포기했었습니다. 그 때 다만 딸아이가 제 가슴에 안겨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지만 아빠가 너무 불쌍했던 거죠.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같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느날 아이가 맞춤법이 다 틀린 편지를 한 통 써 왔습니다. 아빠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를 제가 누워 있던 방에다 붙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힘이 안 났습니다. 그 때는 이미 우울증이 깊어졌던 때였습니다. 우울증, 불면증, 자살충동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그리고서 결국은 하나님께 기도를 할 것인지 죽어버릴 것인지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게 작년 3월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기도를 택했습니다. 무릎 꿇고 몇 시간을 했습니다. 네 시간도 좋고 여덟 시간도 좋고 그냥 기도하다가 지치면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또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기도한 끝에 불면증과 우울증을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어요. 이번 한 번만 저를 일으켜 달라고. 제가 일어난다면 저 하나만을 위해 세상을 살지 않겠다고. 저도 세상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겠다고. 결국 저는 한달만에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현재 어지럼증에서 벗어난 지 한 보름 정도 됩니다. 이명 현상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그 아픔을 겪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었겠죠. 몇 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그 때도 한참 어지러웠을 때인데 아침 일찍 나가야 할 일이 있었어요. 새벽에 많은 눈이 내려 길이 빙판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미끄러운 육교를 난간을 붙들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하얗고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 한 분이 초라한 차림으로 육교 계단에 얼어붙은 눈을 삽으로 떼어내고 있었어요. 제가 살짝 다가가서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이런 일은 저희 같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제 옆으로는 할아버지께 꾸벅 인사를 하고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런 건 그냥 우리들이 해야죠. 젊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하며 얼굴도 안 보시고 그냥 일하시더라고요. 제가 할아버지 댁이 여기 근처냐고 여쭈어 보니, 할아버지께서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나는 눈이 오는 날이면 항상 여기에 나옵니다. 제 아들이 지금 나이 40이 다 되어 가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넘어져 지금 3년째 방안에 누워 있어요. 다른 사람이 우리 아들처럼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제가 매번 나와서 이렇게 눈을 떼어내는 건 제 아들아이가 일어나게 해달라는 제 마음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지요.” 저 같았으면 그 육교에 가기도 싫었을 겁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상처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구나.’

그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인 제 후배와 같이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 가볍게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후배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이셨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는 6?25 참전용사로 소대장이셨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매일 눈을 뜨고 일어나시면 식사 전까지 막걸리 두 통을 드셔야 했답니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바로 소주를 드시기 시작하셨답니다. 하루 종일 몇 병이 되었건 간에 술을 드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아주 각별했습니다. 늘 아들을 안아 주고 싶어 하셨는데 아들은 커가면서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술 때문에 늘 어머니와 불화를 일으키니 오히려 아들은 점점 아버지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술 때문에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제 후배는 아버지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온 가족을 힘들게 하고 가정까지 파괴한 것과 마찬가지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아버지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갔답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였습니다. 한 미군 병사가 수없이 많은 베트콩을 죽이면서 공을 세우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병사가 한 달도 안 되어서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신분열증이었지요. 환상 속에서 자기 다리에 매달려서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베트콩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또 한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일 때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가 적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을 때 죽음을 맞이하던 일그러진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국 매일 술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죠. 그것을 본 후배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군인으로 전쟁을 겪은 우리 아버지도 그랬겠구나 깨달은 거죠. 아들은 전에 아버지가 매일 같이 술을 드셨던 이유를 몰랐었지만 그제야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더 말씀드려 볼게요. 한 젊은이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한 할아버지가 앉으셨어요. 잠시 후에 할아버지는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젊은이의 어깨에 고개를 떨구고는 잠이 드셨어요. 코까지 고셨습니다. 그래도 젊은이는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자기 할아버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버스가 종점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할아버지를 깨웠어요. 두 사람이 같이 차를 갈아타고 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젊은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 전 꿈속에서 어린 시절의 어머니 얼굴을 봤다는 겁니다. 얼마나 커다란 선물입니까. 결과적으로 젊은이는 얼마 후면 세상을 떠나실 할아버지께 어머니를 보여준 거예요. 그 젊은이의 작은 배려가 참 소중한 걸 이루어 낸 것입니다.

저는 ‘태백산맥’을 소설로는 읽지 못하고 영화로 보았습니다. 극장에 갔을 때 배우들이 사인을 해주고 있었어요. 거기 출연했던 배우가 바로 국민배우 안성기였습니다. 그리고 ‘서편제’로 무척 유명해진 오정해, 김명곤도 있었습니다. 또 한 명은 김갑수였어요. 김갑수는 연극계에선 좀 알려져 있지만 방송이나 영화에선 무명에 가까웠습니다.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안성기나, 오정해, 김명곤 앞에서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지만 김갑수 앞에는 한 세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 때 김갑수의 얼굴이 정말 빨간 색종이 같았어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서 앞도 못 봤습니다. 저 같았으면 도망갔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냥 앉아 있더라고요. 참 안 돼 보였어요. 결국 영화가 시작되어 사인회가 중단되었습니다. 두 시간 넘게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김갑수는 스포츠형 머리에 억센 전라도 사투리를 하며 혼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시 팬 사인회가 이어졌습니다. 김갑수의 엄청난 연기를 본 관객들은 김갑수 앞에 줄을 서기 시작해서 그 줄이 극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 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의 뒷모습이란 게 저런 거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질 때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사람은 참 느낌이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 날 저는 김갑수의 모습을 통해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실제 그 뒤로 김갑수가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제가 가르친 여학생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IMF 때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는 경우도 많지만 어머니가 나가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어요. 그 학생도 어머니가 집을 나갔지요. 그 전에 어머니가 창가에 나팔꽃을 심어 놓으셨었는데 해마다 거기에 나팔꽃이 피어나니까 아버지는 나팔꽃 씨를 받아 놓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거예요. 밤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 놓기도 했습니다. 무능했다는 사실을 빼면 아버지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집을 나간 어머니가 너무했던 거죠.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는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찾아다닙니다. 거의 1년 동안 찾았지만 어머니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술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술에 취해 길에 넘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영희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누워 계시면 아버지가 돌아가실까봐 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 아버지의 입에 떠 넣어 주었습니다. 밥 안 드시면 죽는다고 아버지께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근근히 연명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중 영희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영희에게 운동회에 꼭 같이 참석하기로 약속했고 영희는 아버지와 같이 운동회에 나가는 것이 매우 좋았습니다. 운동회 날 영희는 아버지 손을 잡고 신나게 학교에 갑니다. 가는 길에 영희는 길가 절벽 위에 핀 장미를 꺾어달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그것을 힘들게 꺾어 줍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걷는 중에 계속 땀을 닦습니다. 영희가 아버지께 왜 자꾸 땀을 흘리시냐고 여쭈어 보니 아버지는 자신이 여름에 태어나서 그렇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운동장까지 왔는데 아버지는 너무 힘이 드니 집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영희에게 묻습니다. 영희가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요? 영희는 울면서 운동장으로 막 뛰어 들어갔습니다. 뛰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버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없이 운동회를 마치고 영희가 집에 쓸쓸히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예상했던 대로 또 넘어져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영희는 속이 상해서 또 술을 드시고 넘어져서 다치셨냐고 화를 내며 웁니다. 그 때 아버지는 일어나 영희를 꼭 안아주기만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머리를 다친 건 영희 때문이었습니다. 학교를 가는 길에 영희가 장미가 예쁘다고 했을 때 딸아이에게 장미를 따주려고 발을 힘차게 구르다가 난간에 부딪혀 머리가 찢어진 거였습니다. 여섯 바늘 정도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데 계속 땀을 닦는 척 피를 닦아낸 거죠. 피를 닦으면서 운동장 앞까지 간 겁니다. 다친 사정을 아버지가 영희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영희를 안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술, 담배도 끊고 일도 다시 시작할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영희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창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립니다. 나팔꽃은 그 집에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 그렇게 창문을 기어오르는 거라고. 영희가 나팔꽃을 볼 때마다 나팔꽃은 어머니의 얼굴이 되어 영희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가진 글의 제목이 ‘나팔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난 여러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제가 만났던 사랑이 제 마음속에서, 그리고 여러분 마음속에서 또 다른 사랑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는 동안 여러분이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